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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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월,토,일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재훈 목사

김형욱 목사

이성언 목사

이어진겨레 전도사

원로목사


보릿고개의 성령강림

김재흥(2024-05-19)
듣기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 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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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은 이 나라와 44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자식의 무덤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어머니들 위에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 오순절 성령강림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만 남아 있던 모임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숨어 지내던 제자들은 큰 힘을 얻어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 없던 모임, 교회라는 모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은 유대절기로는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순절, 다섯 오 열 십, 50일이 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50일을 말하는 걸까요? 유월절로부터 50일을 말합니다. 기독교 절기로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50일이 되는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죽고 50일이 지났으니 ‘예수는 끝났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완전히 끝났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했고 그 사건으로 수십 수백 명의 예수가 새롭게 일어났습니다.

성령강림의 의미를 계절적 변화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칠 주가 지난 다음에 맞는 절기라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그때가 보리와 밀의 수확철이라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의 50일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을에 거둔 곡식을 다 먹었으나 보리와 밀과 같은 늦봄에 추수하는 곡식을 거두기 전이라 모두가 배를 곯던 춘궁기, 소위 ‘보릿고개’였습니다.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지나 온 생명이 새롭게 살아나는 부활의 계절인 봄을 맞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먹을 것이 없어 가난한 이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이영도 시인의 <보리고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흘 안 끓여도 /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 줍던 아이가 /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쌀이 없어 사흘 동안 솥에 밥을 하지 못했습니다. 보리 수확철은 아직 멀었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 감꽃을 주어먹던 아이는 혹시나 하고 솥을 열어봅니다. 참 슬픈 광경입니다. 보릿고개는 그렇게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보릿고개 끝에 거두게 되는 밀과 보리는 말 그대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죽음 직전에 있던 이들을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하늘의 은총이었습니다. 성령은 그와 같습니다. 성령은 힘겹게 힘겹게 보릿고개와 같은 인생의 시련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생명의 밥상과도 같습니다.

• 이사야와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한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며 하신 말씀이니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출사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렸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그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셨고,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셨고, 앞 못 보는 자를 보게 하셨고, 억눌린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가 그 말씀을 선포했을 때의 상황과 이사야의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시 선포하셨을 때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황폐해진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포로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힘겹게 살아야 했던 시기에 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의 오랜 식민지배로 삶이 피폐해지고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갈 때 그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두 시대 모두 사람들은 가난했고, 포로였고, 눈은 있으나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고, 불의한 체제와 절망에 억눌려 지냈습니다. 그 시기는 영적 춘궁기, 보릿고개였습니다. 일 년 중 서너 달 한시적으로 견디면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일 년 365일, 10년 20년, 한 세대 두 세대를 지나도 끝나지 않는 어둡고 무겁고 무서운 운명 같은 춘궁기, 보릿고개였습니다.

이사야는 ‘주 하나님의 영이 자기에게 임하셔서 자기로 하여금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보리밥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고백과 선포는 초대이며 부탁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무거운 삶에 짓눌려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찾아가서 힘이 되어 주고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고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하나님의 초대이며 부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초대와 부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신 후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이루어질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루어졌다, 과거형입니다. 히브리어 어법에서 미래형을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강한 확신과 강한 각오를 의미합니다.

• 보릿고개의 성령강림
예수님은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밀밭 사이를 지나게 되셨습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밀이삭을 잘라 먹었던 것으로 보아 그 때는 밀 추수철, 곧 오순절 즈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순절, 밀 수확 직전은 춘궁기 보릿고개 시기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배가 고팠던 제자들은 본능적으로 배고픔을 면하고자 밀에 손을 댔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바리새인이 보았을 때,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하는 밀 서리는 용서할 수 있지만,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되었습니다. 율법서에는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들이대는 바리새인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밀 한 움큼 잘못 먹었다가 쳐 죽일 놈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의 정죄에 제자들은 한 마디 입도 뻥긋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예수님은 앞으로 나아가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요약하면, 다윗도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율법을 어긴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바리새인도 제자들도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바리새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어두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잔뜩 주눅 들고 어두웠던 제자들의 얼굴은 환해졌을 것이며 입가에는 미소까지 번졌을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사건을 체험하기 전에 이미 그 밀밭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전부가 성령강림의 사건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로마라는 제국과 불의한 성전체제가 만든 끝이 보이지 않는 보릿고개를 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위로요 은혜요 따스한 밥이셨습니다. 공생애 말미에는 이런 일도 있었지요. 로마 군병들과 성전경비병들이 칼과 창을 들고 감람산 동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체포하려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그 군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찾는 사람은 나다. 이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라.” 성령이란, 성령강림이란 그런 것입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내 뒤로 피하게 하여 그가 감당해야 할 어려움과 아픔을 내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령, 파라클레이토스의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파라클레이토스에 대한 문법적 번역은 ‘변호자’이지만, 파라클레이토스에 대한 정서적 번역은 ‘품’입니다.

• 밥이 되고 품이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50일이 되어가도록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성령이 바람처럼 불처럼 임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다락방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쳐주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느 새 제자들은 또 한 명의 예수가 되어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보릿고개를 넘는 이들을 위해 한 그릇의 밥이 되었고, 사람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자기의 어려움과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그들의 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한 명 한 명이 또 한 명의 예수가 되는 곳, 예수가 되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어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준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눈 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어라.’ 그 초대와 부탁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의 힘만으로 넘을 수 없었던 보릿고개를 넘어갈 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밥이 되어 주시고 품이 되어 주셨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보릿고개를 힘겹게 지나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 밥이 되고 품이 되어 줍시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고통이 주는 선물

김기석

고통이 주는 선물



‘내 인생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요’. 만나는 이마다 이런 하소연을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신기루처럼 깜박일 뿐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전시된 타자들의 행복한 모습은 우리의 남루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가 태산처럼 느껴질 때 비애감도 덩달아 커진다. 고달픔, 서러움, 억울함의 감정은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순간 지금이라는 기적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는 이들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통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적이다. 고통은 행복의 철천지원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통에 대한 내성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일에 연루되려 하지 않는다. 사랑조차 회피되는 경우가 많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도 한다. 외로움이 심화되고 자기 삶을 위협할 수도 있는 타자에 대한 적대감 또한 커진다.



고통은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고통은 익숙한 세계를 교란시키는 불쾌한 손님이다. 그 손님을 적의의 태도로 대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불쾌한 손님이 고분고분하게 물러나지는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어떤 존재도 고통을 회피할 수 없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창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기 동일성 속에 머물지 못한다. 그 동일성을 깨뜨리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운명에 채인 상처든, 타자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아픔이든, 적대적인 세상에서 겪은 불유쾌함이든 우리 속에는 그런 상처자국이 많다. 그 자국은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음유시인인 레너드 코헨은 ‘Anthem’이라는 노래에서 ‘모든 것 속에는 갈라진 틈이 있다. 그 틈을 통해 빛이 스며든다’고 노래했다. 고통이 우리 몸과 마음을 스쳐간 흔적인 틈을 메우는 일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그 틈을 통해 스며들고 있는 빛에 주목해야 한다.



고통을 반길 수는 없다. 고통은 우리 삶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그렇기에 불유쾌하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한사코 외면했던 삶의 다른 차원을 열어준다. 타자의 세계이다. 고통은 우리를 다른 이들의 고통과 연결시켜준다. 윤동주는 ‘팔복’이라는 시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한 후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시를 마무리했다.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애상이 아니다. 시대적 울분과 그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속에서 비로소 그는 다른 이들의 슬픔에 깊이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 슬픔의 연결을 통해 그는 오히려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행복을 위해 고통을 말끔히 제거하거나 외면하려 할 때 우리는 동시에 타자들의 고통에 무감하게 된다. 고통은 우리를 타자의 세계와 연결하는 든든한 줄이다.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타자들의 고통에 눈을 뜨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 할 때 책임적 공동체가 형성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책임으로 수용하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 곧 악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기독교 절기상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기의 막바지이다. 예수는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과 설움과 연약함을 자기 속으로 오롯이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외면해도 괜찮은 남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종교가 아니라 삶의 신비를 가르쳐준다. 고통은 중력처럼 사람들을 심연으로 잡아당긴다. 그들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지탱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난폭하고 냉혹하고 무정한 세상을 치유하는 이들이다. 봄바람이 되어 사람들 속에 깃든 생명을 깨어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 2024/03/22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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