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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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장영숙전도사



구원의 성벽

김기석(2019/06/23)
듣기

구원의 성벽
사60:17-22
(2019/06/23, 성령강림 후 제2주)

[내가 놋쇠 대신 금을 가져 오며, 철 대신 은을 가져 오며, 나무 대신 놋쇠를 가져 오며, 돌 대신 철을 가져 오겠다. "내가 평화를 너의 감독자로 세우며, 의를 너의 지배자로 세우겠다." 다시는 너의 땅에서 폭행 소문이 들려 오지 않을 것이며, 너의 국경 안에서는 황폐와 파괴 소문이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너의 성문을 '찬송'이라고 부를 것이다. 해는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오직 주님께서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 주님께서 몸소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며, 네가 곡하는 날도 끝이 날 것이므로,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으며, 다시는 너의 달이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백성이 모두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님의 작품이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지체없이 이루겠다."]

∙평화에게 기회를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레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9주년이 됩니다. 올해 저는 정말 우연히도 국립묘지 몇 군데를 방문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난 4월에 버지니아 리치몬드에서 집회를 마친 후 워싱톤 D.C에 올라갔는데, 저를 안내해 주신 분이 맨 처음 저를 이끈 곳은 알링톤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ry)였습니다. 20세기의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가 산화한 군인들이 묻힌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 포토맥 강가, 링컨기념관 근처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기념공원도 둘러봤습니다. 19명의 장병들 조형물이 대열을 이루어 서 있었는데 장진호 전투 후 철수하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거기 바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나라와 그 국민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답한 이 나라의 아들 딸들을 기립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이런 희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부산에서 열린 목회자 아카데미 강의를 하러 갔다가 유엔 평화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이들 가운데 많은 전사자의 유해가 그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참전한 나라와 군인들의 이름이 음각된 부조물을 죽 둘러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합니다. 그곳에 묻힌 이들은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과 딸, 남편이나 아내, 형과 누나였습니다. 평범한 행복을 구했을 그들이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역 땅에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국방의 의무 때문이든 자의로 참여한 것이든 우리는 그들의 헌신에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인 박봉우 선생이 1956년에 발표한 시 ‘휴전선’이 떠오릅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여전히 이 땅에서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해빙 무드에 돌입했던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우리는 또 다른 긴장 속에 있지만, 평화는 절대로 포기되어서는 안 될 가치입니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비틀즈의 노래 ‘평화에게 기회를 give peace a chance’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마5: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 그것은 마지못해 선택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치열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평화라는 감독자, 의라는 지배자
이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비전을 재확인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혹한 심판을 당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가거나 곳곳에 흩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시련은 주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 때문임을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낱낱이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사59:13-15)

조금의 유보도 변명도 없는 철저한 참회입니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귀히 보십니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60:2).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회복된 예루살렘 혹은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건축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내가 평화를 너의 감독자로 세우며, 의를 너의 지배자로 세우겠다”(사60:17).

모든 일을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를 중심 원리로 삼을 때 나라는 든든히 섭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나에게 있어 평화는 사랑이라는 무기로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를 포함해 모든 영역을 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하느님께 드리는 성령의 투쟁”(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평화주의자 예수>, 이진권 옮김, 샨티, 2006, p.202)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는 ‘사랑이라는 무기’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것은 또한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지배자가 되어야 할 ‘의’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처럼 아주 객관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관련됩니다. 균형을 이루는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사랑 안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 헤셸의 말이 그 핵심을 찌릅니다. “정의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행사된다 하더라도 비인간화될 때 죽고 만다. 정의는 그것 자체만이 신격화될 때 죽는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2004년, p.323).

평화가 감독자가 되고, 의가 지배자가 되는 곳에서는 더 이상 “폭행 소문이 들려 오지 않을 것이며“, “황폐와 파괴 소문이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나라의 성벽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그 성문은 ‘찬송’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를 꿈꿉니다. 어처구니없는 꿈인가요? 약육강식의 투쟁이 벌어지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그것은 낭만적인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빛이 된 사람들
물론 우리 현실은 좀 답답합니다.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청년들은 미래의 비전을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인들의 빈곤 문제도 심각합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왔던 모든 가치들이 ‘이익’이라는 단일한 가치로 환원되는 세상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신의, 겸손, 나눔, 희생, 우정 등의 아름다운 말들이 약자들의 자기 연민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역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현실의 논리를 들어 지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스 워커는 힘 있는 자들이 고문과 폭력으로 평화의 싹을 자르는 세상이지만 “또 다른 숲을 시작”하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 다른 숲을 시작하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고 인간의 존엄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앤서니 도어의 장편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벌어진 사건들을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프레데리크라는 소년은 나치의 군사학교에 강제로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우 예민한 소년입니다. 추위가 혹독한 어느 겨울 날 소년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연병장 한편에는 노동수용소를 탈출하다 잡혀온 사람이 말뚝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령관은 그를 ‘더러운 놈’, ‘운터멘슈’라고 부릅니다. 인간 이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소년들에게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그에게 끼얹으라고 명령합니다. 겁에 질린 소년들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수 십 명이 물을 뿌리면서 그의 몸은 고드름처럼 변해 축 늘어졌습니다. 프레데리크 차례가 되자 그는 자기에게 건네진 물을 바닥에 쏟아버렸습니다. 같은 일이 세 번씩 반복되었습니다. 사령관이 “뿌려“ 하고 명령하자 그는 “싫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2>, 최세희 옮김, 민음사, 2018, p.23-27). 고통받는 이에게 차마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프레데리크는 다양한 형태의 린치를 당하고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행동 속에 깃든 빛을 보고 있습니다. 소설 제목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바로 이런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레데리크는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도 의젓하게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켰습니다. 프레데리크는 어쩌면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는 소환장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 속에 있는 빛의 뿌리가 하나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해는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오직 주님께서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사60:19)

우리 속에 이 빛이 있습니까? 세상의 어떤 어둠도 지울 수 없는 빛, 그 영원한 빛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민족적 암흑기에 활동했던 다니엘은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단12:3)이라고 말했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나는 별아저씨/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표현은 암울하고 암담한 시기를 견디기 위한 시인의 몸부림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별처럼 빛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작품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빛을 받아 그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이들을 새롭게 명명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님의 작품이다”(사60:21b)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이 심으신 나무입니다. 씨앗은 떨어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척박한 땅에 떨어져 때를 기다리기도 하고, 바위 위에 떨어져도 조그마한 흙만 있으면 싹을 틔웁니다. 나와 남을 자꾸 비교하면서 비애에 빠질 것 없습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우면 됩니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한 현실은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일상의 삶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작품’이라는 말이 참 무겁게 들립니다. 이 표현은 에베소서에도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각자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작품답게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선한 일’(아가싸스 에르간, agathos ergon)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선한 일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유쾌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사방에서 조롱받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임명한 적이 없는 데도 대표선수를 자칭하는 이들이 기독교가 아닌 것을 자꾸 기독교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혐오와 배제와 증오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와 무관합니다.

이제 또 다른 숲을 시작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악한 일로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빛을 보는 동시에 그 빛을 드러내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을 때 구원의 성벽, 찬송의 성문이 굳게 세워질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붙들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평화와 의가 우리 삶의 토대가 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아멘.

새컬럼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김기석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퇴락한 예배당 수리하는 일에 마음을 보태달라는 청을 듣고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다녀왔다. 하천변에 있는 예배당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몇 년 전 교인이 한 명 밖에 없던 이 교회에 부임하자 마을 사람들은 ‘언제 떠날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당신들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목사 부부는 속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 마을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반기거나 말거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자 지싯지싯 다가오는 그들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지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해발 1,300미터 되는 곳에서 거의 30년 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며 사는 할아버지는 그들이 인사를 드리자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할아버지를 꾸준히 찾아갔고, 마침내 그분의 절통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목사 내외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그 할아버지를 마을에 방을 얻어 모셨다. 사람들을 꺼리던 분인지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서툴렀고 집 주인과 다툼이 잦았다. 그래서 지금 목사 부부는 그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콘테이너형 주택을 마련하는 중이다.



지금 그 교회는 주일이면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고,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도 바친다. 그 교회에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어느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목사 부부의 진심을 알아차린 지역 주민들은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자’고 떼 아닌 떼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 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더딜망정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자기 정화 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는 작동되지 않고 있다.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는 종교적 특권 뒤에 숨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높이 쌓아올린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차별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셨지만, 그들은 장벽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신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믿는 이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묻곤 했다. 원론적인 대답은 희망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일렁이는 절망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에서, 해체되고 있는 농촌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 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애쓰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교회라는 나무의 실뿌리가 아니겠는가? 희망은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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