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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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담임목사 김재흥

  • [약력]
  • 감리교신학대학교 졸업
  •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 2003년 1월 청파교회 부담임목사 취임
  • 2024년 4월 청파교회 담임목사 취임
  • [저서]
  • <평등과 영원의 복음, 로마서>
  • <산티아고 다이어리>

   김 목사는 청파교회에 부임한 이래 낮은 목소리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드러난 자리에 서기보다는 늘 낮은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었습니다.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 힘썼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또렷한 메시지를 담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함께 이루어가야 할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분열의 담이 허물어진 세상, 낯선 이들과도 사랑으로 소통하는 세상이 아닐까요? 김 목사는 바로 그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참 고마운 인연입니다. 듬쑥한 그의 사람됨을 알기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청파교회 원로목사 김기석

원로목사

김기석 목사

부교역자

이재훈 목사

선교부/예배부
hoon@chungpa.or.kr

김형욱 목사

관리부/재무부/청년부
wook@chungpa.or.kr

이성언 목사

교육부/문화부/평화부
un@chungpa.or.kr

이어진겨레 전도사

사회봉사부/환경부/청소년부
eojin@chungpa.or.kr


안녕

이성언(2025-05-25)
듣기

안녕
요 5:1-9
(2025/05/25, 부활절 제6주, 웨슬리회심기념주일)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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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모든 생명을 향해 안부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평화의 숨결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의 삶이 안녕하셨습니까? 저마다 바삐 매일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주일이 되었지요. 우리나라의 봄이 짧아지다 못해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해왔는데, 올해는 아직도 봄의 온기가 손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분주한 삶에서도 가끔은, 아직 우리에게 허락된 늦봄의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지내보시기를 바랍니다.

* 생물다양성
지난 5월 22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아십니까? 국제 생물다양성의 날이었습니다. 1993년에 UN에서 생물다양성의 보전과 그에 얽힌 여러 문제를 알리기 위해 제정한 날입니다.
지구에는 정말 많은 생물이 있습니다. 식물은 빼고 동물만 셌을 때, 780만 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중에 인간에게 알려진 종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780만 종이나 된다고 하니 굉장히 많은 것 같죠? 그런데 세계자연기금(WWF)에서 발표한 2024 지구생명보고서는 전 세계 야생동물의 규모가 불과 50년 만에 73%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게 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서식지가 손실되거나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농업, 벌목, 상업적 개발, 에너지 생산, 광업 등. 자원을 과도하게 이용해서 생물다양성이 감소하기도 합니다.
밀렵 때문에 멸종 위기의 동물이 생기기도 하고, 어업 활동 중 목표하지 않은 종의 혼획 때문에도 생물종이 희생된다고 합니다. 농업에서 발생하는 총 식량 생산량 중 30~40%는 아예 섭취되지 않고 버려집니다. 이 식량을 생산하고 버리는 데에서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4.4%가 발생됩니다.(WWF-UK) 또 여기서 환경 오염이 발생하게 되지요. 이뿐만이 아니지만 이런 악순환들이 반복되면서 생물다양성이 감소 되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촘촘하게 쌓여있는 탑과 비슷합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젠가’라는 게임을 한 번씩 해보셨을 겁니다. 직육면체로 된 나무 블록으로 쌓은 탑에서 블록을 하나씩 빼는데, 탑을 무너뜨린 사람이 지는 그런 게임입니다. 우리가 사는 생태계를 이 ‘젠가’ 게임에 비유해 본다면, 나무 블록이 촘촘하게 쌓여있었다가 이제는 시작의 30%도 안 되는 블록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젠가’ 게임을 이 정도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은 보드게임의 고수가 아니고선 별로 없습니다. 그 전에 진작 탑이 무너집니다.

생물다양성이 줄어들면,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풍경을 봅니다. 울창한 열대우림에서 한 종의 나무가 다른 식물을 밀어내고 햇빛을 독차지하면, 그 숲은 잘 정돈된 느낌을 줄지 모릅니다. 바다의 산호초도 특정 산호가 다른 생물을 몰아내고 단일한 군집을 이루면, 언뜻 더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사라진 숲은 병충해에 무너지고, 산호초는 하얗게 죽어가며 침묵의 바다로 변합니다.
강자의 승리는 역설적이게도, 모두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생태계의 균형과 건강은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 자연의 공생과 인간의 단일성
자연은 홀로 서려 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보다는 ‘공생’하려 합니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코뿔소는 소쩍새와 공생합니다. 소쩍새는 코뿔소 등에서 기생충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코뿔소는 그 덕에 건강을 유지합니다. 또 우리에게 ‘니모’로 알려진 크라운피쉬는 말미잘과 더불어 삽니다. 크라운피쉬는 천적의 공격을 받으면 말미잘의 독촉수 사이로 들어가서 보호받고, 말미잘은 크라운피쉬가 가져오는 먹이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연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살리며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며 사는 듯합니다. 사람들은 통일된 것에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봄이 되면 끝없이 이어진 벚꽃 터널에 환호하고, 잡초가 무성하게 난 들판보다는, 정갈하게 심긴 벼가 바람에 파도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합니다. 유난히 인간 생태계에서는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왕정과 봉건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백성들이 각기 다른 생각과 삶의 방식을 가지면, 통치자들이 통제하기 어렵고 권력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획일화하고, 통일된 사고를 강요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가치를 따르며, 같은 목표를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왕정과는 다른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교육, 직업, 문화에서 단일성을 강요하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명문대 입학, 대기업 취업, 획일된 성공의 궤적을 따라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 결과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다른” 존재로 치부되고, 비주류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사회에서 외면당합니다. 이런 단일성은 우리 사회의 생명력을 빼앗습니다. 다양성이 사라진 자연에서 숲이 병들 듯, 획일화된 세상에서 인간 사회도 점점 메말라갑니다.

* 다양성의 상실
인간 생태계에서 다양성이 사라질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을 존엄한 인간으로 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 나와 자원을 다투는 적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안부를 묻지 않습니다. “저 사람의 안위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고통, 그의 기쁨, 그의 생존은 나의 생존과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즉, ‘저 사람이 살아야 내가 산다’는 생명의 신비를 업신여기며 사는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큰 오산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태계는 인간의 이기적인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기에 정갈한 것, 내 기준에서 좋은 것, 지금 잘 나가는 것들로만 추려놓은 세상이 완벽한 곳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만은 “우생학”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좋은” 유전자만 남기겠다는 인간의 주제넘은 생각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사건도 일어났고, 백인우월주의에 따른 인종차별, 그리고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에게는 열등한 유전자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러한 일을 몇몇 단체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고, 국가 단위에서 법을 제정하면서까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반인륜적인 일이 꽤 먼 옛날 일이라 느껴지지만, 불과 50년도 지나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멸절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안부를 물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므로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소외의 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주변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
오늘 읽은 말씀에도 오랜 기간 주변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38년 동안이나 뇌졸중을 앓던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제대로 걷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오랜 시간 머무르고 있던 베데스다에는 전설 같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천사가 나타나 연못을 물을 휘저을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희망을 베데스다에 걸고 연못 근처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베데스다는 치유의 명소로 알려졌지만, 문자 그대로의 치유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사회에서 떠밀려 난 이들의 집단, 마치 게토처럼 소외된 자들이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치유의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는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그들에게 서로의 안녕을 잊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의 치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애쓰며, 옆 사람의 고통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낫고자 하는 갈망을 품고 있었지만, 전설 속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좌절과 외로움만 깊어갔던 것입니다.

그런 이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명절에 다른 유대인들처럼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곧장 성전 안뜰로 찾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인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 북쪽 ‘양의 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즉 성전 입구가 아닌 외곽 지역에 위치한 연못입니다. “외곽 지역”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다시피 성전에서 밀려난 자들, 즉 병자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소외자들이 머물던 공간입니다. 모든 제사는 정결한 상태에서 드려야 하므로, 병자, 소외된 자, 부정하게 여겨지는 이들이 있는 곳은 피하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데스다는 일반 순례자들이 들릴 이유가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일반적인 경로가 아닌, 베데스다 연못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갑니다. 그는 깊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물에 넣어주지 않아서 오랜 시간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개탄을 합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을 물에 넣어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마저 외면당한, 주변인 중의 주변인이었습니다. 그의 존재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그가 살아 있는지조차 관심 없는 세상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물에 넣어주기를 기다렸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 존재를 일으키는 ‘안녕’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 말씀하십니다. “낫고 싶으냐?”
이 질문은 병만 고쳐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던 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건네진 인사, “너, 안녕하니?”라는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나에게 보인다고, 당신의 안녕이 내게 중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 긴 시간의 끝에서, 예수님은 안부를 물음으로 그의 존재 전체를 다시 불러내셨습니다.

사실 베데스다의 모든 병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삶의 벼랑 끝으로 몰려, 누구도 그들의 안녕을 묻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오랜 시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갔습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고, 다가오는 손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한 개인을 회복시킨 일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지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쓸모없다”, “더럽다” 여기는 이들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세리와 죄인, 병든 자,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안녕을 살피셨습니다. 그들의 안녕을 묻는 일,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든 생명을 품는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건강한 사람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곳입니다. 병자와 약자, 외로운 자와 가난한 자, 사회적 소수자들이 존재 그대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다양성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 병자가 병에서 나은 날을 요한복음은 굳이 ‘안식일’이라고 기록합니다. 자기를 얽매던 병에서 자유의 몸이 된 날, 존재가 회복된 날.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찾아온 ‘참 평화’, 안식의 시작이었습니다.

* 안녕을 묻는 삶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지요. 안녕은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을 씁니다. 얼마나 포근한 인사말입니까.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서 가장 먼저 건네는 말이 상대의 평안을 묻는 말이라니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말을 너무 익숙하게 내뱉어버려서, 그 말의 무게를 잊고 살아갑니다. 말로는 안녕을 묻지만, 진심으로 타인의 평안을 바랐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진심으로 타자의 안녕을 묻는 일. 그것이 예수님 같은 마음입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안녕을 건네오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가 내 문제를 하나도 해결해 주지 않았음에도, 순간 나는 꽤 괜찮은 상태가 됩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고단한 삶 가운데 “괜찮으세요?”, “안녕하세요?”라고 물어주는 그 한마디에, 우리는 어쩌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내가 편하냐? 보다, 당신이 평안하냐고 묻는 사람.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문은 바로 그 마음에서 열립니다. 저 사람의 안녕이 궁금할 수 있는 감각, 그 감각이 살아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우리 청파교회가 그런 지향을 하고 있던 것 아닙니까?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에게 안녕을 묻는 삶을 시작합시다. 단지 인사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의 평안을 궁금해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의 안녕이 곧 나의 생명과 닿아 있습니다. 이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생명의 얽힘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야 합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생명들을 다시 부르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 봄이 지나가기 전, 누군가의 안녕을 먼저 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심 어린 안부를 묻는 중에, 우리 자신의 삶도 조금씩 치유되어 가기를 빕니다. 서로의 안녕을 물으며, 다양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