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2. 깨달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 3:9-13
설교일시 2017/08/06
오디오파일 s20170806.mp3 [1576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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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전3:9-13
(2017/08/06, 성령 강림 후 제9주)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 잘 믿는다는 것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이 입추입니다. 삼복더위 한복판에 가을이 들어서는 계절입니다. 음력 7월을 가리켜 맹추(孟秋)라 합니다. 무엇이든지 곧잘 잊어버리는 흐리멍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가을의 들머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후텁지근한 더위에 지칠 즈음이면 "늦더위 있다한들 절서야 속일쏘냐.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라는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르곤 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절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시면서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창8:2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환하는 계절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자연은 그렇게 여여如如하건만 철 들지 않은 인간들이 빚어내는 참담한 일들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공관병을 노예 부리듯 한 육군 대장과 그 아내 이야기가 한 주간 동안의 핫이슈였습니다. 매스컴은 그들이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는 독실한 산자였다면서 교회에서 성경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기도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실었습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독실篤實하다는 말은 도탑다는 뜻의 '독'과 '열매' 혹은 '무르익다'라는 뜻의 '실'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독실함의 외양은 갖췄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열매가 없는 삶 말입니다. 예언자들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배, 이웃에 대한 연민과 아낌이 따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이 역겨워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롬2:28-29)라고 말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함부로 대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과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표범이 자기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죄에 익숙해진 사람이 선하게 살기가 난망이라고 말했습니다(렘13:23).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닐까요?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마음에 드리운 아픔과 그림자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그들의 벗이 되기 위해 마음 쓰는 것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롬12:16)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비천한 사람이란 불공평한 세상에 의해 차별받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우리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고, 사람과 같이 되신 분을 구원자로 믿는다면 우리 또한 그런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외형적 성장에 집착하는 한국 교회는 아직 성육신의 신학을 체화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 우리 인생의 때
가끔 절망스럽다는 생각에 빠져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인간의 소망이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홍해 바다를 열어 그 백성이 지나가게 하셨고, 절망의 골짜기를 은총의 샘물이 넘치는 곳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코헬렛은 세상사에 지쳐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전3:1)

'알맞은 때'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결정적 시간 곧 카이로스입니다. 그날은 언제나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 때를 앞당길 수도 없거니와 늦출 수도 없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그 때에 맞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코헬렛은 우리 인생의 때를 설명하기 위해 14쌍의 삶의 계기를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죽을 때, 심을 때/뽑을 때, 죽일 때/살릴 때, 허물 때/세울 때, 울 때/웃을 때, 통곡할 때/기뻐 춤출 때, 돌을 흩어버릴 때/모아들일 때, 껴안을 때/껴안는 것을 삼갈 때, 찾아나설 때/포기할 때, 간직할 때/버릴 때, 찢을 때/꿰맬 때, 말하지 않을 때/말할 때, 사랑할 때/미워할 때, 전쟁을 치를 때/평화를 누릴 때. 혹시 속으로 '증권이나 부동산을 사야할 때/팔아야 할 때'를 가늠하고 계신 분 안 계신가요?

마치 음양의 원리처럼 세상은 그런 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긍정적인 삶의 계기도 있고 부정적인 계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우리 현실입니다.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노라면 실망스럽고 힘겨운 일이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고,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와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의 계기 속에서 긍정을 볼 때 희망이 유입되고, 긍정의 계기 속에서 부정을 볼 때 경거망동하지 않게 됩니다.

고통은 가끔 우리의 눈을 열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세상의 다른 현실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보면 세상에 그렇게도 많은 아픔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패배와 실패의 쓰라림을 겪었기에 지금 그런 상황에 몰린 이들의 곁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어차피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라면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웃들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이때 고통과 시련은 복된 고통이 됩니다. 삶이 두루 평안할 때는 감사함으로 그 시간을 즐겨야 하지만, 그 평안함이 혼자만의 만족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홀로 만족하는 것은 우리를 참 사람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한계 인정하기
세상 현실에 눈길을 줄 때마다 무력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의 현실이 마치 산사태가 밀려오는 것처럼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히브리의 시인들은 착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악인들이 번성하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습니다. 우리는 시편 도처에서 '어찌하여', '언제까지' 이런 현실이 계속되는 것이냐고 묻는 시인들의 탄식을 듣습니다. 코헬렛도 같은 마음이었던가 봅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3:9-10)

코헬렛의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를 역사 비관주의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세상은 제 갈길로 갈 거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굳이 세상의 흐름에 맞서 생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수산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 이익을 도모하는 게 실속 있는 행동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다음에 나오는 구절과 연결시켜 보아야 그 의미가 바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3:11)

우리가 가끔 절망에 빠지는 까닭은 역사를 바라볼 때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잠시 어둠이 빛을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근시안에 불과한 우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 9). 이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물론 인간은 그 때가 언제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하신 일의 전모를 다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마치 밤이 지나도 아침이 오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짙은 구름을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두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미세한 빛을 보면서 희망을 가다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야말로 이웃을 향한 환대와 연대의 근거입니다.

• 지금 누리는 은총
세상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신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그 대답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코헬렛은 자기가 깨달은 삶의 지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3:12) 이 말은 다소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전도서 도처에서 모든 일이 헛될 뿐이라는 다소 염세주의적인 선언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 역사에 새로운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만물이 다 지쳐 있다고 말했던 그는 왜 기쁘게 살라고 말할까요?

헛됨과 기쁨은 참 조화되기 어려운 짝입니다. 여기에 전도서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집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시간의 한계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1:11). 뭔가를 붙들기 위해 온통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 자체가 고뇌의 뿌리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는 잠시 왔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아름다운 가치를 내동댕이치게 마련입니다. 우정과 사랑과 나눔, 평화와 안식 말입니다. 허무함 혹은 공허함은 바로 그런 삶이 거두는 열매입니다.

전도자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오늘을 허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꺼워하는 것,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선물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기쁨은 자기 욕망이 다 채워지는 것과 관련이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고, 이웃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삶을 사셨기에 주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 제자들의 운명을 맡기면서 이런 기도를 바치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13).

세상에 가득 찬 부도덕과 폭력의 현실에만 눈길을 줄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과 사랑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현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이지만 그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빛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노자는 "발꿈치를 올리고 서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企者不立, 跨者不行), 도덕경 24장)고 말했습니다. 화를 내면서 오래 싸울 수 없고, 낯을 찌푸린 채 평화와 안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맛보셨던 그런 기쁨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올 때 우리는 불의한 세상과 끝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사는 것이 믿음이요, 이 기쁨을 보여 주는 것이 사랑이요,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복음"(김흥호)입니다. 삶이 고달파도 기쁨을 향해 고개를 드는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8월 06일 11시 23분 1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