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 주님은 거룩하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99:1-9
설교일시 2020-2-23
오디오파일 s20200223-2.mp3 [3002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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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거룩하시다
시99:1-9
(2020/02/23, 산상변화주일)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뭇 백성아, 떨어라. 주님께서 그룹 위에 앉으시니, 온 땅아, 흔들려라. 시온에 계시는 주님은 위대하시다. 만백성 위에 우뚝 솟은 분이시다. 만백성아, 그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우리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의 발 등상 아래 엎드려 절하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그의 제사장 가운데는 모세와 아론이 있으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 가운데는 사무엘이 있으니,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은 응답하여 주셨다. 주님께서 구름기둥 속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이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과 율례를 모두 지켰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한 대로 갚기는 하셨지만, 주님은 또한, 그들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주 우리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을 경배하여라. 주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유동하는 공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춤하는 것 같던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뒤흔들던 신천지로부터 시작된 집단 감염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이 신천지에 속한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이들 때문에 방역에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혹된 영혼들은 반사회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치장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심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대구 경북 지역 주민들에게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적인 모든 역량을 동원해도 부족한 때인데, 정략적으로 접근하며 정부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부 종교인들은 코로나19가 교회를 박해한 우한 시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말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신령한 지혜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이치를 가리는 무지한 말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이들, 마음이 온통 자기 이익에 쏠려 있으면서 입만 열면 거룩을 가장한 말들을 쏟아내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거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영적‘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옭아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독을 주입하여 마비시킵니다. 예수님은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요10: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측면을 내포하지만,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전한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 책임 있는 신앙인들의 태도입니다.

오늘은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로 주님의 산상변화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수난의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에 높은 산에 올라 눈부시게 변화되셨던 사건을 기억하는 주일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생각해 보는 단초가 될 수는 있습니다.

∙시온산과 시내산
시편 99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데, 각 부분은 “주님은 거룩하시다!”(3,5,9)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이 시 전체가 주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매우 독특합니다. 두 가지 전승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은 시온산 전승과 시내산 전승이 뒤섞여 있습니다. 시내산과 시온산은 그러니까 성서신학의 두 기둥입니다. 시온산 전승은 남왕국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삼고 있기에 때문에 성전, 법궤, 그룹 등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됩니다. 시내산 전승은 북이스라엘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고, 출애굽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내산 전승은 주님의 보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공의(mishpat)와 정의(tsedaqah)라고 말합니다(시97:2). 시온산 전승은 체제 내적인 사고를 하기에 다소 보수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시내산 전승은 변혁을 지향할 때가 많아 진보적으로 보입니다. 이 두 전통은 경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99편에서는 이 두 전통이 무리 없이 결합되고 있습니다. 그 두 전통을 이어주는 접착제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시인은 뭇 백성과 온 땅을 향해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뭇 백성아, 떨어라. 주님께서 그룹 위에 앉으시니, 온 땅아, 흔들려라”(99:1). 그룹(cherubims)은 커다란 날개를 펼쳐 법궤의 덮개인 속죄소를 가리는 천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룹 위에 앉으셔서 온 땅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뭇 백성은 떨고, 온 땅은 흔들립니다.

거룩 앞에 설 때 사람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기가 어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 잡이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라고 고백합니다. 거룩을 경험한 사람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대개 거짓된 안정 속에 머물며 살아갑니다. 내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의 허물과 죄 그리고 연약함과 유한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 바로 ‘떨림’과 ‘흔들림’입니다.

‘떨어라’와 ‘흔들려라’라는 명령은 법궤가 출현할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전용한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전장에 모셔오곤 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전황이 불리할 때면 법궤를 전장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시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님, 일어나십시오”라는 기원은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외치는 말이었습니다. 일어나시는 주님은 불의를 징치하시는 용사이십니다.

그런데 시인은 “주님은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99:4a)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힘은 정의를 사랑하시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정의를 무너뜨리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정의를 무너뜨리는 이들은 대개 강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악인들을 보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사5:20). 정의와 공의, 곧 사법적 정의와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에게 다시 설 기회를 부여하는 회복적 정의는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 질서의 기본입니다. 정의와 공의라는 토대가 흔들릴 때 삶은 불안정해지고, 신뢰가 무너져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응답하시는 왕
우리가 거룩하신 왕을 찬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부르짖는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입니다. 조금 낯선 조합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분은 응답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동족들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시려고 할 때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32:32) 하고 기도했습니다. 고라의 반역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려 하실 때 모세와 아론은 땅에 엎드린 채 “하나님, 모든 육체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 죄는 한 사람이 지었는데, 어찌 온 회중에게 진노하십니까?”(민16:22) 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 후에 백성들에게서 “우리가 주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삼상7:6)라는 고백을 이끌어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고 결국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보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심으로 그들이 참된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도 이런 기도의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통치의 양면성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불순종의 책임까지 면하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용서는 참회를 전제합니다. 참회 없는 용서는 가짜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는 교회의 숙적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은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6, p.29)

교회는 죄를 은폐해주는 덮개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은혜가 모든 것을 처리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싸구려 은혜가 기독교 신앙을 천박하게 만듭니다. 본회퍼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죄 사함‘,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값비싼 은혜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아서 그것을 얻으려는 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더러워진 옷을 던져 넣기만 하면 깨끗하게 빨아주는 자동세탁기가 아닙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은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않는(출34:7)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엄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온 땅을 다스리는 주님의 위엄과, 공평의 기초를 놓으신 주님의 사랑, 그리고 부르짖는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온 세상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정의와 공의의 토대를 허무는 여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진정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이 어떠하든지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죽음이 예기되는 상황에서도 사랑과 정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뒤숭숭한 시절입니다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삶을 가지런히 해야 할 때입니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버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위로자가 되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빛이신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한 주간을 살아가는 동안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빛과 그늘, 인도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2월 23일 12시 12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