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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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안내 &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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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년부예배 14:00 청년회실
1부 예배 09:30 대예배실
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담백하게 말하라

김기석(2020-09-27)
듣기

담백하게 말하라
마5:33-37
(2020/09/27, 창조절 제4주)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득권이라는 덫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우울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나날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마음은 많이 착잡합니다. 북한은 비무장의 민간인, 표류 상태의 탈진자를 구하기는커녕 그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했고, 그의 시신은 찾을 길 없습니다. 반인륜적 폭거입니다. 코로나 방역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어떤 말로도 이 행태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안일하게 대응한 정부도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시편 시인의 탄식이 이명증처럼 들려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시120:6) 이 참혹한 사건이 불화와 갈등의 심연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을은 각 교단 총회의 계절입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장로교회의 총회가 많은 이들에게 깊은 탄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돌아보며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깊이 논의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사회에서 선출한 신학대 총장의 인준을 거부하고, 어느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를 바로잡으라는 요구는 묵살했습니다. 여성 안수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한 교단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들의 판단이 그릇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감리교회는 감독 선거를 앞두고 또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제도로서의 교회는 변할 줄 모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퇴행적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내부자들만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은 볼 생각도 볼 눈도 없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진리이지 교권주의자들의 기득권이 아닙니다.

∙경배가 아니라 따름
변통할 줄 모르면 무엇이든 쇠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변화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난 9월 18일 미국의 연방대법관이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는 남성 중심적인 미국 사법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미국의 평화 운동 잡지인 ‘Sojourners’의 스탭인 파올라 푸엔테스 그렉혼(Paola Fuentes Gleghorn)은 긴즈버그가 여성에 대한 수많은 장벽을 철폐한 사람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긴즈버그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서 몇 가지 예를 듭니다. 1970년 대 이전의 미국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된 크레딧 카드를 발급받거나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의 서명 없이 모기지론을 통해 집을 사는 것도 땅을 상속받는 것도 불가능했답니다. 임신한 여성들에 대한 해고가 불법화된 것도 그 이후의 일입니다. 파올라는 긴즈버그가 그 모든 일에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변화의 아주 소중한 동력이었다고 말합니다. 긴즈버그는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걸은 셈입니다. 이번 주간에 긴즈버그를 떠올리며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에피소드가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줍니다.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 원장이 우리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며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루스 베이더 긴즈버그·헬레나 헌트, <긴즈버그의 말>, 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2020, p.129)

긴즈버그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유명짜한 RBG’(notorious RBG)입니다. ‘노우토리어스’는 나쁜 의미에서 유명하다는 뜻입니다. 늘 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했기에 얻은 별명입니다. 그는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들도 불편한 사람이었고, 세례자 요한도 불편한 사람이었고, 예수님도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통해 16세기의 세비야에 재림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박해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등장이 사회 질서를 뒤흔든다고 여겨 추방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추방한다는 것, 이건 소설 속의 현실이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체제를 대변하는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을까요? 장벽을 허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함과 속됨, 죄인과 의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고 차별하던 것이 당시 유대교 주류의 태도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구획된 삶에 의해 소외되는 이들의 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만나 소통하고 벗이 되고 함께 하나님 나라의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정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현실은 좀 다릅니다.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경배와 따름이 모순은 아니지만, 경배에만 집중함으로 따름의 부담을 덜어내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핵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문자를 넘어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만났지만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과 깊은 일치를 이루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보지 않으면 평생 교회 다녀도 예수와 만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아낌 그리고 존중, 하나님의 꿈을 이루려는 열정이 우리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를 올려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평생 찌꺼기만 붙들고 살면서 알짬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자>의 ‘천도편‘에 수레바퀴 깎는 노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나라의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목수 윤편이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내려놓고는 환공을 올려다보며 물었습니다.

“감히 여쭙습니다. 상께서 읽고 계신 책은 어떤 말을 쓴 것입니까?”
“훌륭한 성인의 말씀이다.”
“훌륭한 성인이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상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날 분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바퀴 만드는 자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용서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가 하는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고정할 수 없고, 덜 깎으면 뻑뻑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것은 손의 감각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것을 제 자식 놈에게 깨우쳐줄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식놈도 저한테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 제 나이 칠십에 아직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날 분도 전해줄 수 없는 것과 함께 돌아가셨으니 상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날 분의 찌꺼기일 뿐입니다.”(<장자>, 조현숙 옮김, 책세상, p.297)

책만 읽는다고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지는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그 심정의 핵심을 붙잡는 것이 요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지를 일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요17:21)으로 표현하셨고, 바울 사도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a)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문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지만 안타깝게도 경험을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는 말의 한계를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은유를 사용합니다. 은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인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목자, 빛, 산성, 요새, 반석, 피난처, 도움, 방패, 구원의 뿔 등이 그것입니다.

∙말들의 제 집 찾기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온 것이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5:17).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 부족하여 완성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들 속에 깃든 알짬을 말로 혹은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신의 소명이라는 말입니다. 완성하다는 뜻의 ‘플레라오pleroo’는 ‘충만하게 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주님은 옛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충만하게 만드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도 같은 뜻일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옛 사람의 말에 담긴 속뜻을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을 모욕하거나 함부로 대함으로 그들에게서 살맛을 빼앗지 말라는 말로,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떤 사람도 자기 이익이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지 말라는 뜻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는 말씀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손해 보기를 감수하라는 말로 확장하여 설명해주셨습니다. 바록 그것이 언어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짓 맹세 하지 말라’는 말을 다룹니다. 율법은 맹세를 금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맹세한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맹세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자기 말이 진실임을 드러냄으로 의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입니다. 맹세는 늘 자기보다 큰 것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걸고 하는 법입니다. 목숨을 건다든지,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거짓말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옛날에는 꿀과 기름은 외할머니가 가져온 것도 믿지 말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참기름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순 진짜 100% 참기름’이라고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꾸밈이 많을수록 가짜가 많습니다.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이라는 뜻입니다. 신언불미信言不美 미언불신美言不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는 말입니다.

‘믿을 신信‘ 자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가 더해진 것입니다. 말이야말로 모든 인간 사회 신뢰 관계의 밑절미라는 뜻으로 새겨도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그 말이 타락했습니다. 말들이 제값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정의 사회’를 말하고, 부당한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 ‘공정’을 말하고, 밥 먹듯 거짓말을 뱉어내는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어를 다루는 기자의 말도 믿지 못하고, 학자들의 말도 믿지 못하고, 종교인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말의 타락입니다. 거친 말, 조롱과 냉소, 과장, 독기를 품은 말, 자극적인 말, 편을 가르는 말, 전투적인 말들이 횡행합니다. 사람들을 이어주어야 하는 말이 흉기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말이 독해졌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담백한 말이 몹시도 그리운 때입니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일찍이 제 집을 잃고 떠도는 말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갈라놓는지를 소설 쓰기를 통해 탐색했습니다. 말을 넘어선 말을 찾는 과정 중에 그는 판소리의 세계를 탐험했고, 나중에는 소리만 있고 언어는 없는 구음의 세계를 탐색했고, 급기야는 침묵의 세계에 천착했습니다. 독해진 말들은 또 다른 독한 말들을 낳습니다. 가끔 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말로써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

이 말씀은 가끔 오용되기도 합니다. 대립하는 사안을 놓고 너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다짜고짜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함정질문입니다. 네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지요. 주님도 이런 함정 질문 앞에 서실 때가 많았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그런 질문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입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을 제거한 채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하라는 것은 폭력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확고하게 입장을 표명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자기 말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자꾸 뭘 덧붙이지 말라는 말로 새기는 게 좋겠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이 달라져야 우리 사회가 정화될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것도 꼭 필요할 때만 말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조종하기 위해 말을 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말은 관계를 이어주는 말, 생명을 살리는 말이어야 합니다. 말이 인격입니다. 맹세가 우리의 빈약한 인격을 보완해주지는 않습니다. 무르익음의 계절 가을입니다. 무르익음은 안으로 거두어들임의 열매입니다. 이 혼돈의 세월 속에서 내면의 질서를 잃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말들을 삼갈 때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말을 담백하게 바꿔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살리는 말을 통해 주위에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껍질을 벗는다는 것

김기석





껍질을 벗는다는 것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이름을 높여 기립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코로나 블루니 코로나 레드니 하는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찾아오는 영혼의 질병인 우울증과 짜증과 분노가 심각합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교도 자꾸 미뤄지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참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10살, 8살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가 일어나 다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어떤 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습니다. 환각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이도 있고, 만취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성실한 가장을 치어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전에도 전혀 없었던 일들은 아니지만 요즘 이런 일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나 왁자지껄하고, 차 한 잔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참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쳤던 온갖 의문들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시간이 기억의 저편인양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요즘은 조석으로 바람이 시원합니다. 벌써 여러 날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선풍기를 닦아 창고에 들여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공원의 키 큰 나무 밑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이 쓸쓸해 보입니다. 짙은 초록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마치 햇살을 머금은 듯 조금씩 색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매들은 단맛이 스며들며 무르익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김장배추 모종을 심었다고 알려오네요. 때를 따르며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요즘은 두문불출하며 지내서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춤사위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우 한 분이 알밤을 보내주셨습니다. 작업실 앞에 있는 큰 밤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 유튜브를 통해 제 설교를 듣고 계셨던 모양인데, 문득 이 밤을 통해 문안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설익은 밤을 따서 이빨로 떫은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를 벗겨내고 우둑우둑 밤을 씹어먹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밤나무나 참나무의 상처난 부분을 나뭇가지로 쑤석거리며 턱이 강한 사슴벌레를 찾던 생각도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달콤한 수액을 탐하다가 어린 꼬마들에게 붙잡혀 동족간의 싸움에 내몰렸던 사슴벌레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껍질을 발기다가 찢어진 고무신 사이를 파고 든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던 기억도 아련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시간 개념에 대해 배웠습니다. 일상적 시간, 시계로 계측할 수 있는 양적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질적 시간, 수직으로 돌입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고 배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결정적 계시의 순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광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가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부활 이후 승천을 앞둔 주님께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때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한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1:6, 7) 사람들은 ‘때’의 문제를 자기들의 통제 속에 두고 싶어합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에 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뜬금없이 카이로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신학교 교수님들이 카이로스를 설명하기 위해 때가 되면 누가 흔들지 않아도 후드득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알밤의 이미지를 동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까 궁금해 하십니다. 감염병 학자들도 그 때를 가늠하기 어렵다니 비전문가인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를 알 수 없다하여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이르셨습니다. 눅진눅진한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밤에 대한 기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료한 겨울날이면 화롯불 속에 밤을 묻어두었다가 먹곤 했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터인지라 겨울밤이나 온 식구가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에 발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밤이 타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지요. 어떤 때는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밤이 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밤껍질에 칼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잘하다가도 한 번 그런 실수를 하고 나면 꼬마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외부 세계에 의해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껍질을 만들곤 합니다. 그 껍질이 두꺼울수록 자아 또한 강해집니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능력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아我‘ 자는 ‘손 수手‘ 자와 ‘창 戈‘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자아라는 말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과 만나고 나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입니다만 세상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랍스터’는 불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하더군요. 랍스터는 거듭 껍질을 벗으면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 ‘탈피탈각’을 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껍질을 벗는다는 것‘을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거듭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은 회개의 열매입니다만, 회개조차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결의와 다짐은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곤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죄의 버릇은 쉽게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된다’고 했습니다. 필연을 끊어낼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 시련과 무기력, 권태와 허무와 같은 삶의 부정적 계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기회로 삼기도 하십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언약에서 멀어진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역사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런 논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코로나19는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버린 세계와 한국교회의 실상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개신교회가 얼마나 시민사회의 상식에서 멀어졌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나날입니다. 역사가인 최종원 교수는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점에 있다”(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비아토르, 2019, p. 97)고 말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쓰라림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이 은총의 계기일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사회 현실과 유리된 신앙은 종이로 짓는 집처럼 허망합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거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소금’이나 ‘빛’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두렵지만 복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언해주신 현실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할 수 있다면 으늑한 공간에 모여 두런두런 담소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의 소식을 목말라 합니다. 이 좋은 가을날, 우울이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넓혀 이웃들을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껄껄 웃으며 주위를 환하게 물들이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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