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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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말씀은 가까운 곳에 있다

김기석(2020-08-09)
듣기

말씀은 가까운 곳에 있다
신30:11-14
(2020/08/09, 성령강림 후 제10주)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위태로운 삶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칠 줄 모르는 폭우가 우리 삶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산사태와 홍수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불철주야 긴장 속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과 관계자들에게도 주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주시기를 빕니다. 물가에 살아도 산 밑에 살아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 큰 재산상의 손실을 입은 이들이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빕니다. 재해를 당한 이들을 곁부축하려는 이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섬기려 합니다.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 항구의 한 창고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레바논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기를 빕니다. 여러 해 전에 레바논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 레바논은 칼릴 지브란의 나라로 기억되는 나라였고, 시로페니키아 문명과 만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차를 타고 레바논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마음 가득 아픔이 밀려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90년에 종료된 레바논 내전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로 벌어진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무슬림 정파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노변에 있는 건물에 새겨진 총알 자국, 포탄 자국, 망가진 탱크와 장갑차의 잔해가 제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땅의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 폭발사고로 레바논은 또 다시 큰 위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아울러 국제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형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자각합니다. 4차 산업혁명이니 A.I니, 5G니 떠들고 있지만 우리 삶은 마치 활화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것처럼 위태롭기만 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의 나팔은 이미 울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매스컴이 기후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하는 표제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기후 변화, 기후 위기, 기후 재앙, 기후 붕괴...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린다 하면서도 도무지 자기 삶을 성찰하지 못한 채, 욕망의 벌판을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을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마24:38-39)

지금은 위기의 시간입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알프스의 대빙하도 붕괴 직전이고,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산불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고, 수 천 만 명이 사는 멕시코시티는 지하수 고갈로 인해 땅 꺼짐 현상이 빈발합니다. 이런 위기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그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요? 돌이킬 수 없다는 비관론이 점점 사람들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실까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시지만 인간은 혼돈을 빚어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던 세상이 너무 많이 망가졌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신음이 아니라 통곡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무한 발전에 대한 기대나 낙관론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삶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우리 상식이나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당혹감에 사로잡힙니다. 그 당혹감을 파고들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노예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기의 판단을 맡기고, 맹목적인 추종자가 됩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집착합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광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겁니다. 종교적 열광, 종말의 날짜에 대한 집착, 배타적 태도 등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광신의 무리에 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상상하는 사람,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웨슬리 설교전집3>, 대한기독교서회, p.25)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권면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통할 리 없고, 설득당할 가능성 또한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이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추종자들로부터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지는 것일까요?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창의적인 사랑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이름을 불러 당신의 일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은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이미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긴 설교 가운데 일부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꼭 명심해야 할 것을 일일이 일러주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 후에 모세는 말합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신30:11)

그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뜻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이들을 보면서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요한의 대답은 아주 간명합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준 것 보다 더 받지 말라’ 했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잇속을 차리지 말라고 했습니다(눅3:10-14). 나눔, 배려, 존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마음 바꾸기’라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 “새롭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회개란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 무시당하는 이들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께 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일상 속에서 시작되고 일상 속에서 마무리 됩니다.

전면적으로 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작해야 합니다. 섬김, 나눔, 돌봄, 존중의 삶으로 개종해야 합니다. 요즘 ‘싹쓰리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중들이 좋아하는 스타인 유재석, 이효리, 비가 만든 그룹 이름이라지요? 대중들은 환호하지만 저는 그 팀 이름이 영 마땅치 않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싹 쓸어 담다/없애다‘는 뜻의 ‘싹쓸이‘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싹쓰리’라는 팀명 속에서 이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을 본다고 말하면 너무 과한 반응일까요?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라
앞에서 기후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후 붕괴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과 아울러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창조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창세기는 실낙원 이후의 세상을 인류의 악행이 늘어난 시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려놓은 인간을 보며 하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6:5-6)

자기 작품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 아픔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돌이켜야 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린 것도 인간이지만, 그 자유 의지로 망가진 세상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인간입니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탄의 능력입니다. 풀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설 수 있는 사람, 바람과 햇빛과 노을과 구름, 달과 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욕망의 종살이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유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은 영원히 목마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에 잇대어 사는 이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진실됨은?
우리 속에 그런 여백이 있어야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만드는 삶을 부끄러워하고, 기후 위기가 가난한 이들을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이 뭇 동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즐겁게 불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절멸을 향해 가는 인류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해도, 그 몰락의 과정에 연료를 공급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모두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이 된 것처럼 불편하고 소박한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일을 멈추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본 외국의 만평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물에 잠겨 손만 내민 채 구해달라고 하는 젊은이를 보며 기성세대는 ‘대단해’라고 말하며 하이화이브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10대들의 환경운동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태도를 풍자한 것일 겁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모든 선택은 우리 후손들을 염두에 둔 선택이어야 합니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생명과 평화의 씨앗을 심을 뿐입니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 그것을 거둘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신비를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삶이 영생임을 일깨워줍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진실됨은 이웃들과의 삶을 통해 입증되는 법입니다. 교회 바깥에서의 삶이 우리가 참된 예배자인지를 드러냅니다. 비록 서 있는 삶의 자리는 달라도 우리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깊이 결속시키는 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입니다. 이 꿈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 일상에 하나님의 마음을 끌어들이며 사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려 하십니다. 그 꿈을 실천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우리가 먼저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시작하면 그 노래는 온 세상을 울리는 합창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 붙잡고 기쁨을 전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아멘.

새컬럼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김기석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해마다 여름이면 열리는 독서캠프가 있다. 부산, 김해, 포항, 마산, 창원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주축이지만, 캠프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참여자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꽤 여러 해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터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부름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름하여 ‘이야기 손님’이다. 새로 발간한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부탁받지만 그 캠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더 이상 손님으로 처신하기 어렵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소란 속에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대개 잘 아는 사이지만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른다. 자기 삶의 지향이나 태도를 담은 닉네임으로 불릴 때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새삼스럽게 재확인하곤 한다. 하루 한 편 이상 시를 외워야 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함께 부르고, 모두를 하나로 불러주신 분께 기도를 올린다.



순서와 순서 사이에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곳에 세워진 커피 트럭에 몰려들어 커피를 나누고, 달빛이 교교히 비치면 뭔가에 이끌리듯 춤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짐벙진 춤판이 벌어진다. 우아한 춤사위에 매료된 탓일 것이다. 어느덧 강고한 자아는 스러지고 하나됨의 기쁨이 사람들 사이를 가득 채운다. 적대감이 가득한 세상에 사느라 지쳤던 이들이기에 그 따뜻한 환대의 공간에 머물며 치유를 경험하는 것 같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제주도에서 열릴 예정이던 독서캠프가 취소되었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사정이 그러니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려고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할 수 있는 작은 북토크 모임이 한번 열렸다. 꽤 많은 분들이 참여했고, 뒤늦게 참여를 신청한 분들은 부득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참여자 가운데 한 분은 다양한 종류의 허브 오일을 만들어와 지인들과 나누었고, 자기 밭에서 수확한 마늘종으로 만든 장아찌를 가져와 벗들에게 건넨 분도 있었다. 물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섬김이었다. 대체 이분들은 어떤 그리움 때문에 이렇게 모이는 것일까?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역사의 부정성이 소멸된 장소에 대한 꿈은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의 꿈이었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는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고립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화한다. 구별짓기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고립과 고독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 영혼의 회복력을 빼앗아간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공간으로서의 장소이든 사람들이 맺는 관계이든 상관없다. 미셸 푸코는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그곳은 어떤 권력 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이다. 위에서 아래로 계열화된 질서가 아니라, 마치 잔뿌리들이 한데 어울린 평등한 생태계이다. 사람들을 가르던 온갖 장벽이 무너지고, 낯선 이들이 우애를 나누며 일체를 경험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연결되어 생명과 평화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 말이다.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천국을 시작해야 한다. 신앙이란 고립을 넘어 연대하려는 용기 아니던가.

(국민일보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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