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모든 교우님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오늘아침에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체면과 얄팍한 지식과 알량한 이성 때문에 부끄러운 하루가 됐습니다.
스위스 수도 베른(Bern)에서 30 ~ 40킬로미터 떨어진 툰(Thun)이라는 도시에서 행사를 참가하고 이틀간 그곳 호텔에 묵었습니다. 어제 점심 무렵부터 비가 내리더니 밤 사이 온도가 많이 내려가 아침에는 아주 쌀쌀했습니다.
오늘 이곳 독일 뮨헨 부근에서 중요한 일정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아침 7시에 베른의 벨프(Belp) 공항에서 첫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호텔 후런트 데스크에 아침 4시 반에 깨워 달라는 것과 공항까지 타고 갈 택시를 예약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후런트 데스크의 젊은 여직원이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택시는 호텔에서 기차역까지만 타고 거기서 공항은 기차를 타고 가라고 권하더군요. 친절하게 기차시간도 프린트해주고요. 그러지 않아도 전날 공항에서 호텔에 올 때 너무 택시 요금이 많이 나왔던 생각이 들어 고마운 그 여직원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호텔에서 주선해준 택시 타고, 기차 타고 베른 공항부근 벨프역에서 내렸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기차역에 택시가 한대도 없고, 버스는 7시나 돼야 온다고 돼 있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항까지 거리가 족히 3 ~ 4 킬로미터는 되는데 짐 들고 걸어갈 수도 없지요. 벨프 공항이 원래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수도에 있는 공항인데 기차역에서 그 시간에 연결편이 전혀 없다니 참 당황스런 일이었습니다.
불 켜진 키오스크 (조그만 상점)에 들어가 택시 번호 하나를 알아내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택시 기사가 자기는 지금 이태리에서 휴가 중이라 스위스 벨프까지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올 수가 없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경황 중에도 대답이 하도 걸작이라 혼자 실실 웃었지요. 그 때, 키오스크에 차 한잔 마시려고 들어왔던 남자분이 저를 태워다 주겠다고 말하더군요. 요금은 얼마나 달라할지 모르지만 달라는 대로 줄 작정을 하고 너무 고마워 연신 “땡큐 땡큐” 굽실굽실하며 차를 타고 공항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절대로 돈을 안 받는다면서 여행 잘하고 사업성공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공항에서 저를 내려주자마자 휑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하고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 분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봐뒀던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짐을 부치고 체크인을 하면서 옆 줄에서 50세 쯤 돼 보이는 여자승객 몇 분과 체크인 카운터 여직원이 한참 옥신각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용인 즉, 그 필리핀 여자분들의 짐이 너무 많아 추가 운임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고 영국에서부터 그 많은 짐을 추가요금 안내고 모두 다 가지고 다녔는데 왜 여기에서만 유독 돈을 더 내라 하느냐 좀 봐달라 사정하는 얘기였습니다. 그 여자분들 뒤로는 승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불만스런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 머리 속에 퍼뜩 도와 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 좀 특별한 대우를 받는 데 체크인도 편한 카운터에서 하고 짐도 다른 사람들의 두 배인 40 킬로그램까지 부칠 수 있습니다. 제 짐이래야 이틀 일정의 짐이니 10킬로그램 정도이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그분들 추가되는 짐 무게쯤이야 아무 문제 없이 제 앞으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고질병이 또 도졌습니다.
첫째, 그 여자분들과 저는 모르는 사람이니 제 짐으로 체크인 한다는 것이 문제이고,
둘째, 그렇게 말하려면 제가 지금 체크인하던 편한 데스크에서 그쪽 데스크로 옮겨 체크인을 해야 하고,
셋째, 혹시 그 여자분들의 짐 속에, 그럴 리야 없지만, 곤란한 물건이라도 들어 있다면 법적으로는 저에게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넷째, “뭐 알아서 어떻게든 잘 해결하겠지, 그럴만한 사람들로 보이는 데 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섯째, 솔직히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면 좀 귀찮고,
여섯째, “에이그, 좀 적당히 가지고 다니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저만 체크인하고 보안 검사 받고 들어갔지요.
나중에 비행기 속에서 그 여자분들을 보니 웃고 떠들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돈을 추가로 더 안내고 사정사정으로 통과한 모양이었습니다.
오늘 일정을 다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서 식품점에 들러 반찬거리 사가지고 와서 저녁 해 먹었습니다. 1 주일 만에 처음 밥하고 국을 먹으니 배도 부르고 나른하고 느긋합니다. 식구는 아무도 없이 휑하지만 그래도 집이라고 들어오면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다가 아침 일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필리핀 여자분들을 그렇게 해서 제가 도와드린다면 그 것이 항공사의 규정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저는 모릅니다. 항공사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도 자신 없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도 자신 없습니다. 인정(人情)과 옳은 일이 항상 같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래도 말이래도 해볼걸 하는 생각이 자꾸 떠나지를 않네요. 잘 해결됐을 테니 괜찮지 생각하려 해도 뭔가 제 자신은 그게 아닌데 생각이 듭니다. 고질병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고질병입니다. 마음으로는 하고 싶은 데 뭐가 그리 잘났다고 체면 따지고, 이것 저것 생각해보고, 나에게 무슨 영향이 있을까 이리 저리 재고 달아보고, 그리고 안 해도 될 구실을 교묘하게 잘도 찾아냅니다. 그 구실을 선반 삼아 불편한 마음 턱 올려놓고 잘도 잠을 잡니다.
저는 오늘 아침 비행기를 못 탔을 것입니다. 제한이 많은 값싼 비행기표라서 그 비행기 놓치면 새로 비싸게 다른 비행기표 사서 뮨헨에 와야 했을 것입니다.
저를 만나려고 멀리서 뮨헨까지 6시간이나 걸려 찾아 온 그 손님은 그냥 돌아가야 했겠지요.
벨프 기차역에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 분이 도와주지 않아도 될 이유를 다섯 가지 여섯 가지씩이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