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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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장영숙전도사



물 위를 걷다

김기석(2019/08/18)
듣기

물 위를 걷다
막6:45-52
(2019/08/18, 성령강림 후 제10주)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그들과 헤어지신 뒤에,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애쓰는 것을 보셨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가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쳤다. 그를 보고, 모두 놀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

∙머물고 싶은 마음을 떨쳐버리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제는 여름 휴가철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볕은 따갑지만 며칠 전부터 바람결은 사뭇 달라졌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이렇게 어김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무르익어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조금씩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이후에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번역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마가는 ‘그리고’(kai)라는 접속사를 통해 이 두 이야기가 연결된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벳새다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재촉하여‘라는 단어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본문 어디를 봐도 그렇게 황급하게 기적의 현장을 떠나야 할 이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촉하여‘라고 번역된 단어인 ‘아낙카조anagkazo‘는 ‘억지로 ~ 하게 하다’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더 머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마치 가족처럼 음식을 나눠먹으며 일치를 경험했던 그 순간의 감동을 누구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을 겁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빛으로 변화되신 주님과 위대한 인물들을 보고는 거기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고 말했던 그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의 파송을 받아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말씀을 가르쳤고, 귀신을 내쫓았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막6:6, 13).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까지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고양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열광과 기쁨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찬사를 듣는 일에 익숙해지는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아셨기 때문일까요?

저는 젊은 시절 안병무 선생의 글을 통해 ‘功成而弗居’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공을 이룬 후에는 거기 집착하거나 머물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거기 머물지 않음으로 무위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못할 때 삶이 추해집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벧새다는 갈릴리 호수 동북쪽에 있던 ‘어부들의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은 안드레와 빌립 그리고 베드로의 고향이었습니다(요1:44).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헬라식 이름을 가진 이들이 안드레와 빌립입니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일찍부터 헬라화된 도시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라신과 더불어 벳새다를 저주하셨습니다(마11:21).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그리로 보내신 것은 바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신 후에 주님은 사람들을 헤쳐 보내셨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적대적인 바람이 불 때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일상이었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마가는 그 사실을 명토박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제자들과의 분리의 시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어 파견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겁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만난 많은 이들 가운데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분이 계십니다. 몇 해 전 우리 곁을 떠나신 정선희 권사님입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떠난 천사였습니다. 바짝 마른 몸으로 교회의 궂은일은 늘 앞장서서 감당하던 분이었습니다. 중국 길림성에서 나고 자란 권사님은 한글을 배우고 싶은 열망이 컸기에 옆집 사람이 가지고 있는 책 한 권을 빌려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 책이 바로 한글 성경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지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그는 감동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 감동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길림성에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으로 인해 많은 재중 동포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권시님으로부터 ‘뒷기도‘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전도나 봉사를 위해 교인 중의 누군가가 이웃 마을에 갈 때면 사람들이 함께 모여 ‘뒷기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성가 가사 가운데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뒤에서 나를 지키고 밀어준다는 사실을 믿을 때 삶은 든든해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위해 뒷기도를 바치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홀로 뭍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슬러 부는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노를 젓느라 몹시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평이합니다. 그러나 ‘거슬러서’는 헬라어 에난티오스enantios를 번역한 것인데, 그 단어는 ‘적대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적대적인 바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마가는 1세기 중엽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가 겪고 있던 현실을 드러내려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박해와 로마 제국의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 선교를 둘러싼 이견으로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각했습니다. 거슬러 불던 바람은 그런 제반 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이른 새벽에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그런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가시다가 그들 곁을 그냥 지나쳐 가시려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유령을 본 것처럼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고 혼란에 빠진 겁니다. 도종환 시인은 ‘흐느끼는 예수’라는 시에서 우리에게 아주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
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치는
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해고노동자의
절망의 무게를 두 팔로 받아 안으려다
손에 피를 묻힌 채 흐느끼는 예수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믿었을까“

오히려 불온하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던 분이 낯설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일상의 평온을 깨뜨릴 때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이적을 행하던 제자들도 두려움에 떱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어떤 때는 죽음을 무릅쓸 것처럼 당당하지만, 다음 순간 사소한 일에도 두려워 떱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 맞서 그렇게 가열차게 싸웠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광야로 달아나던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해 고양되었던 제자들의 영혼은 심연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다’라는 단어는 ‘나는 나다’는 뜻인 ‘에고 에이미ego eimi’를 축약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구절은 신적 존재의 자기 확인이 들어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주님,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가 주조한 동전 한 면에는 로마의 평화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마차를 타고 물결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다의 신 넵튠과 같은 모습입니다. 주변 나라의 소요를 잠재운 그를 로마인들은 신적 존재로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로마는 일찍이 이미지 혹은 상징의 조작을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바다 위를 질주하는 이미지는 욥기와 예언서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는 맥락에서도 등장합니다. 욥은 바다 괴물처럼 사람들을 삼키는 괴물 같은 이들을 짓밟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해에게 명령하시어 뜨지 못하게도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어 빛을 내지 못하게도 하신다.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고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괴물의 등을 짓밟으신다“(욥9:7-8). 하박국도 “주님께서는 말을 타고 바다를 밟으시고 큰 물결을 휘저으십니다“(합3:15)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주님께서 거센 물결 위를 걸으셨다고 말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로마가 아니라, 가엾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고치시고 벗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세상을 넘어서는 신앙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센 물살
제자들 곁을 지나쳐가려 하시던 주님이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놀랐다’(existemi)는 단어는 매우 강력합니다. 왜 이렇게 놀랐을까요? 마가는 그 까닭을 “그들은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예수에 집착할 뿐, 우리 삶의 평안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을 요구하고, 우리를 꾸짖는 예수는 한사코 외면하려 합니다.

삶이 힘겹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사실 우리를 거스르는 바람과 물살이 거셉니다. 다들 별일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염려와 근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질병, 실패, 가난, 관계의 어려움, 감당해야 할 생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개인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아픔 또한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혼돈에 빠지곤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는 나다’ 하신 분을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의 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 그리고 돌봄이라는 지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혼돈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는(居其所) 북극성이 뱃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도 북극성과 같은 존재가 필요합니다. 태산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면 우리는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는 말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소비의 광풍이 몰아치는 세상, 경쟁과 배타주의의 풍랑이 이는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우리 삶에 모셔야 합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두려움이 없다 했던 시편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다

김기석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다



하나님, 허위단심으로 하나님의 산을 찾아가던 엘리야의 마음이 떠오릅니다.

이 여름, 주님의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왕상19:12)을 듣고 싶습니다.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늠해봅니다.

주님, 우리들이 평화의 바람, 생명의 바람이 되어 

분단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바야흐로 바캉스 시즌이다. 바캉스는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캉스란 그러니까 분주한 일상을 잠시 떠나 비일상적인 공간과 정서 속에 머물며 자기를 비우는 행위와 연관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과 자기의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많은 일들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방감을 준다. 일상과의 거리두기, 자기 비움은 또 다른 생기를 모셔 들이기 위한 능동적 행위이기도 하다. 자기 비움의 계기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엘리야의 경우가 그러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야훼 사이에서 흔들리던 백성들에게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입증해보였다. 그리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 가에서 도륙했다. 그 소식을 아합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엘리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급히 일어나 유다의 브엘세바로 도망친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의 처신에 적용된 단어들은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등이다..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다.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간이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오히려 무력감이나 공허감에 빠지기도 한다.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로뎀나무 아래 앉은 그는 무력감 속에서 하나님께 말한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왕상19:4)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온다. 잠은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그의 마음에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때 한 천사가 그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난 엘리야는 자기 머리맡에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빠졌다. 그가 잠든 동안 주님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셨던 것일까?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하고 이른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보냈다. 종교학에서 ‘동굴’은 재생 속은 거듭남의 장소 혹은 참된 인식의 현관이라는 말이다. 일상과 구별된 그 자리, 그 가물가물한 관문에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물으신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도 아니고 ‘함’도 아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엘리야는 가슴에 울혈처럼 맺혀있던 말을 쏟아낸다.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던 자기 삶,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백성들에 대한 고발, 지붕 위의 참새처럼 외로운 자기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하나님의 질문과 엘리야의 대답은 이처럼 어긋나고 있다. 이 어긋남이 해소되기까지는 또 다른 절차가 필요하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이 명령은 출애굽 여정 가운데 벌어진 한 사건을 상기시킨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을 이끌 신이라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염증을 느낀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어달라고 청하는 한편, 그 일에 가담한 이들을 엄중하게 처벌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백성과의 동행을 거절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동행의 약속을 받아낸다. 모세는 그 증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한다. 하나님은 그를 바위 위에 서 있으라고 하신 후에 그의 곁을 지나가셨다. 동행의 약속이 그렇게 가시화된 것이다.



엘리야는 새로운 모세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선다.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났으나 그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났지만 주님은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격정의 소용돌이가 다 지나간 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열정과 환멸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그의 영혼을 고요히 가라앉혔다. 엘리야는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동굴 어귀에 섰다. 그리고 새로운 소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갈 용기를 회복한다. 삼복(三伏) 더위 한복판을 지나면서 우리는 무엇을 비워내야 할까?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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