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Chungpa Imgs

금주의 설교 목사님 컬럼 새글
예배실황 facebook 02-713-5254

교회안내

집회 안내 & 찾아오시는 길.

예배시간안내

유아부 10:50 유아부실
유치부 10:50 유치부실
유초등부 10:50 교육관
중고등부 10:50 중고등부실
청년회 13:30 청년회실
1부 예배 09:30 대예배실
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성서학당 13:3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장영숙전도사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김기석(2019-07-21)
듣기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시53:1-6
(2019/07/21, 성령강림 후 제6주)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뼈를 흩으셨기에,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리치셨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그늘이 없는 사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소서에서 대서를 향해 가고 있으니 이제 본격적인 여름입니다. 며칠 전, 건널목에 서 있는 이들이 옹기종기 나무 그늘 밑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늘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지자체들이 마련한 ‘무더위 쉼터‘라는 구조물이 곳곳에 있지만 나무 그늘만하겠습니까? 중동지역의 광야를 지나다 보면 드문드문 서 있는 싯딤나무(Shittim)에 눈길이 가기 마련입니다. 숲을 이루지 못하는 그 나무는 외로워 보이지만 광야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정표도 되고, 쉴 수 있는 품도 되어줍니다. 잎이 듬성듬성하기에 별로 시원할 것 같지 않지만 뜻밖에도 그 그늘 밑에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좌절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의 품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늘이 있는 사람‘,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품이 넓은 그 그늘 아래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낮잠을 자고 나면 울울했던 심사가 가든해집니다.

일본의 한국 무시 발언이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한 분노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이민자 출신의 정적들에게 미국이 싫으면 당신들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고 한 말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부추긴다고 비판합니다. ‘국익‘이라는 명분 앞에서 보편적 인간애라는 더 소중한 가치가 천더기로 취급받는 세상은 그늘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가련한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로 내쫓깁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판치는 세상
히브리의 한 시인은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라고 탄식합니다. ‘어리석다’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 ‘나발‘은 어리석다는 뜻 외에도 ‘불경건하다‘, ‘버림받다‘, ‘사악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 이해가 결핍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은 ‘만일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이 없다면 도덕이나 정의의 근거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이라 해서 다 제멋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금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성의 심연을 보고 어지러움을 느낀 사람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혼돈과 악마성을 누구보다 깊이 보았기에 그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두렵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 때문에 당혹스러워 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기뻐합니다. 예수님도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과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이들의 삶을 시인은 아주 간명하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53:1b) ‘썩었다‘는 말은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는 과정을 인상깊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롬1:21)

하나님 경외심에서 멀어짐, 감사하지 않음, 생각이 허망해짐, 마음이 어두워짐. 그 결과는 욕망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욕정대로 사는 것이 곧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이들은 선한 일에 무능합니다. 썩은 마음에서 깨끗한 삶이 나올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탄식
바빌로니아 신화는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신의 노예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적 기쁨에 동참하도록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잘 돌보고 가꾸면서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소명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셨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력이 있는 사람’, ‘신중한 사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그 지혜로움의 뿌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너희 모두는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53:3)

모두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다. 무서운 선고입니다. ‘빗나가다’라는 뜻의 단어 쑤우그(cuwg)는 ‘돌아서다’(go back)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 ‘퇴보‘하는 것입니다. 빗나간 까닭은 ‘다른 북소리’, 즉 욕망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내 마음 다 팔았고나’라는 시에서 우리 마음이 어떻게 빗나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사탕에 맘 팔고,/그 옷에 맘 팔고,/고운 듯 꾀는 눈에/뜨거운 맘 다 팔고/피리 소리 좋은 듯해/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속았구나,/속 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달콤한 것에 마음이 팔려 그만 님께 바쳐야 할 마음을 다 팔아먹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썩음이고, 썩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3절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없구나’라는 단어입니다. 1절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그런데 3절에서 하나님은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탄식하십니다. 이 엇갈림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서다
시인은 묻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53:4) 그들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모르는 것일까요?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가 선 자리를 의식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데서 발현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래서 인간을 가리켜 현존재 Dasein이라 했습니다. ‘da‘는 ‘여기에’라는 뜻이고 ‘Sein’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서 요청받은 것에 응답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욕심에 이끌려 짐짓 모른 체 하며 살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밥 먹듯이 먹어치웁니다. 약자를 짓밟고, 멸시하고, 착취합니다.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유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하신 것일까요?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만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악한 이들에게 맞는 보응을 내리십니다. 그 두려운 날을 시인은 인상깊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뼈를 흩으셨기에,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리치셨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53:5)

뼈를 흩으셨다는 구절이 참 두렵게 다가옵니다. 이 말은 존재의 터전이 허물어졌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들이 든든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돈, 명예, 권세, 인기는 거품과 같아서 언젠가는 꺼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그만입니다. 무의미, 공허, 상실감,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뼈를 흩으신다는 말이 이런 뜻이 아닐까요?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는 “인간은 배신을 당하면 소질로만 갖고 있던 우울을 습관화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 믿었던 것들이 내게 등을 돌릴 때 우리는 뼈가 흩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살던 이들, 기고만장하여 앞뒤를 잴 줄 모르던 이들이 수치를 당할 날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엡2:10)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이신칭의‘의 교리,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의 주술에 붙들린 채 지냈습니다. 이 말은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교리는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지 행위를 부정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선한 일,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예수님도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5: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윤똑똑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처신하면서도 자기 삶이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나님은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일에 동참할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뙤약볕 아래를 걷고 있는 이들을 품어 안아줄 그늘과 같은 사람,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 주는 사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그 사랑의 도구로 써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한계 초월자들

김기석

한계 초월자들



이십 대를 막 통과하고 있는 젊은이와 정말 우연히 마주 앉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젊은이들이 묻기 전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는 터였다. 무슨 일을 해도 헤덤비는 일이 없지만, 댕돌처럼 단단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처신하던 그가 비스듬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다가 무심한 듯 툭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젊은 날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견딤’이라는 단어 속에 그가 앙버티고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서 소환된 나의 젊은 날은 방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치열한 인식욕과 시대의 어둠에 맞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난 늘 흔들렸다. 흔연하게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었던 회색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현실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틈 혹은 불일치가 버거웠다.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허무감이었다. 모두가 확신의 언어로 말하는 곳에서 허무감에 사로잡힌 채 허둥거린다는 게 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허무감은 집요했고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사람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변명 삼아 그 시절을 견뎠다.



삼십 대 중반의 어느 날 문득 허무감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한 번도 싸워 이겨보지 못한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내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방황의 시간이 그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방황하던 젊은 날은 아련한 꿈처럼 저 먼 곳에 있고, 더 깊은 인식을 위한 모험에 나서지 못하는 굼뜬 존재가 여기에 있다. 타락이다. 한때 하구에 밀려온 썩은 생선을 두고 경쟁하는 삶에 등을 돌린 채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일에 몰두하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꿈꾸기도 했다. 외롭고 쓸쓸한 길, 몸과 마음이 여윌 수밖에 없는 그 길에서 언제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산에 오르는 산악인들이나 극지를 찾아나서는 이들에게 ‘왜 위험한 일을 자초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행위는 무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유용성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에게 무용한 일에 몰두하는 이들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책무는 자기를 초월하는 데 있다지 않던가? 유용성에만 매달리면 영혼은 납작해지게 마련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세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넓게 만든 사람은 고향의 지리학자처럼 느긋한 인식가가 아니라, 미지의 대서양을 거쳐 새로운 인도를 건너간 무법자들이며, 현대인의 영혼의 심층을 인식한 사람들은 심리학자나 학자들이 아니라, 시인들 중 무절제한 자들, 즉 한계 초월자들이다.”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전령들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삭막할까.



성경은 경계선을 가로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인종, 피부색, 종교, 빈부귀천을 가르고 차별과 배제를 통해 자기 계급의 이익을 공교히 하려는 이들은 경계선 만들기에 몰두한다. 경계선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름으로 경계선 저 너머의 세상을 적으로 돌려세운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상을 떠돌았다. 그렇게 함으로 복의 매개자가 되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내면화했다. 예수는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분리의 장벽을 허무셨다. 폭력에 기반한 로마의 평화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이룩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몸으로 입증했다. 한계 초월자들은 기득권자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안일한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땅의 인력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는 사람이다. 전우익 선생은 참 삶이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 말했다. 버릴 것을 버릴 때 삶이 가벼워진다.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하게 붙잡을 때 삶이 부유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철 들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순례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 아닐까? 순례를 그치는 순간 영혼은 낡아지기 시작한다.

다른컬럼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