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9. 인간의 등불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5:13-16
설교일시 2017/09/24
오디오파일 s20170924.mp3 [1577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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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등불
마5:13-16
(2017/09/24, 청년주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 암담한 교계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높고 청명한 하늘을 보면 마음도 따라 맑아집니다. 그러나 땅의 현실에 눈을 돌리면 낯이 절로 찌푸려집니다. 각 교단의 총회가 열리고 있는데, 총회가 하는 결의들은 한국 개신교회가 매우 퇴행적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척결하는 일이 마치 기독교와 문명의 사활이 걸린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동성애자와 그 지지자는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을 줄 수 없고, 신학교 입학을 불허하고, 세례도 줄 수 없다고 결정한 교단도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들이 특정 교리를 문자 그대로 믿는지 일일이 검증하자는 제안도 나왔습니다. 신학을 교권 아래 종속시키려는 시도가 꾸준히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목소리는 용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교리적 언어 속에 담아 박제하려는 시도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허용될 때 교회는 진리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성 안수에 대해서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여전히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주일학교 인원이 줄고 있는 현실에서 교인들에게 출산을 독려해야 한다는 권고안까지 나왔습니다. 어느 교단에서는 요가와 마술을 금지하는 결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종교 혹은 속임수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속임수를 사용하는 야구도 금지하고, 축구의 속임수 동작도 제한해야 한다는 조롱조의 말들까지 돌고 있습니다. 이혼 후 재혼은 간음이라고 규정한 교단도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들이 일 년의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중세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정말 이런 결정들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교회는 오히려 퇴행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실은 자기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온갖 장벽들을 철폐하여 모두가 소통하는 세상을 연 것이 예수님의 삶인데, 그분의 몸이 되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수많은 장벽을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자기 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청년의 종교
이러한 때 청년주일을 맞이합니다. 저는 청년 정신의 핵심이 불온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나름의 삶의 문법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은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불온하고 불안해 보입니다. 하지만 불온하지 않은 젊음처럼 슬픈 것 또한 없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청년 정신입니다. 일제시대에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죽어가는 혼들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를 청년의 종교라고 단언합니다.

"이해利害에 담박하고 정의正義에 용약湧躍함은 이것이 청년의 넋이요, 인습을 물리치고 진리眞理에 취就하며 허위를 깨뜨리고 실질實質을 취하려 함은 청년靑年의 의기意氣요, 과거의 경험 속에 지구脂垢로써 신경神經을 은폐치 않고 예기발랄銳氣潑剌한 감수성感受性으로 진위허실眞僞虛實을 판별하는 것이 청년기靑年期의 본능이 아닌가."(김교신 전집1, <信仰과 人生 上>, 노평구 편, 제일출판사, 1991년 10월 1일, p.111)

김교신 선생은 우리가 참으로 기독교 신자라면 비록 고희古稀를 넘었을지라도 오히려 청년일 것이라면서, 믿음의 사람이라면 바울 사도의 말처럼 "오직 이 한 일만을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야심만만한 인생의 선수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슴 뛰는 도전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청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가능성이 줄어든 세대라고 합니다. 무지갯빛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평준화된 욕망으로 인해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들은 점점 늘어납니다. 현실과 욕망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흙수저로 태어난 이들의 비애가 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투덜댄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지금 세계를 테러의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이슬람 스테이트(IS)에 많은 젊은이들이 몰리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현실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 소속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이 썩어빠진 세상을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IS의 선전에 현혹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거룩한 대의에 자신을 바친다고 여긴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들이 세상을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무리하게 나눈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밀과 가라지 비유에서 밀밭에 자라는 가라지를 뽑겠다고 나서는 일꾼들을 만류하셨습니다. 악을 용인하라는 말이 아니라, 악을 뿌리 뽑겠다는 열정이 다른 선함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좋은 세상은 폭력적 방식으로 일거에 오지 않습니다. 더디더라도 꾸준히 선을 지향하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지향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악과 지속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머물러야 합니다.

• 소금 또는 빛이 되라는 소명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 되어야 한다 혹은 빛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고 빛이다'라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물론 두 가지의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직설법(indicative) 속에 명령법(imperative)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이다' 속에는 이미 '~이 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내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힐 거라는 다음 구절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소금의 소금다움은 결국 짠 맛에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습관처럼 소금의 방부제 역할, 맛을 내는 역할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소금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존재 혹은 정체성의 핵심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팔복의 말씀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마지막 대목이 특히 중요합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 이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단호하고 꿋꿋하게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어느 분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참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한국 교회는 소금이 아니라 맛소금으로 변질되었다." MSG를 듬뿍 쳐서 사람들에게 용인될만한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값싼 위로를 전하고, 정의와 무관한 사랑을 전하고,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통해 자기를 지키려는 것이 과연 예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적어도 제가 아는 그리고 제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가슴이 울컥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의 교회 현실은 이 선언에 값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어둠과 혼돈과 공허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가리키는 것은 성도들의 '착한 행실'(16)입니다. 그 착한 행실은 다름 아닌 평화를 이루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나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는 사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 자신을 이웃들에게 선물로 내줄 줄 아는 사람, 불의에 대해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 세상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생명의 징조를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런 이들을 만나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반딧불이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지난 여름 어느 캄캄한 밤, 인적이 끊긴 강가에 서있는 나무들 주위에서 마치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반딧불이를 보았습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한 감동이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는 반딧불이들이 긴 역사의 어둠에 지친 제 영혼에 희망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습니다. 희미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반딧불이 같은 이들이 많아질 때 어둠의 지배력은 줄어들 것입니다. 큰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십시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만이라도 비추기 위해 인간의 등불 하나 밝혀 드십시오.

•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붙들고
억지로는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저절로 평화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마음을 온통 채우고 있는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 원망과 질투, 오만과 적대감과 작별하십시오. 우리들의 약함 속으로 화육하여 들어오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장 16절에서 한 이 말 한 마디 속에 바울 사도의 생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들 너무 영악해졌습니다. 손익 계산에 재빠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우직하게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 때 우리는 비로소 소금이고 빛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16)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믿는 이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가끔은 힘들고 외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만치 어딘가에서 자기 몫의 빛을 발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별 하나는 외롭지만, 별들이 이루는 성좌는 찬란합니다. 오늘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이 역사의 어둠과 맞설 용기를 내는 것은 세상 도처에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일꾼들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김교신 선생이 러일전쟁 30주년 좌담회 속기록을 본 후에 쓴 글에 나오는 한 구절이 제게는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상정하여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느 참호塹壕의 한 덩이 흙을 팠으며, 주主를 위하여 어디에 상처傷處를 받았으며, 천국天國을 위하여 무슨 손해損害를 받았다고 보고할까. 오히려 그리스도의 명의名義를 이용하여 취직운동就職運動을 유리하게 한 일은 없었던가? 신학교神學校 졸업卒業이란 조건으로써 도회지都會地에 고급高級으로 취임就任된 일은 없었던가?"(앞의 책, p.197)

오늘의 기독교는 늙어버렸습니다. 아름답게 늙은 것이 아니라 추하게 늙고 있습니다. 청년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김교신 선생은 믿음의 삶이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임을 넌지시 일깨워줍니다.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차 천국에서 열린 좌담회를 떠올리며 방성대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글을 맺고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건강하고 씩씩한 청년 정신을 품은 신자들이 없어 세상이 어둡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금 외로우십니다.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십시오. 도처에서 참 사람의 등불이 타오를 때 역사의 새벽은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새벽을 깨우려는 모든 이들의 삶에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9월 24일 11시 18분 2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