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
김재흥(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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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크게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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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과 두 개의 얼굴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전쟁의 땅 중동과 우크라이나와 그 전쟁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나라 위에 주님께서 평화와 안정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대 이란 전쟁이 한 달 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오랜 전쟁으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이란뿐 아니라 레바논과 사우디 등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미국은 한 달 사이에 70조원 정도의 전쟁비용을 사용했습니다. 70조원이면 약 4,000만 명의 난민들의 1년치 식비를 지원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리고 이란이 많은 유조선이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하면서 국제유가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이번 사태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을 합친 수준의 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한 석유시장분석가는 “현재는 비상상황이고 이 상황이 장기화되면 경기침체가 아니라 대공황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업계 관련자는 “오늘 당장 종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여파는 수개월간 지속될 것이다.”라고도 말했습니다. 필리핀은 이미 지난 주중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석유 가격이 오르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지금 전쟁을 겪고 있는 중동의 사람들과 2년간의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한 가자지구의 사람들과 4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를 보았습니다. 2년간의 전쟁으로 가자지구에서는 7만 명이 사망하고 모든 생활기반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난민들이 하루에 한 끼의 식량을 얻기 위해 급식소 앞에서 8시간 줄을 섭니다. 젖은 눈으로 식량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이의 얼굴은 지금 가자의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4년간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의 군인 14만 명이 사망하였고 우크라이나 가구 중 250만 채가 파괴되었습니다. 전기공급이 끊긴 곳이 많아 많은 이가 이번 겨울을 난로 하나로 보냈다고 합니다. 꺼져가는 난로에 장작을 넣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은 지금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쟁 피해자들의 얼굴과 이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의 얼굴이 대조적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이들은 혈색이 좋은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전쟁을 지속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기들의 전쟁 결정으로 몇 만 명, 몇 천 명 죽은 게 뭐 대수냐는 듯한 얼굴. 전 세계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얼굴. 자기의 결정으로 인한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깃털처럼 가벼이 여기는 얼굴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2. 예루살렘은 평화의 토대?
제자들과 더불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 전에 예루살렘 부근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려내신 나사로와 그의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에서 무척 가까운 동네였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많은 이가 예수님과 예수님이 살려내신 나사로를 보기 위해 베다니 나사로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경이로운 존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무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예수님과 나사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제사장 무리는 예수와 나사로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여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을 모독하였으며 병 고치는 능력을 앞세워 백성을 미혹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에 맞서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요11:50) 그러나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난 것은 로마를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 제사장 무리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 무리는 자신의 생존과 민족의 생존을 일치시켰고,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를 제거하는 일이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를 제거하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릇된 지도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러 성문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제발 구원하소서’라는 말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나면서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호산나’는 그 예수님께 사람들이 능히 외칠 만한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보시고는 그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그것은 스가랴서 9:9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안 그래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을 보면서 ‘저가 메시아다’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스가랴서 9:9도 중요하지만 그다음 구절인 9:10도 중요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심으로 제사장 무리의 말처럼 당신이 백성을 선동해 로마와 전쟁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까지 당신을 메시아로 여기게 된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 그것이 예수님의 목회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씨앗의 원리요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원리입니다. 모든 씨앗은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를 저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인 제사장 무리는 백성들에게 제물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예수가 자기들의 이익추구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그를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멸망했습니다. 로마군이 강력한 무력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무너졌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예루살렘 스스로가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원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생명의 원리를 저버렸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토대라는 뜻입니다. ‘예루’가 토대, ‘살렘’이 평화입니다. 평화의 토대는 바로 그때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너를 죽여도 좋다고 여길 때. 반대로 평화의 토대는 바로 그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려 할 때.
3. 오늘도 평화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
작년 10월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의 극악한 통제로 인해 가자지구 내에 식료품과 의약품과 생활용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죽는 아이들, 약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이에 30개국에서 모인 150여 명의 평화활동가들이 58척의 배에 구호물품을 싣고 가자지구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 활동가들 중에는 우리 청파교회와 오랜 인연이 있는 ‘개척자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초’라는 이십대 후반의 활동가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해초는 가자지구에 도착하기 전 다른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공해상에서 이스라엘 군에게 붙잡혀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틀만에 풀려났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그 위험한 곳에 갈 생각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해초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땅 중에 하나가 가자였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배를 타는 일이니까 가서 가자 사람들을 만나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가자지구의 해방을 외치고 있고 끝까지 함께 외칠 것이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단지 식료품과 의약품을 전해주는 것만이 구호가 아니라 사방이 막혀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는 것도 구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는데 내가 죽고 평화가 온다면 그게 나의 길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평화의 토대는 인간에 의해서 자꾸만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2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과 나라와 민족과 평화와 안정을 명목으로 그러나 사실은 자기의 욕심과 이득을 위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있습니다. 2천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바뀐 것 없이, 그때와 너무나 똑같이, 마치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은 그 옛날과 바뀐 것이 없지만, 우리 주님 또한 바뀐 것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 통해 계속해서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요 모범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십 번의 고난주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우리가 계속 제사장 무리의 길을 간다면, 나를 위해 너를 기꺼이 희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뒤를 따라갑시다.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위해 너와 공동체를 희생시키려는 생각을 버리고, 너와 공동체를 위해 나의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며 살아갑시다. 이곳저곳에서 그렇게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는 이들이 늘어갈 때 이 세상은 평화의 토대, 진정한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