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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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김기석(2020-11-29)
듣기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57:1-11
(2020/11/29, 대림절 제1주)

[참으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내가 부르짖습니다. 나를 위하여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께 내가 부르짖습니다. 하늘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시어,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꾸짖어 주십시오. (셀라) 오, 하나님,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어 주십시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을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그들은 내 목숨을 노리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쳐 놓아 내 기가 꺾였습니다. 그들이 내 앞에 함정을 파 놓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함정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셀라)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주님, 내가 만민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뭇 나라 가운데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너무 높아서 하늘에 이르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하늘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풀이 눕는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첫 주인 오늘 촛불 하나를 밝혔습니다. 우리 마음에 깃든 어둠, 우리 사회에 깃든 어둠이 조금쯤 물러가기를 소망합니다. 등불 하나를 밝히면 천 년의 어둠이 스러진다는 말을 믿고 싶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힘들고 난감한 세월이지만 우리가 빛의 노래를 그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설렘으로 기다리는 이들이 있고, 두려워 떨며 기다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서 삽니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목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 마음을 ‘무’로 만든 이들은 기다림이 부질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정한 사람인지라 좋은 날이 속히 다가오기를 기다립니다.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는 백신과 치료제가 속히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그 때 비로소 일상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인들이 백신과 치료제에 대해 이렇듯 깊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증거입니다.

지금은 가장 엄중한 시기이지만 이 고통의 시간을 잘 견뎌야 합니다. 시인 김수영은 ‘풀’이라는 시에서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눕는 풀을 노래합니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누워 바람을 피해야 하고, 힘들어 울기도 하지만, 바람이 잦아들면 툭툭 털고 일어나 허리를 세우면 됩니다. 우리가 이 중요한 기다림의 절기에 예배를 비대면으로 전환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이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앞에 엎드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더욱 경건하고 정성스럽기를 바랍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시편 57편을 편집한 사람은 이 노래를 ‘지휘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알다스헷’은 ‘파괴하지 말아라’라는 뜻입니다. 그 음조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절박하고 진실하게 부르라는 뜻임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시는 5절과 11절에 나오는 동일한 후렴구, 즉 주님의 영광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마치는 두 시가 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도움을 청하는 절박한 기도이고, 6절은 원수의 멸망에 대한 확신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믿음 안에서 승리한 사람의 찬양입니다. 시는 절박한 청원으로 시작됩니다.

“참으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께로 피합니다. 이 재난이 지나가기까지, 내가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1)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구절과 ‘피합니다’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부르짖습니다. 다른 가능성이 다 막힌 상태에서 터져나오는 외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의 번역어입니다. 엘로힘이라는 하나님 이름은 대개 인간의 현실을 무한히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2절에 나오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엘룐 엘로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난이 지나가기까지’라는 구절은 출애굽 전야를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온 땅을 휩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보호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날개가 그들을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 광경을 머리에 그리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일까요?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4)

비방하고 헐뜯는 이들로 인해 그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패거리를 지어 사냥감을 공격하는 사자들 같습니다.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맹목적인 증오일 때가 많습니다. 표적이 정해지면 사정없이 물어뜯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을 유독 미워합니다. 곧은 사람, 맑은 사람은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싫어합니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겨울 지나 봄 오듯이-세한歲寒·평안平安>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 유배 되었을 때, 통역관으로 일하느라 북경을 오가면서 귀한 책을 구해다주곤 하던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려준 그림입니다. ‘세한도‘라는 화제畫題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後凋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랏님에게 죄를 짓고 유배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한결같이 외면하는 세태 가운데 이상적은 위험을 무릅쓰고, 세간의 소문에 아랑곳없이 스승의 처지를 살뜰하게 챙겼습니다. 추사는 고마운 마음을 그 조촐한 그림 속에 담아 변함없는 제자의 마음을 기렸습니다. 이상적은 그 그림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내로라하는 문인들에게 보이고 감상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가운데 반증위潘曾瑋의 글귀가 마음을 울립니다.

“김군(金君)은 해외의 영재 일찍이 훌륭한 명성을 들었네.
명성은 결국 손상을 입고 문득 세태의 그물에 걸리었네.
도도한 세태의 흐름 속에서 누가 선비의 청빈을 알겠는가.“

그의 글 일부이지만 추사에 대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는 글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이들은 늘 세태의 그물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세태 가운데서 자기 지조를 지키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시인도 같은 처지였던 것 같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아무리 당당한 사람이라 하여도 사방을 포위하듯 죄어오는 세태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인은 증오심에 사로잡힌 이들의 ‘창끝과도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날카로운 칼과도 같은 혀’로부터 자기를 지켜줄 방패를 하나님께 청합니다. 그것은 맞서 싸울 날카로운 무기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실을 보내시어,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3a). ‘사랑‘(hesed)은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입니다. 결혼 서약문 가운데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죽음이 그대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라고 대답하면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에 충실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주춧돌입니다. ‘진실‘(‘emeth)은 확고함, 신실함, 안정감, 지속성 등의 뜻을 내포합니다. 시인은 자칫 하면 똑같은 증오의 늪에 빠져들 수 있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든든함에 붙들어매려 합니다.

시인이 이처럼 자기 영혼을 사로잡았던 두려움과 절망감, 분노와 어둠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돌연 그의 속에 빛이 스며들었습니다. 결국 함정을 파는 자들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들게 마련이라는 자각이 찾아온 것입니다. 악인들은 결국 아침 햇살에 스러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에 불과함을 깨닫자 그의 내면에 든든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7-8)

그는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살았듯이 그는 죽으나 사나 주님만 의지하고 살기로 작정합니다. 바울 사도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1). 포구에 들어와 닻을 내린 배처럼 시인의 마음은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무기력하게 부르짖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영혼을 깨웁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여전히 어둠이 그를 괴롭히지만 그는 더 이상 어둠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라 새벽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의 사람입니다. 새벽은 어둠과 밝음 사이 시간입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은총이 도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30:5)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사58:8)

믿음의 사람은 막연히 좋은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등불 하나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세상이 혼탁하면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정화해야 합니다. 혐오의 말들이 오가는 세상이지만 따뜻한 말, 살리는 말, 북돋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사랑’과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Leonard Cohen이 부른 ‘Anthem‘에 나오는 가사가 떠오릅니다. “상처가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상처를 통해 빛이 스며든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That‘s how the light gets in). 상처를 빛의 계기로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햇살 같은 사람
시인이 처한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달라졌습니다. 두려움과 우울은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르짖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고, 어둠에 매몰된 사람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주님, 내가 만민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뭇 나라 가운데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너무 높아서 하늘에 이르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9-10)

시인의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둡고 암혹했던 시절, 세상의 무게가 온통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신경림 선생님의 시에 기대 만든 노래를 부르며 그 무거움을 털어내곤 했습니다.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네가 있는 곳 찬란하게 빛나고/네가 가는 길 환하게 밝았다.“ 이 노래에서 ‘햇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는 ‘너‘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믿음의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더욱 가까워져야 합니다. 누군가 ‘어이’ 하고 발신음을 내면 저곳에서 ‘어이’ 하고 응답하면 됩니다. 내가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저편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차가워지는 날씨 가운데 더욱 마음이 스산해지는 이들이 홀로가 아님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마음을 쓰면 좋겠습니다. 짙은 어둠의 세월이지만 새벽을 깨우는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오시려는 주님께 기꺼이 몸과 마음을 드리십시오.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는 순간 마치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가 빛나는 떨기나무로 변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끄시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삶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김기석

삶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19가 대유행 조짐을 보이면서 당국은 방역단계를 상향 조정했다. 불길한 안개가 스멀스멀 우리 삶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전파력은 강하지만 치명율은 높지 않다는 판단에 ‘그까짓 것’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감과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이라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에 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적이라면 경계태세라도 갖추어 대비할 수 있지만, 은폐 엄폐할 장소조차 허락되지 않기에 불안감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을 그리워한다. 북적거리던 시장거리를 걷고, 마음 내키면 가판대에 걸터앉아 거리 음식도 먹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흥청거리던 여행지의 풍경도 아슴푸레하게 떠오르고, 가까운 벗들과 어울려 실떡거리던 시간도 마치 꿈속의 기억인 듯 아득하기만 하다. 교회의 형편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뜨거운 찬양도, 기도도, 친교도 여의찮다. 병자들이 있어도 찾아가 위로할 수 없다. 낯모르는 이가 다가오면 경계부터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응대를 하더라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마음에 고황이 든 듯 먹먹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공허하고 쇠잔한 무력감이 우리를 사로잡을 태세다.



함민복 시인의 ‘나를 위로하며’라는 시를 읽었다. “삐뚤삐뚤/날면서도/꽃송이 찾아 앉는/나비를 보아라”. 짤막한 네 행을 한 호흡으로 노래한 시인은 잠시 호흡을 고르듯 한 행을 띈 후 마지막 구절을 내놓는다. “마음아“. 덧거친 세상에 지친 탓이었을까? 시인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나부끼는 마음을 다독이며 어떤 경우에도 지향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뜻밖의 장애물도 만나고,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도 하고, 권태라는 섬에 갇히기도 한다. 지체할 수도 있고, 에돌아 갈 수도 있지만 기어코 가야 할 곳을 지향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 멈추어 서야 하고, 더 큰 시간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살펴야 한다.



엘살바도르의 순교자인 로메로는 ‘초월이란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월이란 스스로 사물에 갇히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를 얽어매려는 일체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어려운 시대이기에 그의 통찰이 더욱 빛난다. 믿음이란 하늘에 길을 여쭙는 과정이 아니던가. 우리가 그 발자취를 다 알아차릴 수는 없다 해도 바다에도 길을 내시는 분을 신뢰할 때 삶이 쉬워진다. 나는 패배해도 그분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신뢰할 때 자유의 공간이 열린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신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우뚝 선 지배자로 등극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까지도 부둥켜안으셨다는 말이다. 그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예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일체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시어 서로 소통하도록 하셨다. 예수와 만난 이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 넓음과 높음, 깊음과 맑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경축하는 주일과 대림절이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올리움과 낮아짐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림절을 맞이한다. 카페에서는 이미 캐롤이 심심찮게 들려오지만 내 귀에는 다른 노래가 쟁쟁하게 들려온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이 음울한 시절, 예수는 우리 몸을 빌어 생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 곁에 다가서기를 원하신다. 그 멋진 초대에 응답할 때 모호한 삶은 오히려 중심에 이르는 길이 된다.



(2020/11/25일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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