2019-8. 새 생명 꿈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 15:19-21
설교일시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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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 꿈틀
출15:19-21
(2019/02/24, 주현 후 제7주)

[바로의 군마가 그의 병거와 기병과 함께 갈라진 바다로 들어갔을 때에, 주님께서 바닷물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덮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건넜다. 그 때에, 아론의 누이요 예언자인 미리암이 손에 소구를 드니, 여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와, 소구를 들고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제국의 운명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상을 세우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번 주간에는 역사적인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평화의 초석이 놓이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일도 다가옵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인간의 죄성과 그런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만들어내는 무늬입니다. 흑암과 공허와 깊음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스러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신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은 유구합니다. 전능할 수 없는 존재가 전능함을 전유하려 할 때 폭력이 개입합니다. 폭력은 부정적인 의미의 ‘힘’입니다. 힘에 취한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동료 인간을 존엄한 타자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욕망 충족의 수단일 뿐입니다. 자기 욕망 실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들을 제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의 우울한 초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지배의 욕망이 객체화된 것이 제국입니다. 제국은 무한한 자기 확장을 꾀합니다. 제국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폭력 기계가 됩니다. 힘으로 타자를 제압한 후에 자기의 의지를 강요합니다. 힘 없는 이들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외는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습니다.

출애굽기의 서장은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비인간 혹은 반인간 취급을 당하던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조르주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였습니다.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생명, 즉 누구의 보호도 기대할 수 없는 생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들으심은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히브리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론 토지의 비옥함을 일컫는 말이지만, 누구의 압제도 받지 않는 자유인의 삶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한껏 누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그 꿈을 가로막는 이들을 벌하십니다. 압제에서 자유로, 죽임의 문화에서 살림의 문화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로 상징되는 애굽의 전제정치를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각각의 재앙은 그 문명의 토대를 뒤흔들었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태양신의 나라라고 하는 애굽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동시에, 태양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바로에 대한 심판을 뜻합니다. 그리고 열 번째 재앙인 맏아들의 죽음은 그 땅에서 생명의 기운이 고갈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소수자에 지나지 않던 히브리인들이 오랜 역사를 가진 애굽의 체제를 뒤흔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들도 무력감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이 들어가자 그들은 벌떡 일어나 자유를 향한 긴 모험에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넌 후 부른 모세의 노래나 미리암의 노래는 바로 그 사실을 간략하지만 힘 있게 증언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출15:21). 애굽의 말과 병거와 마병은 제국을 지탱하던 폭력 기계였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그 막강해 보이던 폭력 기계가 속절없이 무력화 되었습니다. 성경의 전승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층위에 속하는 미리암의 노래는 압제당하는 이들의 가슴에 선선한 희망을 불어넣곤 했습니다.

∙생명은 일어섬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망쳐놓은 역사를 바로잡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자기 꿈으로 삼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역사가 암흑 속으로 빠져들 때,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지향을 잃고 욕망 언저리를 맴돌며 살 때, 하나님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날’은 역사의 총괄갱신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날‘을 자기 삶의 뿌리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오늘의 고단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도록 우리 영혼을 지켜주는 보루입니다. 믿는 이들이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에 대항해 일어났던 3.1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3.1 만세운동은 제 아무리 억압이 극심해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꿈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 계시 사건입니다. 그 위대한 독립의 선언이 겨울과 봄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우수와 경칩 사이, 해동머리에 일어난 그 사건은 우리 민족이 제국의 폭압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오롯이 드러냈습니다. 얼었던 대지를 뚫고 일어서는 풀들을 주목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생명은 장엄합니다.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솟구쳐 오르려는 힘도 커집니다. 생명은 일어섬입니다.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을사늑약, 군대 해산, 의병 탄압, 헤이그 밀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폐위시키는 등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민족의 가슴에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국제 정세 또한 우리 민족의 깨어남을 재촉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체제를 재편하는 중에 나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등 세계 개조의 기운이 한반도에도 몰려왔습니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선각자들은 직감했습니다. 그 거룩한 분노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은 고종 황제의 의문의 죽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에 이르렀고, 대한제국 멸망 이후 조금씩 확대되던 공화주의적인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적 책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3.1 만세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은 16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감리교인이 8명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인구의 1.5~2%인 20-30만 명 정도였습니다. 천도교인들이 300만 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역사 변혁의 전위에 선 것은 성서를 읽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를 도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이끌었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세상의 독재자들이 많은 책을 금서로 지정했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실패는 한 권의 책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책은 성경입니다. 부모님이 보내오신 편지에 부모님의 마음이 담겨 있듯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이들을 미워하십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가 한반도를 유린하고 있을 때 성경의 사람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체제가 정의롭지도 않고 영속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독립선언문이 전국적으로 유포되자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일어나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애굽 땅에 내렸던 재앙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튀어나오고, 티끌이 이로 변하고, 파리가 창궐하고, 메뚜기 떼가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 땅 어딘가에 있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그 미물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자 제국은 흔들렸습니다. 3.1 운동은 우리의 민족혼이 스러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민족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그 기개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새 생명의 꿈틀거림은 긴 겨울에 지친 이들에게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입니다. 민족혼이 깨어 약동하던 그 뜨거웠던 1919년, 교회는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고, 만세 운동의 촉매였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세상의 향도였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만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는 세상에서 타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프지만 현실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민족사의 현실에 책임적으로 응답하기에는 교회가 너무 부유해진 것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면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역사를 초월의 방향으로 견인하기보다 욕망의 굴레에 갇힌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교회는 아주 평범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本)을 버리고 말(末)을 붙잡는 어리석음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며칠 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는 100년 전에 천주교가 신도들에게 독립 운동에 동참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을 반성하는 참회의 성명을 냈습니다. 그 성명서는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선언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통절한 반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 확장에만 열을 올리면 교회는 결국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겨레의 가슴에 심원한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강압적인 지배 아래 살면서 억압과 착취를 운명처럼 감수하던 사람들 속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삶으로 입증하셨습니다. 불의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면서도 끝내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징표입니다. 우리가 3.1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자랑스러웠던 역사를 흐뭇하게 회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렸던 야성 곧 들사람 얼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다짐
3.1 만세운동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사의 문제 앞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도 대표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참 많습니다. 지금도 한국사회를 분열과 갈등에 빠뜨리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종교는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동시에 사회통합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신교의 주류 세력들은 화해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획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먼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종교에 속했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이웃에게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도 무신론적 삶, 혹은 반생명적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삶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이들 말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공의로운 세상, 경제정의가 실현된 세상, 청년과 여성과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세상, 분단 체제가 극복되는 평화로운 세상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은 우리에게 연대를 위해 용기를 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수에서 경칩을 향해 가는 계절입니다. 생명이 꿈틀대는 세상은 우리의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한글로 풀어쓴 독립선언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새봄이 온 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누나. 얼음과 찬 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저 한 때의 시세였다면, 온화한 바람, 따뜻한 햇볕에 서로 통하는 낌새가 다시 움직이는 것은 이 한 때의 시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이 마당에, 세계의 변하는 물결을 타는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주저할 것도,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자유의 길로, 생명의 길로,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가 한국 개신교회 갱신의 원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역사 발전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숨결이 이 민족의 가슴에 가득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2월 24일 10시 58분 1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