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9. 야곱 곧 이스라엘
설교자 신진식
본문 창47:27-48:4
설교일시 201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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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곱 곧 이스라엘
본문: 창세기 47:27-48:4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서 그들은 재산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다.
야곱이 이집트 땅에서 열일곱 해를 살았으니, 그의 나이가 백마흔일곱 살이었다.
이스라엘은 죽을 날을 앞두고,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놓고 일렀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 요셉이 대답하였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야곱이 다짐하였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맹세하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요셉은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야곱 곧 이스라엘은 자기의 아들 요셉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 기력을 다하여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야곱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거기에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시면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고, 그 수가 불어나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서 여러 백성이 나오게 하고, 이 땅을 너의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겠다' 하셨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여러분과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또한 미국에서 집회를 인도하시는 담임 목사님과도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 장소, 삶의 든든한 토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자리를 덮고 있는 짙은 구름을 걷고 들어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체험을 장소와 밀접하게 관련시켜 표현합니다. 일례로, 출애굽기는 유월절의 구원의 밤을 보내고, 극적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이 광야에서 곤경에 처할 때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을 때 이 경험을 가벼이 지나치지 않고 그 사건의 장소에 오롯이 새겨 넣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흘 동안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출 15:22-23)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에서 주님께 대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라고도 하고, 또 거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고 해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도 한다. (출 17:7)

모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고,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하고 외쳤다. (출 17:15-16)

‘마라’, ‘므리바’와 ‘맛사’ 그리고 ‘여호와닛시’, 이스라엘의 거룩한 체험이 녹아든 이 장소를 오늘의 우리의 삶 가운데 목격하고 체험 할 때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신앙의 뿌리가 박힌 장소는 하나님 백성의 삶과 신앙을 떠받치는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 갈릴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터전
지난 4월 16일 새벽, 부활절새벽예배가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운 탄핵 정국과 동북아의 외교 긴장이 한반도를 뒤덮은 때, 그럼에도 여전히 지리멸렬한 우리의 일상의 자리에 선포된 부활절새벽예배의 말씀은 마태복음의 갈릴리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마28:10)

마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는 갈릴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시작됐고, 갈릴리에서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를 처음 제자로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마4:18-22)

갈릴리는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의 삶의 터전이었고,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른 장소였습니다.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자료를 통해 학자들이 재구성한 갈릴리의 사회적 맥락을 짚어보면(리처드 A. 호슬리, 박경미 역, 『갈릴리: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존 도미닉 크로산, 조나단 리드, 김기철 역, 『예수의 역사』, 한국기독교연구소), 우리는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의 행위를 좀 더 의미 있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세 아들은 분봉왕이 되어 유대 지방을 나누어 각각 통치했습니다. 그 중에서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분봉왕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헤롯 대왕처럼 로마 황제를 위한 신도시를 만들어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이름을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로 명명하고 로마 황제에게 헌정합니다. 황제의 도시에 걸맞게 티베리아스에는 웅장하고 세련된 로마식 신전과 극장 그리고 행정관청이 들어섰고, 로마인들과 로마와 결탁한 유대인의 귀족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원 후 20년쯤의 일입니다.

티베리아스는 갈릴리 지역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사실, 갈릴리 지역은 역사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관심 밖의 땅이었기에 수백 년 동안 모세 율법의 전통이 살아있는 터전 위에서 자율적인 촌락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 율법의 핵심을 이루는 안식일법과 안식년법, 노예 해방법, 희년법, 과부와 고아에 대한 보호법 등은 농업과 어업에 기반한 마을 공동체에서 나눔과 협동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규범이었으며 공동체의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화는 도시화를 낳고 도시화는 상업화를 낳았습니다. 티베리아스가 건설되면서 갈릴리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고갈되었고, 자신들의 고혈을 짜내 호화롭고 무절제하게 사는 특권층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티베리아스와 그 도시 사람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불안과 염려의 구름이 되어 그들의 삶의 자리를 강력하게 덮어버렸습니다.

갈릴리에서 베드로 형제가 손에 잡은 그물은 더 이상 가족을 부양하고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거룩한 노동이 아니라, 그들의 초라하고 불안한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한 형제에게도 배와 아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자신들의 거룩한 삶과 공동체를 위한 든든한 유산이 아니었습니다. 막대한 자본이 투여된 로마의 상징물 앞에서 그들이 받은 유산은 고루한 옛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른 행위의 표층에는 갈릴리를 덮고 있는 불안과 염려가 서려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층에는 거룩한 삶과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이 깊이 침전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헌신이 티베리아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이 예수의 사역이 정점을 향해 갈수록 드러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처음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면서 예수께 대들었고, 두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7:22-23) 마침내 예수께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자, 제자들은 자신의 본심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의 이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마20:20-21)

예수께서 중앙에 좌정해 계시고 예수의 오른쪽 자리와 예수의 왼쪽 자리를 달라는 것은 우의정과 좌의정 즉 처음과 끝, 전부를 달라고 하는 요구입니다. 이 요구의 뜻을 제자들은 너무도 잘 알았기에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했다고 마태복음은 표현하고 있습니다.(마20:24)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로마 황제쯤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하나님 나라는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제국쯤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 야곱 곧 이스라엘
그러나 예수께서 병사들에게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예수는 로마 법정에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제자들은 감히 골고다 언덕을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거대하고 뜨거운 이야기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삼켜버리는 것을 목도하고 두려웠을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납득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은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골고다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 한복판에 세워졌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제자들의 마음의 풍경은 어땠을까요? 비참함과 곤고함에 가난한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진 마음에 부활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화인 맞은 마음을 안고 갈릴리로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물을 버리고, 배와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 떠난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백마흔일곱 해의 삶을 살고 죽음을 앞에 둔 야곱 곧 이스라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손자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력을 다하여 침상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유산을 전합니다. 그 유산이란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루스 땅에서 만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참되고 거룩하게 한 근원이자 자신의 후손들의 삶까지도 든든하게 세울 근원임을 사랑하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루스 땅은 맏아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야곱이 형에게 쫓겨 하란 땅으로 도망치다 첫날밤을 보낸 땅입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잠을 자다 꿈을 꿉니다. 야곱은 꿈에서 하늘과 땅에 닿아 있는 층계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말씀은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피고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나 주가 너 또한 보살피겠고 야곱 너와 너의 자손을 통해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언약의 선포였습니다.(창28:13-14) 창세기는 잠에서 깬 야곱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창28:16-19)

자신이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곱의 돌베개는 잘 살고 싶은 멋지게 살고 싶은 야곱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컸던 만큼 무질서 했기에 삶의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주님은 야곱의 그 욕망에 대한 어떤 판단도 없이 무작정 야곱에게 언약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무질서한 욕망으로 헝클어진 삶과 하나님의 언약 사이에서 야곱은 돌베개를 기둥삼아 기름을 붓습니다. 이 행위는 지금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가치들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들려주는 하늘의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가겠다는 야곱의 헌신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강력한 원형 이미지입니다. 예배란 자신의 삶의 야망과 욕망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자신의 삶의 야망과 욕망에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야곱의 삶에 대한 욕망과 야망에 고삐를 채우며,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끈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야곱 곧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여전히 세상의 거대한 이야기들과 뜨거운 이야기들이 하늘을 덮은 땅입니다. 그러나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삶이 약동하는 장소입니다. 그 갈릴리에서 십자가의 화인 맞은 마음을 안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동하는 삶을 기둥으로 삼아 거기에 예수의 삶과 가르침으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웅변하는 자신의 삶(몸)을 산제물로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2)

갈릴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십자가가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자신의 손에 쥔 그물에 그리스도로 기름 붓는 자리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자신이 받은 유산에 또한 그리스도로 기름 붓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는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던 자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보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에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마20:22)물으셨고 그들은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 갈 것이다”(마20:23)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첫 순교자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행:12:2) 그리고 교회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11명의 사도들이 모두 순교 한 후에 밧모 섬에서 마지막으로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초대 교회의 순교의 첫 자리를 야고보에게 허락하시고, 마지막 자리를 요한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처음과 끝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을 곧 이스라엘로 삼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요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장소와 장소경험의 주체인 사람의 상호작용을‘장소 정체성’이라고 개념화한 철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장소상실(placelessness)을 초래하고, 장소상실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장소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고 장소와의 유대를 상실한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역, 『장소와 장소상실』, 논형,179-183.).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갈릴리를 갖고 있으며, 그 갈릴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 이 땅 위에 청파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요, 예배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우리의 손에 든 그물은 우리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그 유산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말로 답할 수 없는 질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릴리에서 드리는 예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야곱을 곧 이스라엘 삼으시는 주님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의 갈릴리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거둠의 기도.
사랑의 주님 야곱과 같은 우리를 이스라엘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신 그 은총 따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5월 07일 12시 23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