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5 . 두려움과 욕망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7:7-10
설교일시 201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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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욕망을 넘어
눅17:7-10
(2017/06/18, 성령 강림절 제2주)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사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 조심조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도 참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만큼이나 우리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사건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아파트 외벽 도장 공사를 하던 이가 매달려 있던 줄을 끊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도 벌어졌고, 양평에서는 부부 싸움 끝에 어린이집에 있던 네 살배기 자기 아이를 데려다가 목 졸라 죽인 비정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꾸지람하는 아버지를 때려 죽인 아들도 있었습니다. 왠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런던에서는 서민들이 주거하던 그렌펠 타워 화재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재일학자인 강상중 박사의 글을 읽다가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한 대목과 만났습니다.

"인간이여 부끄러운 줄 알라, 고 하고 싶구나! 저주받은 악마조차도 그들끼리는 굳건히 일치단결을 하는 법인데 생물들 중에서 이성적인 인간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반목하는구나. 하느님이 땅에는 평화 있으라고 선포했음에도 서로 증오하고 적의를 품고 싸우는 생활에 열중하여 잔혹한 전쟁을 일으켜 지상을 황폐하게 해서는 결국 멸망할 뿐이다."(강상중,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노수경 옮김, 사계절, 2017년 3월 24일, p.111에서 재인용)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성적인 인간이 서로 반목하고, 적의를 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집니다. 가끔 제게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희망이란 원래 희박한 것이고, 위태롭기 이를 데 없지만, 희망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키워야 하는 가치라고 말하곤 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그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교적 위선과 어떻게 결별해야 하는지, 잃어버린 영혼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재물에 대한 의존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정말 소중한 가르침들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용서와 성실함과 감사와 깨어있음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이 네가지 덕목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생의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17:1-2)

이 덧거친 세상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사노라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내 말에 혹은 내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을 만날 때면 깊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변명해 보지만, 상대방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빚어지는 것일까요?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무심코 한 말이 '을'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재미삼아 던지는 돌이 개구리에게는 죽음의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작은 자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이들은 차라리 목에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엄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신영복 선생님은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이들은 늘 다른 이들의 자리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선 자리가 다르면 세상도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용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 용서 연습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17:3-4)

잘못된 일을 보고도 모른 체 눈감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으라 하십니다. 꾸짖음은 모멸감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면 몇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일본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던 시기에 일어난 박해의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강직한 신자들은 고문을 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리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온천물을 온몸에 뒤집어쓰기도 하고, 귀 뒤에 바늘 구멍을 낸 채 거꾸로 매달려 한 방울 한 방울 피를 흘리며 죽어가기도 했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바다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용자가 할만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강인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함부로 비겁하다고 조롱할 수 있을까요?

그 소설에 등장하는 기찌지로오라는 인물은 찌질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도 못한 채 서성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달아났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작가는 그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기찌지로오'적인 면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킴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향해 기어코 몸을 돌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그런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도 아파하지도 않는 이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정의의 회복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지향하되, 값싼 용서를 선언함으로 악에게 용기를 주지는 말아야 합니다.

• 마땅히 해야 할 일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이 또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는 일이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보상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루살렘 입성 전에 주님을 찾아와서 청탁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막10:37). 마태는 제자들의 이 스캔달을 조금 완화하기 위해 그들의 어머니가 청탁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0:21). 베드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여쭸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마19:27). 보상을 바라는 신앙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한 종이 있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등 많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주인이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빨리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재촉하고, 주인이 밥을 먹을 동안 시중을 다 든 후에 먹으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하신 말씀이 좀 충격적입니다.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17:9) 스멀스멀 화가 치밀어오르지 않나요? 주인의 처사가 너무 비인간적인 것 같아 영 불편합니다. 주님은 그런 주인의 행태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윤리적 도덕적 관점에서 평가하려 한다면 비유의 핵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가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메시지이지, 그 이야기가 윤리적으로 타당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어쩌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못된 지주들의 행태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17:10)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보상을 바라고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그 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한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이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노예처럼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녕 믿음의 사람이라면 날마다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메이플 리지(Maple Ridge)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살고 있는 한 형제는 그 공동체가 운영하는 목공소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짐짓 해보는 말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핵심 원리임을 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통장이 하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각자가 필요한 만큼 받았다는 초대교회의 이상이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 선다 싱의 경우
인도 출신의 위대한 전도자 선다 싱(Sundar Singh)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그는 1889년 인도 펀잡 주의 람푸르에서 부유한 시크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1905년 어느 날 그는 성경을 찢어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는 목욕재계를 한 후에 밤새도록 기도를 올렸습니다. "참 신이 계시다면 저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십시오." 만약 응답이 없다고 죽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경, 그는 기도하던 방에서 거대한 빛과 만났습니다. 그 빛은 영광과 자비로 충만했습니다. "누구십니까?" 그 빛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바울의 회심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그는 그 빛 앞에 엎드렸습니다.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날 이후 그는 금욕과 고독과 명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진력하다가 1929년 어느날 실종됐습니다. 교회 전통은 바로 내일인 6월 19일을 그의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한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예배한다면, 차라리 그 속에 던져지기를. 내가 천국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내쫓으시기를. 그러나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예배한다면, 주님은 내게 당신을 보여주실 것이고, 내 가슴은 그분의 사랑과 임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예배하는 믿음만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지기 전에 왕에게 뭐라 했습니까?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단3:17).

그러나 이 말보다 더 우리 가슴을 울리는 말은 그 다음에 한 말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욥의 신실함을 칭찬하는 하나님께 사탄이 한 말이 뭡니까?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욥1:9) 이게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않으신다 해도 여전히 신앙을 지키며 살까요? 우리가 자주 실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에 속한 수피교 신비주의자인 라비아(8세기)의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씁니다. 어느날 라비아가 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한 손에는 횃불이, 그리고 다른 손에는 물동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긴 사람들은 라비아에게 어디로 그리 급히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뭐냐고도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비아는 "나는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물을 끼얹으려 가고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비전을 가로막는 베일이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요"(ed. by James Fadiman & Robert Frager, , HarperSanfrancisco, 1997, p.86) 하고 대답했습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멘 사람입니다.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형의 비극이 전형적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종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즐거워서 그렇게 사는 이라야 원망과 시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롬12:1) 말합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가운데 시험에 빠지는 이들이 많은 것은, 자신들의 행위나 실천에 대한 칭찬을 구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엡6:6)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기도하라 하셨고,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이땅에서의 소명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수행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거꾸로 두려움이나 욕망 때문에 하는 신앙적 실천은 노예의 멍에가 되기 쉽습니다. 오순절기를 거쳐가면서 우리 모두 참된 자유인으로 성장해 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6월 18일 10시 59분 1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