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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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진실한 기다림

이범석(2019-12-01)
듣기

진실한 기다림
마 24.:36-44
(2019/12/01, 대림절 1주)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이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알고 있으면, 그는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따뜻한 성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느덧 12월의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로, 교회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마치 묵은 달력은 떼어 정리해 버리고, 빳빳한 새 달력을 벽에 거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새 출발과 새 기대가 샘솟는 날입니다. 예배당 내부에도 성탄 장식들이 눈에 환하게 보입니다. 예배부원분들께서 멋지게 성탄 장식을 해주셨습니다. 날도 쌀쌀한데 애쓰고 수고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우리의 마음이 성탄의 따뜻한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예전에만 해도, 12월이 되면 사방에서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가 들리고, 뭔가 들뜨고 유쾌한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성탄 준비로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내내 시끌벅적했지요. 아이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와, 부모님과, 심지어 교회에서도 받을 선물에, 신나고 기대되는 때였습니다. 동시에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말 안 들으면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못 받게 된다고, 귀여운 협박을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졸이는 때이기도 했지요. 저 역시 드디어 산타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잘난 척 뽐내며 신나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그 다음 해부터 선물 개수가 줄어들어서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기도 했구요.
이렇게 모두 기다리고 설렜던 12월이 요즘은 맹숭맹숭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연말연시의 바쁜 생활은 마찬가지일 텐데, 우리 마음이 메마르고 좁아졌음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리고 기대하며, 마르다가 값비싼 향유를 붓고 헌신했듯이,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 베풀고 나누며 기쁨과 정을 표현하는 모습은 다소 흐려졌습니다. 한 해 동안의 성과만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칼 같이 냉정하게 비판하고 더 몰아세우는 각박한 세태에, 우리의 영혼까지 빼앗긴 것은 아닌가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는 종교 장사치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성전 제사장 계급과 결탁하여 터무니없는 비율로 강제 환전을 하게 하고, 제물을 교환 및 판매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행태를 꾸짖는 여러 말씀과 비유를 들려 주시고, 성전 밖으로 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처가 있는 올리브 산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말씀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요, 살아계신 야웨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요, 그곳에서 제사하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무너지면, 그건 세상이 끝난다는 뜻과 매한가지입니다. 이 엄중한 메시지 앞에서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궁금한 건, 그 정확한 때와 징조였습니다. 그 때와 징조를 알아야 대비할 테니까요.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24:3)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마24:36) 제자들은 당황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분명하게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고도, 그 때를 모른다고 하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너무 막연합니다. 마감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아야, 역순으로 계산해서, 계획표라도 세우지 않겠습니까. 하나씩 작게라도 대비를 해놓지 않겠습니까.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은 자신도 모르니, 그 날과 그 시각이 언제인지에 대한 관심을 끌 것을 요청하십니다. 역사의 종말과 심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완성의 날이 올 것은 확실하지만, 그 시각은 하나님만 아시고, 그 외 그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때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24:44)이라고 언급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으니, 마음 푹 놓고 그 때를 맞이할 수는 결코 없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 ‘기다림’이란 행위
그 때를 알지 못하고 마냥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의 무게에 짓눌릴 것만 같습니다. 기다림이란 것이 고통스럽게 견뎌야하는 인고의 세월이 되는 건 한순간입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 ‘오지 않을지도 몰라’라는 초조한 어둠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 시간이 쓸모없이 낭비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유와 김이나 씨가 작사한 “이름에게”란 곡이 있습니다. 마치 이미 한참 멀어져 버린 나의 내면을 향한 나 스스로의 위로와 다짐과 같은 노래입니다. 가사 일부는 이렇습니다. “끝없이 길었던 / 짙고 어두운 밤 사이로 / 조용히 사라진 / 네 소원을 알아 / 오래 기다릴게 / 반드시 너를 찾을게 /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어둔 밤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끝없이 길기만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도, 어둔 밤은 반드시 지나고야 말테고, 희뿌연 새벽도 끝나기 마련입니다. 광명한 아침이 온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 사람은 몸가짐을 추스르며 끝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이렇게 볼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새 희망이요, 하늘에서 주시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 중에는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던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인고의 긴 밤을 보냈습니다. 아브람은, 자녀와 땅의 약속을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났으나, 결실 없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귀향과 보호의 약속을 듣고 걸음을 옮겼으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뚫고 기다림을 신앙의 복된 승리로 이뤄냈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올 것이 확실해’라는 믿음이 있으면, 기다림의 시간은 전혀 다른 태도로 채워집니다. 기다림은 한숨과 포기의 시간이 아니라, 질문과 각성의 시간이 됩니다. 한 마디로, ‘깨어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깨어 있다면, 질문과 통찰, 그리고 깨달음에 잇댄 행동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하염없이 무의미하게 흘러 버리고 소멸되는 먼지 가루들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들러 아까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중간 정착역도 아닙니다. ‘기다림’을 깨어 있는 각성의 시간으로 만들 때, 그 자체가 ‘기다리는 대상’만큼 중요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 ‘기다림’이 주는 성찰과 행동
예수님은 밭에 있는 사람들과 맷돌 갈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덧붙여 들려 주십니다. 같은 일상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하나는 데려 가시고, 하나는 버려두시겠다고 하십니다.(마24:40~41) 둘 사이의 차이는 뭘까요? 예수님은 ‘깨어있음’을 강조하심으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십니다. 알지 못하는 날을 기다리며, 깨어 준비하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기다리는 자의 삶의 태도는 깨어남입니다. 마냥 게으르게 보내며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지나치게 긴장하며 부들부들 떨며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기다림의 태도에는 완급 조절 따위는 없습니다. 깨어 일어나, 우직하게 성심껏 기다림을 살아가는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처음에는 기다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차 기다리는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나아가 나와 너와의 관계를 성찰하게 되고, 계속 더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기다리는 동안 할 일들을 궁리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기다림’의 의미가 발생합니다.
예전에 휴대전화기가 없던 시절에는, 약속 장소에서 막막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만날 시간과 장소는 분명히 약속했지만,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알 길 없으니,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저도 2시간 정도까지 친구를 기다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런 저런 궁리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다음번에 상대방이 또 지각을 하더라도 참아줄 최대 시간을 결정하는 겁니다. 관계의 밀도에 따라, 10분도 참아줄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시간 이상도 참아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삶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성찰을 하게 됩니다. 우선, 기다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자문합니다. 긴 시간을 들여, 나의 내면 깊이 침잠하여 관조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왜 기다리고 있지? 기다리며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고갱의 표현 그대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긴 시간의 기다림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은, 나의 존재를 반성하고 깊이 숙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을 숙고하게 합니다. 재림하여 오실 주님으로부터, 내가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는 여러 이웃들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들을 성찰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관계를 굳건하게 만들어 줄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을 찾게 합니다. 참된 성찰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실한 기다림은 나와 너, 나와 이웃, 나와 우주 만물,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질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그 자체로 나에게 중요해질 때, 우리는 어둔 밤의 시간을 버틸 힘도 얻게 되고, 내면도 깊어지고,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기다림은 공허한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닫힌 문을 두드리는 삶의 방식이요, 척박한 땅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삶의 방식이요, 깨진 그릇 같은 관계를 하나씩 조각 맞추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실 주님을 바라며,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지속하는 동안, 우리는, 어둠의 행실은 버리고 (롬13:11~13),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더 용서하고 (마18:21~35),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주님께 하듯 사랑하며 (마25:35~40), 우리 삶을 진실한 기다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떤 아름다운 사건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기다릴 수 있음이 복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내려오실 줄 믿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2000년 전 이미 오셨던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오셔서 역사의 심판과 완성을 이루실 분을 대림절 네 주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시다. 그 마지막 때가 언제 닥쳐오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멋진 ‘기다림’의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새컬럼



구도 시인 구상 평전

김기석

시대와의 불화를 넘어 은총의 세계에 이르다

  -이숭원, <구도 시인 구상 평전>(분도출판사, 2019년)



생각의 흐름이 끊길 때마다 습관처럼 들춰보는 책들이 있다. 나의 경우 사유의 길이 막힐 때면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의 글을 읽고, 상상력이 고갈되었다고 느낄 때면 카프카, 가브리엘 마르께스,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오르한 파묵의 글을 찾아 읽는다. 과잉된 언어에 지칠 때면 시집을 찾아 읽는다. 함석헌의 <수평선 너머>나 구상의 <구상 전집>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구상 시인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다. 더러 찾아볼 수 있는 사진 속의 모습은 그가 학처럼 맑은 선비임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어는 복잡하지 않아 독자들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시어를 통해 그는 눈부신 시적 순간을 빚어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인용하곤 하는 그의 시는 대개 후기 시들이었다. 시민 혹은 시인으로서 살아온 그의 삶이 당도한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빚어낸 시들에 주로 공감해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다짜고짜 “이제사 비로소/두 이레 강아지만큼/은총에 눈이 뜬다”라고 말한 시인이 다음 연에서 한 고백은 삶에 눈 뜬 영성가의 말처럼 들리지 않던가.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덧없어만 보이던 나고 죽은 일조차 “모두가 영원한 한 모습일 뿐”이라니!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런 깨달음에 당도하는 것일까? 신앙인이라면 모두 이런 고백에 이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해가 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드러내며 추한 몰골을 드러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기에 구상의 삶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삶의 곡절이 없었을 리 없건만 그는 어떻게 그런 인식 혹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백석, 김영랑, 서정주, 김종삼 등 한국 시사에 빚나는 인물들에 대한 탁월한 글을 써온 이숭원 교수가 쓴 <구도 시인 구상 평전>은 우리의 그러한 궁금증에 적절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구상 시인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하지만, 그런 인연이 아니라도 구상 시인의 삶은 반드시 톺아보아야 할 도전이었을 것이다. 2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내용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친절하게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덧붙인 저자 연보와 함께 보면 그의 생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했던 시대상과 그의 응답이 오롯이 드러난다.



시대와의 불화

한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의 삶을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은 삶의 외연을 형성하고, 그 시대를 관통하면서 맺어온 다양한 관계들은 삶의 내용을 형성하는 법이다. 구상의 삶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축이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 신앙이다. 그의 부친은 가산이 넉넉한 양반집 출신이지만 가톨릭에 입교하면서 그런 구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교육사업에 뜻을 둔 구상의 부친은 베네딕도 수도회가 함경남도 원산에 수도원을 건립할 때 가산을 정리하여 그곳으로 이주한다. 구상의 가형인 대준은 신부가 되어 그곳에서 헌신했다. 구상도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학에 탐닉하던 그에게 “규범적인 성직자 교육”은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던 그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대학 종교과에 들어갔다. 교수들 대부분이 불교계 승려였기에 그는 알게 모르게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청답게 그는 시대와 불화했다. 귀국 후 “불온한 사상과 반항적 행동 때문에 경찰의 호출이 잦았고 동원과 징집 등의 위험이 커지자”(45), 지인들은 그를 친일계 신문인 <북선매일신보>의 기자로 천거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친일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공산치하의 이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원산문예총연합회‘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원산문학가동맹이 기획했던 ‘해방기념시집’인 <응향凝香>에 시 세 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응향>은 신랄한 비판에 직면했다. 경직된 이데올로그들은 체제에 복무하지 않는 문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의 정치 지도부는 인민에게 복무해야 할 문학이 현실도피적이고 퇴폐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데 대해 분명한 비판의 선을 긋고 <응향>에 수록된 작품의 창작 행위를 건국 시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반동 행위로 규정했다.”(61)



이 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그는 탈출을 감행하여 1947년에 서울에 도착했다. 북한에서 탈출해야 했던 그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남한에서 문학적 독자성을 강조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부인신보>, <연합신문>을 거쳐,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북한특보>, <승리일보> 등의 제작에 관여했다. 순수문학이 아닌 체제 선전에 참여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던 그는 1952년부터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 신문을 통해 그는 “독재로 흐르는 조짐을 보이는 정권에 맞서 비판적 논설을 잇따라 발표”(96)했다. 정론직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곤 했다. 필화사건으로 고역을 겪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59년에 소위 조작된 ’레이더 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는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 차라리 사형을 내려 달라‘고 외쳤다고 한다“(171).



사상적 전환의 계기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도 그의 시작(詩作)은 중단되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그의 시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인간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획득했던 것이다. 전쟁 경험을 담은 연작시 <초토焦土의 시>(*초토는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을 의미)에서 그는 전쟁의 참상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지속되는 삶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궁핍과 비참 속에서도 삶의 끔찍함을 모르는 듯 해바라기처럼 환하던 아이들의 천진함이 시인의 마음을 저릿하게 흔들었던 것이다. 희망은 이처럼 소박하고 간절하고 천진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그의 시어는 관념적이지 않다. 그는 일상어의 재배치를 통해 아름다움과 진실 그리고 거룩함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개발독재시대가 열리면서 경제가 삶을 과잉대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영혼은 납작해졌고, 이익에 발밭은 이들은 광포해졌다. 인간주의적인 삶을 추구하던 시인에게 그 시대는 낯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난 것이 ‘까마귀’ 연작이다. “까마귀 소리는 탐욕과 죄악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비판의 육성이자 재앙의 종말을 경고하는 선지자의 외침이었다”(221). 박정희와의 개인적 인연으로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기 어려웠다. 고민과 모색의 시간을 거쳐 그는 사상적 전환의 계기를 맞이한다. 



첫째는 인간 양심의 본질적 요소가 수치심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수치심을 그는 “인간 구제의 가능성“, “모든 규범의 시원”으로 보았던 것이다(178ff). 그는 불안과 허무, 그리고 반항을 주조음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결여한 것이 바로 ‘수치심’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프랑스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사상을 접한 것이다. 마르셀을 통해 구상은 육화(incarnation)의 개념과 희망의 영속성 개념을 배운다(184). 세계 참여를 통해 희망을 창조하는 것이 실존의 과제임을 자각한 것이다. 



셋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담은 문헌들을 습득함으로써 타종교에 대해 열린 접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187). 바야흐로 성속 불이의 세계관이 정초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인간주의 시의 개화

구상의 초기 시 세계에서부터 단초가 마련되었던 인간주의 시가 만개할 시간이 마침내 당도했다. 이숭원은 한국 시단에서 구상 시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밝힌다. “한국시사에서 구상만큼 인간에 집중한 시인은 거의 없다. 문학의 사명이 삶의 진실을 증언하고 세상의 허위에 맞서는 일이라는 사실을 구상처럼 철저하게 믿고 그 신념을 실천한 사람도 찾기 어렵다”(235). 그의 시는 순수문학이나 참여문학 등으로 범주화할 수 없다. 그가 지향한 창작의 요체는 “세상에 필요한 시, 표현에 상응하는 등가량의 진실이 담겨 있는 시,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시”(237)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대상에 몰입하여 가장 진실한 모습을 찾아내서 그것을 시로 표현“(277)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확고한 창작 방법론으로 내세웠다. 비유의 과잉과 심상의 탐닉을 경계하며 시를 개인적 차원의 자기표현으로 보는 김춘수식의 문학관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는 현실에 대한 일차적 반응에 머물러 있는 참여시의 경향도 비판하고, 아무런 회의 없이 자연에 안주하는 박목월식의 체념적 경향도 부정했다.“(278)



이러한 구상의 시 세계는 <그리스도 폴의 강>으로 만개했다. 사람들을 어깨에 짊어진 채 강을 건네주던 성인 ‘크리스토포로스’를 통해 그는 ‘강‘으로 표상되는 고단한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기독교와 불교의 경계가 허물어진 화엄의 세계였고, 만유일체가 은총인 세계였다.



식민시기와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그의 시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풍성해졌다. 삶의 다양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혼돈을 넘어 더 큰 질서를 직관하게 했고, 시작 활동은 그런 깨달음을 보편적 경험으로 바꾸는 창조적 승화의 길이었다.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벗이 되고자 했던 시인, 명리가 아니라 참을 참구했던 시인이 당도한 세계가 은총의 세계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바랐던 것은 당신의 창조물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었다. ‘경탄의 능력‘을 잃어버림이 인간의 가장 큰 소외이다. 고단한 현실을 모르기에 경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직시하면서도 생에 대해 경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구상의 삶은 바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한 사례로 우리 가운데 있다. 



한 시인의 생을 가로 세로 샅샅이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인생을 빚었던 다양한 계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준 저자 이숭원 박사의 연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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