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Chungpa Imgs

금주의 설교 목사님 컬럼 새글

교회안내

집회 안내 & 찾아오시는 길.

예배시간안내

유아부예배 10:50 유아부실
유치부예배 10:50 유치부실
유초등부예배 10:50 교육관
중고등부예배 10:50 중고등부실
1청년부모임 13:30 지하다목적실
2청년부예배 14:00 청년회실
1부 예배 09:30 대예배실
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

김기석(2021-04-18)
듣기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
전 7:1-10
(2021/04/19, 부활 후 제3주)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이 또한 헛되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

∙초상집 vs. 잔칫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맘때가 되면 더욱 아픈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겨운 것이지만 예기치 않은 시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유족들의 피울음은 잦아들 줄 모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받는 세상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 꿈 이야기를 계속하고, 조롱당하면서도 그런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이야기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삶은 복잡하고 모호합니다. 삶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답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삶의 상황 또한 저마다 다릅니다. 그렇다 해도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지향조차 없이 떠도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그 길 위에서 벗어날 때도 있고, 실족할 때도 있지만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기어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생명’과 ‘평화’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언제나 주목해야 할 이정표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교 잠언 형식으로 삶의 복잡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7:1). ‘명예‘와 ‘향유’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말놀이입니다. 명예는 쉐임shem이고, 값비싼 향유는 쉐멘shemen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소유를 늘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태어남은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의식하며 삽니다. 한정된 시간을 살아야 하기에 우리는 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 후에 맞이하는 죽음은 허망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7:2) 이것은 앞 구절의 부연설명입니다. 4절 역시 그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상집은 ‘애곡하는 집‘이고 잔칫집은 ‘먹고 마시는 집‘입니다. 애곡하는 자리에 설 때 우리는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유한함과 슬픔이라는 거울 앞에 설 때 사람은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지 않던가요? 고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의 장례식 풍습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을 장례식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슬픔을 표출하는 장소였습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니’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장례가 나면 여인들은 망자를 기억하며 비명을 지르고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만가를 통해 죽은 이의 삶을 떠올리고, 심지어는 그가 사용하던 도구까지 일일이 언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며칠 동안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넵니다. 그 공동체적 애도의 시간을 통해 가족들이 죽은 이와의 작별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입니다.(패트릭 리 퍼머, <그리스의 끝 마니>, 강경이 옮김, 봄날의 책, p.106-117)

∙슬픔의 연대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7:3) 우리 문화는 슬픔은 멀리하고 웃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지혜자는 정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웃음이 삶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라면 슬픔은 우리 삶의 지층을 살피도록 하는 감정입니다. 물론 웃음도 전염력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슬픔은 낯선 사람들조차 하나로 묶어 줍니다.

<톰 소여의 모험>(1876)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으로 널리 알려진 마크 트웨인이 남긴 자서전 메모 중에는 ‘어머니의 몇 마디’라는 단락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집에는 동부에서 팔려온 샌디라는 이름의 흑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온종일 큰 소리로 노래하고 소릴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하는 통에 마크 트웨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엄마에게 호소했습니다. “엄마, 쟤가 너무 시끄러워요.“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한 채 대답했습니다. “샌디는 엄마랑 헤어지고 친구들과 떨어져 이리로 팔려온 아이다. 저렇게라도 노래하지 않으면 엄마 생각, 동무 생각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니? 나는 샌디가 노래할 땐 오히려 안심이 된다. 걔가 시무룩해하면 나는 그때가 더 걱정이다.“ 마크 트웨인은 그 날 이후 샌디의 노래가 더 이상 시끄럽게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말씀이 가슴에 박혀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도정일, <만인의 인문학>, 사무사책방, p.135-6) 누군가의 슬픔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의 지평 또한 넓어집니다.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번역은 이 대목을 “얼굴에는 시름이 생겨도 마음은 바로잡힌다”고 번역해놓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고후7:10a)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여 늘 근심의 빛을 띠고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된 이들의 표정은 진중하면서도 깨끗하고 맑아야 합니다.

∙어리석음, 그 치명적 전락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 이 또한 헛되다.“(7:5-6) 세상에 책망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제 경험상 책망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발전 가능성이 큽니다. 신뢰 그룹을 형성할 때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지적을 당한 사람이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불쾌해 하며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적질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신뢰가 쌓인 후에 바로잡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게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일 겁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머리말 끝에서 ‘많은 질정을 바랍니다’라는 구절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질정叱正이란 ‘꾸짖어 바로잡아줌‘이라는 뜻입니다. 짐짓 하는 말이 아니라면 그는 겸허하게 자기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책망이 유익한 것은 이런 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아를 부풀게 만드는 헛된 말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찬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괜한 찬사를 들을 때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손사래를 칠 것까지는 없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일러야 합니다. ‘너, 알지? 네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그래야 거짓 자아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탐욕’이라 번역된 ‘오쉐크’는 과도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누군가를 협박하여 빼앗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힘 없는 사람을 위협하고 갈취하는 행위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사물에 어둡고 사고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광기에 가깝습니다. 일종의 항진 상태, 과잉상태입니다. 자기를 억제하거나 통제하지 못하기에 폭력적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에 포박된 사람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뇌물은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만듭니다. 이건 노자 역시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는 사냥을 하느라 뛰어다니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덕행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도덕경’ 12장).

동물을 잡는 것만 사냥이겠습니까? 돈을 따라 몰려다니는 것 역시 사냥일 겁니다. 투기꾼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결국 그런 삶은 우리를 미치게 만듭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 잊어버리고, 곁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이익이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이 될 때 세상은 더욱 사나워질 겁니다. 이웃들의 아픔에 눈을 감고, 기후 위기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돌이킬 줄 모릅니다.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어리석은 마음이고 병든 마음입니다. 마음에 병이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공감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줄어들 때 우리는 병든 존재가 됩니다. 병든 마음은 하나님을 모실 생각도, 능력도 없는 마음이고,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여백조차 없는 마음입니다. 영혼의 전락이고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물러섬입니다.

∙급한 마음을 다독이라
8절입니다.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의욕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람은 행복해 합니다.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어야 할 때 사람들은 다 우울해 합니다. 잘 끝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음이고, 시작해야 할 때 망설이는 것도 어리석음입니다. 그 때를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끝내야 할 때는 미련이 남더라도 과감하게 끝을 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눅14:28).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게 될 것입니다.

지혜자는 자만한 마음보다는 참는 마음이 낫다고 말합니다. 자만한 마음은 조급한 마음입니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입니다. 참는 마음은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향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두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드거니’와 ‘지며리’입니다. ‘이드거니’는 ‘한동안 뜨음하여 분량이 좀 많게‘라는 뜻이고, ‘지며리’는 ‘차분하고 꾸준히’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는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내리는 일종의 처방전입니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9) 조그마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이들을 많아졌습니다. 선불 맞은 노루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문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조건만 충족되면 언제든 살아나는 불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동물들을 향해, 심지어는 무생물을 향해서도 분노를 드러내며 삽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이러합니다. 앞차의 출발이 조금만 늦어도 경적을 울려대며 화를 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기와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악플을 달고 비방하고 저주를 퍼붓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분노도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십니다. 분노를 통해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는 대개 위험합니다.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일수록 분노에 휩쓸려 자기 분수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는 게 참 어렵습니다. 현실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요소가 없지는 않지만 뒤를 돌아보며 살 수 없는 게 인생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옛 사람들에게서 지혜를 빌려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과제와 맞서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을 둘 때 그곳에서 뜻밖에도 예수님과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삶이 어지러울 때면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우리가 선 자리를 톺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가야 할 곳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머무는 곳임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이 우리의 길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김기석

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고난 앞에서 모른 체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286에 인용된 엘리 비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사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걷는 효창공원에 흰철쭉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질서 있게 자리바꿈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산수유꽃이 다 떨어지고 복사꽃이 시들해져서 서운했는데, 새로운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새 소리도 제법 활기찹니다. 농가월령가는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며 분분히 나는 범나비의 자유로움을 바라보면서 “미물微物도 득시得時하여 자락自樂함이 사랑홉다”고 노래합니다. 생명은 크거나 작거나 무엇이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뿐입니다. 분주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작은 생명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우주의 장엄한 춤을 추고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모든 다른 존재들에 의해 지지된다. 역으로 각 존재는 공동체 내의 모든 다른 존재들의 복리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형성하는 데에 바로 정의正義가 있다.”(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p.91)



지지받는 동시에 기여하는 것, 그 창조적 공생 관계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마치 고치 속을 파고들 듯 칩거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이제는 가정을 제외한 어떤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지요? 그만큼 지금 상황이 엄중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봄은 우리를 밖으로 자꾸 불러내려 하지만, 가급적 다중이 모인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한 뜻을 잘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도처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옵니다. 칼과 창날이 부딪는 소리 못지않게 우리 심정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거친 언사들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보는 풍경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그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는 지나치게 선명한 입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흑과 백으로 가르기에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은 칼로 두부모 가르듯 산뜻하게 가를 수 없습니다. 참, 선, 빛을 지향하지만 내 속에 있는 거짓, 악, 어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다 보면 유머가 사라집니다.

삼척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과 함께 쓴 책과 더불어, 올해 맡은 6학년 학생들이 쓴 문집을 한 권 보내주셨습니다. 늘 심각한 책을 보다가 아이들의 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낄낄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진하고 거침없는 아이들의 표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전혜원 어린이의 동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동생 놈’입니다. 제목을 잡는 솜씨부터 남다르지요? 

1연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와서 날 때린다.

같이 게임하다가 지면

지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한다.

그냥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게임은 승패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면 승복하면 좋으련만 동생은 패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합니다. 누나가 굳이 자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동생에게 좀 져주면 어때.’ 동생의 마음속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분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니 누나 탓이라며 누나를 때리는 겁니다. 그 귀여운 구타는 누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누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시의 2연입니다.



동생이란 존재는 참 수학책 같다.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다.

자주 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

동생도 포기해야겠다.



이 어린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동생’과 ‘수학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시적 언어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까닭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킴으로 우리 정서에 틈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누나가 동생을 보고 ‘수학책’ 같다고 말한 것은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이야 왜 없겠습니까? 다만 수학에 취미가 없다 보니 수학은 그야말로 해답 없는 영역이 된 것이지요. 이 어린 시인은 자기가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난데, 뭘 어쩌겠느냐’는 듯 천연덕스럽습니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동생도 포기해야겠다.”라는 구절에서 저는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시를 읽는 이들은 ‘동생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 심각한 관계단절의 선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동생인 걸요.



우리 어른들의 어법 속에도 이런 여유와 여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줬기에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상한 체 하는 사람들snobbish people’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입니다. 거만하다, 속물적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어 선택을 유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영국적 고상함인가요? 사람들이 그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은 그 속에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태도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똑같은 언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어를 가려 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각자의 세계관과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언어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상대의 언어가 거칠어지면 나의 언어도 따라 거칠어집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언어를 주고받다보면 마음 또한 멀어집니다. 교만과 자애심에서 나온 말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단정적인 언사는 대화의 의지를 차단합니다.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피루스는 기원전 3세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있던 에피루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더의 후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할 욕망을 품고 있던 그는 로마와의 전투에 코끼리 부대를 끌고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가까운 친구와 용맹스러운 장군들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피루스의 승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승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사는 게 꼭 이 모양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거두는 승리는 사실은 이중의 패배입니다.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29-32)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말’이라 해도 적절한 때를 분간하며 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늘 살펴야 합니다.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벌써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라고 다짐했던 우리 마음도 어지간히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아픔을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한 아픔을 외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한다 해도,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한을 품고 살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기를 빕니다. 주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이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그리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4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다른컬럼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