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9. 기다림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말 3:1-5
설교일시 20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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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자기를 깨끗이 하는 것
말3:1-5
(2018/12/09, 대림절 제2주)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헤이그의 베델교회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탄생을 전하는 누가복음의 본문은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에 간 요셉과 마리아가 겪었던 신산스러운 상황을 들려줍니다. 그들은 해산이 임박했는데도 머물 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결국 마구간에서 출산을 했고, 요람조차 없었기에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삭의 여인조차 환대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황폐해진 시대에 주님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오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상황이 달라질까요? 교회는 ‘낯선 이’,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위해 자리를 내드릴 수 있을까요? 대형교회들이 매스컴에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대개는 부정적인 일로 거론됩니다. 암담합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만드는 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베델 교회는 지금 지난 10월 26일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추방 위기에 있는 아르메니안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탐라지안(Tamrazyan)은 네덜란드에 와서 산지 벌써 9년이 되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추방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면 정치범으로 몰려 처벌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교회에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베델 교회는 공권력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보호를 요청한 사람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그들의 품이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국내법은 공공기관이 종교예식을 방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배가 지속되는 한 탐라지안 가족이 체포되거나 추방당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그 예배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적 입장과 예전적 특색이 다른 이들,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이들이 다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 가련한 가족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조각나 있던 주님의 몸을 깁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에 이 이야기는 제게 머물 곳이 없었던 성 가족의 처지와 맞물려 감명깊게 다가왔습니다.

∙언약의 특사
세상에는 절망의 조짐도 많지만 희망의 조짐도 있습니다. 현실의 어둠에 질식되어 빛의 소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어디에선가 인간성의 등불, 복음의 등불을 끈질기게 밝히는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라기서의 한 대목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대략 포로기 이후로 보입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성전을 재건했지만, 약속되었던 복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자 사람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사회 전체에 냉소와 환멸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적인 실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배는 변질되었고 제사장들은 무책임했습니다. 율법은 무시되었고 영적 불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악한 이들이 번성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역사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불의한 현실을 그저 수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 낙심한 백성들을 격려하십니다.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3:1)

하나님은 특사를 보내 당신이 오실 길을 닦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특사는 ‘주’ 혹은 ‘언약의 특사’라고 일컬어집니다. 주가 들어오실 ‘궁궐’은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고, ‘언약의 특사’는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역사의 회복은 종교의 회복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라기는 하나님과 레위와 맺은 언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레위와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화가 약속된 언약이다. 나는 그가 나를 경외하도록 그와 언약을 맺었고, 그는 과연 나를 경외하며 나의 이름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에게 늘 정직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였다.“(말2:5-6)

제사장들의 소임은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을 품도록 하고, 사람들에게 참된 법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바른 길에서 떠났고, 사람들을 곁길로 가도록 가르침으로 맺은 언약을 배신했습니다. 제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한 법입니다. 하나님도 타락한 예배에 대해 염증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말1:10)

이게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특사를 보내 주님 오실 길을 닦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특사는 죄악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분인 동시에 사람들의 부정과 죄악을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이, 표백하는 잿물과 같이 우리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믿음이란 자기의 부족함과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은총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지만 우리는 저마다 제 욕심에 이끌려 사느라 불투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창이 흐려진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우리의 불투명함을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아프더라도 우리는 불과 잿물을 통과해야 합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의 자아가 무너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산양의 소화액
자연 다큐멘터리(EBS다큐프라임, ‘녹색 동물’)를 통해 헛개나무가 어떻게 숲을 채우는지를 보았습니다. 헛개나무 씨앗은 껍질이 두꺼워서 자연 상태에서는 발아율이 아주 떨어진다고 합니다. 불과 0.8%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숲에 헛개나무가 건재한 것은 발아를 돕는 협력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협력자는 산양입니다. 산양은 겨울 숲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헛개나무 열매를 다 먹습니다. 그 열매의 과육은 소화가 되고 씨앗은 소화액과 뒤섞여 껍질이 얇아진 채 배출됩니다. 헛개나무 씨앗은 산양의 배설물 속에서 영양을 취하며 싹을 틔우고 자라납니다. 발아율이 무려 32.5%라 합니다. 자연의 신비입니다. 먹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 길도 하나님의 은혜에 삼켜지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는 가끔은 우리에게 낯선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질병, 실패, 외로움, 가난, 모욕 등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당황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빨리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부정적인 현실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아의 벽을 엷게 만드는 산양의 소화액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자아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던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이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발아되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러한 은혜의 신비를 경험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하나님은 은을 정련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말라기가 말하는 레위인들은 물론 제사장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을 굳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직자로 국한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을 가리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이들이라야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제물을 주님은 ‘올바른 제물’이라 하십니다. ‘제물의 올바름’이란 제물의 종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주체의 올바름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물, 경외심 없이 바치는 제물을 외면하십니다.

∙정의의 회복
언약의 특사는 또한 심판하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그는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들의 죄악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미래를 알려준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이들에게 미혹됩니다. 구약에서 간음하는 자는 대개 우상숭배자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쾌락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는 이들입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자기 이익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다른 이들을 타자화하고 수단으로 삼는 일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이런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서슴없이 거짓을 지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과 만났습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게 뭘까요? 답은 물이 아니라 휘발유입니다. 물이 너무 많으면 당장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휘발유를 만드는 이들은 많은 휘발유에 물을 조금 섞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하신 이만열 박사님은 가짜 뉴스를 만들어 유포하는 이들의 행태를 역사를 멍들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짜뉴스는 대부분 그럴듯한 진실에다 아주 작은 부분의 거짓을 조합했기 때문에 반신반의로 출발하여 그 거짓됨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쉽지 않다”(이만열 칼럼, ‘가짜 뉴스, 역사 멍들게 하는데 참회가 없다’,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7일자). 거짓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언약의 특사는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를 심판대에 세우실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억울하게 하는 이들은 하나님과 맞서는 이들입니다. 갑질 이야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여전히 세상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더욱 더 서럽게 만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에 햄버거가 담긴 봉지를 있는 힘껏 집어던지는 사람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청년이 하찮은 존재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 편에 서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이용 가치로 보거나, 함부로 대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오시는 분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승연 선생은 “그리움은 ‘그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 같다면서 “마음에서 그리고 있으니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 깊이에 있지 않은 것은 생기 있게 그릴 수도 없고 그리워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이승연 ‘마음의 문 여는 그리움의 향기‘, 한겨레신문, 2018년 10월 31일). 우리가 진정 주님을 그리워한다면 그분과 함께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해야 그 그림이 보일 겁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단련시키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8년 12월 09일 11시 48분 1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