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

Chungpa Imgs

금주의 설교 목사님 컬럼 새글

교회안내

집회 안내 &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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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부예배 10:50 유치부실
유초등부예배 10:50 교육관
중고등부예배 10:50 중고등부실
1청년부모임 13:30 지하다목적실
2청년부예배 14:00 청년회실
1부 예배 09:30 대예배실
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분별력이 우리를 지켜준다

김기석(2021-01-17)
듣기

분별력이 우리를 지켜 준다
잠2:1-11
(2021/01/17, 주현 후 제2주)

[아이들아,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명철에 네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외쳐 부르고,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여라.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지식과 명철을 주시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에게는 분별하는 지혜를 마련하여 주시고, 흠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신다. 공평하게 사는 사람의 길을 보살펴 주시고,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의 길을 지켜 주신다. 그 때에야 너는 정의와 공평과 정직, 이 모든 복된 길을 깨달을 것이다. 지혜가 네 마음 속에 들어가고,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다. 분별력이 너를 지켜 주고, 명철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

∙우리 마음을 둘 곳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전히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링반더룽(Ringwanderung)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등산 용어인데 환상방황環狀彷徨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환상은 고리 모양을 뜻합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짙은 안개나 폭우 등과 같은 악천후를 만나거나, 빽빽한 삼림에 갇혀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같은 지점을 계속 맴돌게 됩니다. 링반더룽은 바로 그런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즉시 나침반이나 지도를 활용하여 방향을 잘 확인해야 합니다. 그마저 어렵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 전체 지형을 살펴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습니다. 마치 짙은 안개에 갇힌 것 같습니다. 더욱 힘겨운 것은 외로움입니다. 친밀한 사귐이 주는 기쁨과 안온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같은 주소지에 살지 않는 가족들 간의 만남조차 제한되어 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삶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곁에 있는 이들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합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홀로 있음의 기쁨입니다. 외로움은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기에 홀로 있음의 쓸쓸함입니다. 사람은 홀로 있어야 할 때도 있지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광장과 골방을 오갈 때 삶이 건강해집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부풀리는 동시에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연약한 이들조차 품고 가는 따뜻한 품이었습니다. 공동체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지켜야 할 윤리를 내면화하고 삽니다. ‘나 좋을 대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함께 지내는 다른 이들의 사정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각자도생의 살벌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친 마음을 둘 곳이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이 실감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우리는 링반더룽의 상황 속에 빠져 있습니다. 욕망 주변을 맴돌고, 권태에 시달리고, 분노와 불평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구하고 찾으라
히브리의 지혜자는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막 살기로 작정했다면 굳이 지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열린 태도로 배워야 합니다. 지혜의 스승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몇 가지 동사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받아들여라’, ‘간직하여라’, ‘귀를 기울여라’, ‘마음에 두어라‘. 적극적 경청과 적극적 수용이야말로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을 참 좋아합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며 들려준 이야기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만큼은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2:19). 똑같은 자리에 있었어도 이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이미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듣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지혜자들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배우려 합니다. 바로 그것이 겸손함입니다. 그런데 배움은 수동적으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추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슬기를 외쳐 부르고,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여라.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잠2:3-4)

지혜와 명철은 스승을 통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치열하게 탐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외쳐 부르고, 소리를 높이라는 것은 질문하라는 말입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한계에 직면했다는 뜻입니다. 낯선 상황에 놓일 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질문을 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걸으면서 당혹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세상의 누구도 인생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질문을 던질 때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고통에 빠졌던 욥은 하나님께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시는지 알려 주십시오.“(욥10:2)라고 청합니다. 시편 시인도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10:1)라고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외톨이가 된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렘15:18)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명철을 구하는 이들도 속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더 낫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슬기를 구하고 명철을 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인생에 정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 추구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敬畏는 공경함과 두려움이 결합된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경외를 뜻하는 ‘이르-아 yir‘ah’ 역시 기본적인 의미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장엄함을 깨닫는 데서 오는 감정입니다. 우리 삶이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경외심을 잃어버릴 때 우리 삶은 시장으로 바뀝니다. 이익과 손해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어 버립니다. 경외심을 잃는 순간 우리 삶은 흐려집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경외의 순간은 자기 정화(淨化)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76).

하나님을 경외하고 흠 없이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분별하는 지혜와 보호하심입니다. 분별력이란 세상 물정을 알아서 가리는 능력입니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릴 수 있어야 성숙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미혹迷惑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지금은 모든 가치가 상대화된 시대입니다. 평등사회가 실현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중심되는 가치가 사라졌기에 사람들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이 줄어든 대신, 냉소하고 조롱하고 헐뜯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살다보니 우리는 늘 다른 이들을 경계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평가에 민감해집니다. 마음에 안식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혹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외피를 쓰고 다가올 때 사람들은 더 잘 넘어갑니다. 그들은 특별한 계시와 깨달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비밀을 아는 것은 자기들뿐이기에 세상을 구할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거대한 착각이고 민망한 허위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이기에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었던 이들은 즐겨 그들에게 자기 자유를 맡깁니다. 예속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거짓 종교에 미혹된 이들이 보이는 반사회적 행태를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반사회적 행태를 믿음으로 포장하는 이들 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은 흔하게 만드셨고, 가장 귀한 것은 평범함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함에 대한 추구가 우리를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방향으로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사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선택하는 사람,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아끼십니다. 당신의 의로운 팔로 직접 지켜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용감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패는 우리 속에 깃든 신뢰와 기쁨입니다.

∙지혜 안에서 살아가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정의와 공평과 정직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런 소망이 진실한 것이라면 여기서부터 그런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 선율의 중요한 코드는 정의와 공평, 그리고 정직입니다. 그런 삶을 외면한 채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은 염치없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누립니다. 유쾌함과 명랑함으로 주위를 물들입니다.

믿음이 우리 표정을 굳게 만들고, 다른 이들과 갈등이 생기게 만든다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냉랭한 세상을 녹입니다. 누구나 아끼고 존중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잇대어 사는 이들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인권운동가인 벨러리 카우르(Valarie Kaur)의 말입니다. 그는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과정, 즉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경험한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보살핌(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는 역량)은 사랑을 단지 감정이 아닌 달콤한 형태의 노동으로 재정의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누구도 낯설게 보지 않고’ 그들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며 호흡하고, 그 수고에 수반되는 모든 감정을 타개해나가기를 요청한다. 기쁨은 사랑의 선물이다. 슬픔은 사랑의 대가다. 분노는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는 힘이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p.214에서 재인용)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달콤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낯선 감정 또한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슬픔도 줍니다. 때로는 분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분별력이 너를 지켜 주고, 명철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잠2:11). 미혹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근심의 무게를 줄이는 법

김기석

“내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날이야말로 영적 각성의 날이다.“(막데부르크의 메히틸트)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대한大寒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절기라지요? “설중雪中의 봉만峯巒(봉우리 모양을 한 산)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땅의 현실이 팍팍하기 때문일까요? 설산은 마치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하늘의 광채를 보게 됩니다. 괴테가 “모든 산봉우리에는 정적이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진실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의 첫 번째 환자가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 감염병이 이렇게 심각하게 우리 일상을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몇 주 불편을 감수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질병은 이러한 우리의 낙관론을 무참하게 짓밟았으며,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포스트-코로나 담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편을 즐겁게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건강 문제로 입원하고 수술을 하거나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고, 병이 재발하여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화재로 작업장을 잃어버린 가족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려 몸에 익지도 않은 노동의 현장에 서신 분도 계시고, 전직(轉職)을 준비하는 분도 계십니다. 퇴직을 앞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신 분도 계십니다. 모두 절박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역병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절박함에 관심이 없다. 역병 그 자체의 운동 원리에 충실할 뿐이다.”(안재원, <아테네 팬데믹>, 이른비, p.7).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자각입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 모든 이들을 은총의 큰 손으로 감싸주시기를 하나님께 청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살고 있는 땅’과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위험 속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보호의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 낯선 존재로 산다고 하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더 큰 세계에 접속하지 못합니다. 새가 부화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지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지만 더 큰 세계로의 도약이기도 합니다. 부등깃이 자라 날개가 제법 펼쳐지면 새들은 허공으로 도약을 감행하며 날기를 연습합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는 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새로운 삶으로의 열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힘들지만 정서적인 긴장감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인 긴장 속에 머물 때 우리 속의 여백은 줄어들고 낯빛은 어두워집니다. 말이 퉁명스러워지고, 표정 또한 싸늘해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고, 분노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몸의 자세가 바뀌면 생각도 바뀝니다. 제가 종종 산책을 즐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이 변한다면서 몽테뉴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몽테뉴는 언제나 거듭, 우리가 근심이라 부르는 것은 자체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키우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무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무게를 지닌다. 가까이 있는 것이 멀리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작은 척도로 움직일수록 작은 것이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낸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p.130-131)


 

어떤 일 혹은 사태에 대해 우리가 부여한 무게가 우리가 느끼는 무게라는 말이 참 크게 와닿습니다. 매사를 가볍게 대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진중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그 더 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 이 시의 맥락에서 ‘산’은 ‘시온’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들어’라는 말입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일종의 거리 두기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한없이 몰아댑니다. 거기 휩쓸려서 전전긍긍하다 보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그때야말로 영원의 세계가 우리를 소환하는 순간입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시34:12-14)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은 우리를 물음표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도 누군가가 정색을 하고 물으면 낯설게 보입니다. 질문은 우리 삶의 환기창과 같습니다. 전도자의 이 질문은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좋은 일을 보며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답은 간명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거나 확대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악한 말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거나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자기 확장 욕망과 타자 부정이야말로 즐거운 삶의 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선을 행하라(do good)’,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stay in love with God)’.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윤리라면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윤리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추위에 떨고 있던 사람에게 자기가 입었던 외투와 장갑을 벗어준 사람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선을 행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냉랭한 세상의 얼음을 깨는 봄소식처럼 들려왔습니다. 그가 봄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이미 봄이 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이웃들에게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평화는 기다린다고 하여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가꾸는 사람이 있어 광야가 푸르러지는 것처럼 평화로운 세상은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중심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아픔과 비애가 서린 폭력의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야 평화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라는 가파른 언덕을 허위단심으로 넘느라 다 숨이 가쁘지만, 가끔은 멈춰 서서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보고, 새들도 보고, 교우들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늘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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