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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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김기석(2020-05-31)
듣기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사44:1-5
(2020/05/31, 성령강림주일)

["그러나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너는 들어라." 너를 지으신 분 네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를 도와주마' 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 그들은 마치 시냇물 가의 버들처럼, 풀처럼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는 주님의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숨을 쉴 수 없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이들은 그 운명의 날, 뭔가 압도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누가는 그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다 사용합니다.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그들이 머물던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처럼 혓바닥 같은 것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해진 그들은 각각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숨 혹은 생기가 그들을 가득 채우자 두려움이 스러졌습니다. 자기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어느새 증언의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박차고 나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고, 금기시되고 있던 ‘그 이름’을 증언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으로 대중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해 말한 후 마치 못을 박듯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2:36). 성령의 뜨거운 역사 속에서 던져진 그 강력한 메시지는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뒤흔들어 회개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표상을 사용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 ‘불길’, ‘생명 빛’, ‘바람’, ‘생수’, ‘기름’ 등이 그것입니다. 모두 은유적 표현입니다만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결되게 하고, 메마름을 해소시켜주고, 차갑게 식었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고, 어둠 속에 유폐되었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숙명론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역사를 바꾸게 하는 힘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의 때임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엉망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뒤흔드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지난 5월 25일 미국의 미네아폴리스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미국이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한 식료품점 점원이 경찰에 전화를 걸어 어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위조수표를 사용했다고 신고했습니다. 출동한 경찰관 네 명은 곧 그 남자를 바닥에 눕혀 제압했고, 백인 경찰관 한 사람이 그의 목을 무릎으로 세게 눌렀습니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이름의 사나이는 몇 번씩이나 ‘숨을 쉴 수 없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말했고, 주위 사람들도 만류했지만 경찰의 폭력은 8분 48초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코피까지 흘리던 조지 플로이는 의식을 잃었고 곧 사망했습니다. “I can’t breathe”. 이 말이 성령강림절을 맞는 우리에게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습니다. 시카고 기쁨의 교회 손태환 목사님은 이 사건을 두고 페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세상이 창조되던 날 숨이 있었다. 큰 숨이 온 세상에 생명을 부여했다. 온 세상은 같은 숨으로 숨쉬었고 그분의 숨을 나눠가진 세상은 평화로웠다. 사람이 빚어지던 날 숨이 있었다. 작은 코에 불어넣은 숨으로 사람은 생령이 되었다. 사람은 같은 숨으로 숨쉬었고 그분의 숨을 나눠가진 사람들은 서로 사랑했다. 사람들이 세상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힘없이 쓰러진 이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렀다. 숨길을 끊어버렸다. 하나님의 숨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숨이었다. 하나님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신음하신다.“

∙주인을 바꿔라
하나님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혼돈과 흑암과 공허에 뒤덮인 세상에 질서를 가져오신 하나님의 창조를 무화시키는 일이 서슴없이 벌어집니다. 세상은 죽음의 그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만드시지만 인간은 혼돈과 무질서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어둠을 빚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시편 시인들은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소리를 내며 거품을 내뿜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일의 괴로움을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음(마베쓰maveth)의 사슬(헤벨chebel)이 나를 휘감고 죽음(bêliya‘al, 무가치함, 파괴, 사악함)의 물살(나헬nachal)이 나를 덮쳤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동여 묶고, 죽음의 덫이 나를 덮쳤다.“(시18:4-5)

극단적인 경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도 이런 경험을 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이 많습니다. 일용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위험을 외주화 하는 기업들로 인해 항시적인 위험 속에 사는 사람들, 빈민들, 복지의 사각 지대에 놓인 사람들, 이런 저런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런 행복을 누릴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안전과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이들은 일상적으로 죽음의 위협 아래서 살아갑니다. 숨이 가쁘거나 숨이 막히는 현실입니다.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출34:6)을 우리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제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을 존귀한 존재로 대할 생각이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함부로 혐오를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섬기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싫증을 냈고, 제물을 바치는 수고도 귀찮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죄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했고, 악함으로 괴롭혔습니다(사4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용서하심은 사실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걸어놓으신 노란 리본입니다. 영화 ‘노란 리본을 매주세요’의 타이틀곡이 떠오릅니다. 3년 동안의 복역을 끝낸 남자가 여인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제 나는 곧 자유의 몸이 됩니다. 나의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함께 지내던 집 앞에 있는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매주세요’(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만일 노란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거절한 것으로 알고 버스에서 내리지 않겠습니다. 편지를 보낸 얼마 후 남자는 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저 멀리 떡갈나무 가지마다 걸려 있는 노란 리본을 봅니다. 얼마나 감동했을까요? 하나님이 걸어놓으신 노란 리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다시 시작하라는 부름입니다.

∙일어선 존재
이사야는 하나님을 “너를 지으신 분”, “네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를 도와주마’ 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의 아재르(‘azar)는 ‘둘러싸다, 보호하다, 구조하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창조하신 분인 동시에 그들이 직면한 위기의 순간마다 방패처럼 그들을 감싸고 도우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무너진 이스라엘 공동체를 친근하게 부르십니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여수룬아’. 여수룬은 성경에 오직 네 번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세 번은 신명기서에 소개된 모세의 기도와 축복에 나오고(신32:15, 33:5, 26), 한 번은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새번역은 유감스럽게도 신명기에 나오는 ‘여수룬’을 다 ‘이스라엘’로 번역했습니다. 여수룬(Jeshurun)은 정직한 사람(upright one)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애칭인 셈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기들을 보며 귀염둥이, 착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하나님은 죄 지은 이스라엘, 죄책감에 사로잡힌 백성들을 친근하게 부르심으로 곁을 내주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주신 첫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현실이 제 아무리 힘겨워도 주눅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현실과 맞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주님이 함께 계심을 관념이 아니라 실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은 의기소침해진 백성들을 격려하십니다.

“내가 메마른 땅에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듯이, 네 자손에게 내 영을 부어 주고,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내리겠다.”(사44:3)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는 ‘일어선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일어서게 하는 힘입니다.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 조각가 자코메티의 말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마침내’라는 부사는 이전에 견뎌야 했던 세월의 무게를 짐작하게 합니다. ‘마침내‘라는 단어 속에는 대지를 딛고 일어선 것에 대견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도 자꾸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를 아래로 잡아끄는 중력, 죄, 무기력, 절망, 슬픔, 원망을 떨치고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수 있는 힘을 우리 속에 불어넣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복(Berakah)입니다. 복은 완제품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며 사는 것이 인간의 소명입니다. 그는 “마치 시냇물 가의 버들처럼, 풀처럼 무성하게 자랄 것”(사44:4)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기에, 어려움이 없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삶은 본래 힘겨운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남을 이용해 먹으려 하고, 주위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성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기에 그들은 인생의 가뭄이 찾아와도 메마르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기쁨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까? 현실 기독교가 세상의 놀림거리로 변했지만 우리는 이 고백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이 자랑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실재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별하고, 반영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더욱 충만한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 더 나아가 영적 감각들이 참여하고, 파트너가 되고, 신적 생명을 함께 나누는(koinonia)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반영하는 형상으로 되어 간다는 뜻”(테오도르 러년, <새로운 창조>, 김고광 옮김, 기독교대한감리회 홍보출판국, 1999년, p.115)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말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면 하나님이 정녕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삶으로 입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없어‘라는 ‘조지 플로이드들’의 외침이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그들이 숨을 쉴 수 있도록 억압을 제거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시냇가에 심긴 버들처럼 푸른 기운을 세상에 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울감에 사로잡힌 이들 속에 들어가 명랑함과 생기를 불어넣으십시오. 일어선 사람이 되어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이웃들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영 안에서 춤추며 기쁘게 사십시오. 아멘.

새컬럼



조르주 루오의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

김기석

조르주 루오의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



파리 코뮌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태어난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는 어린 시절 파리 교외의 지하실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신산스런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 경험은 일평생토록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어려운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었습니다. 가구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는 평범한 사물이나 일상적인 일도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스테인드글라스 직공이었던 할아버지 히르슈의 도제로 들어가 일을 배웠습니다. 그의 그림이나 판화에 검은 테두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적 기법을 채용한 것입니다. 스무 살 되던 해에는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서 신화적인 모티프의 그림을 많이 그리던 귀스타브 모로에게 사사했습니다. 루오는 모로로부터 예술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내면의 통찰력을 가지고 사물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했던 시기이지만 동시에 삶의 공포와 실존의 가혹함 또한 증대되던 시기였습니다. 종교적 감성이 예민했던 루오는 인간의 아픔을 보듬지 못하는 자기 시대의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합니다. “서른 살이 다 되었을 때,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섬광 혹은 은총의 빛줄기가 나에게 내렸다. 내 눈에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였다. 그전에 내가 보았던 것들을 이제 다른 형태와 조화로움으로 보게 되었다.”(발터 니그, <조르주 루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p.56에서 재인용) 그것은 ‘빛 체험‘이었습니다. 그 빛은 그의 어두운 내면을 밝혔고, 이후에 다시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빛은 세상의 온갖 부정성 너머의 세계를 보도록 그의 눈을 밝혀주었습니다.



조각가인 최종태 선생 또한 그러한 빛을 체험했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조용하고 따뜻하지만 압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빛 속에 있을 때 그는 시간을 넘어서는 체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사랑의 빛 안에서 도무지 구별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무시간(無時間) 속에서 일체였습니다. 그것은 생명이고 사랑 자체였습니다. 나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나는 빛 안에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분명히 있는 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최종태,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 열화당, 1998년 2월 20일, p.49) ‘나’의 존재가 소거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전체 그 자체 안에 있다는 느낌이 그를 안식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빛 체험 덕분일까요? 조르주 루오는 인간 실존의 슬프고 가혹한 모습을 무수히 보았지만 덧없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멸시받고 모욕당하는 이들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존엄성을 박탈당하는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창부들의 모습 속에서도 거룩함을 보았습니다.



쉰여덟 점으로 구성된 판화집 ‘미제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라틴어)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가 인류에게 보낸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첫 번째 작품 제목은 “하나님, 자비가 크시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이고, 마지막 작품의 제목은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다. 기원과 고백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작품들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짊어지고 수난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과 더불어 사람들을 주변화하고 수단으로 삼는 악마적인 세상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의 고단한 삶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의 잔인하고 무감각한 모습이 투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절망의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메마른 땅에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은 ‘메제레레’에 실린 작품 중 마흔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목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이 작품이 전쟁과 연관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한 아이가 앉아 있습니다. 일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아이는 엄마의 무릎이 마치 기도단인 것처럼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슴 앞에 들린 그의 두 손이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어머니는 지긋이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아이의 허리께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만든 공간은 원을 닮았습니다. 두루 원만한 공간, 온전한 사랑의 샘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이의 몸에는 환한 빛이 드리워 있습니다. 마치 아이 속에 있는 어둠을 어머니가 다 빨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존재를 연결하고 있는 어머니의 손만은 환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전쟁은 죽음과 공포를 자아냅니다.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전쟁은 생명의 부정이고 사랑의 단절입니다. 신학자 C.S. 송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co-creator of God)라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전쟁은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악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앗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야 할 슬픔을 라헬의 울음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렘31:15).



전쟁의 악마성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한 루오이지만 이 작품은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격렬한 슬픔이나 분노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1867-1945)의 작품에는 작가의 파토스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케테 콜비츠의 ‘씨앗은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작품은 놀란 세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를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두 팔이 마치 둥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십자가의 횡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깥 어둠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빛은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비장함과 슬픔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거기에 비해 루오의 그림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통을 추상화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빛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세상의 평화가 지켜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적 노력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신의 은총이 세상을 지킬 것임을 그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울음을 안으로 삼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몰아닥쳤던 전쟁의 광풍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 말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전쟁은 없습니다. 명분이 어떠하든 전쟁은 인간의 악마성의 전시장일 뿐입니다.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에 담긴 간절함이 문득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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