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우상화와 폭력
김재흥(2025-01-26)
듣기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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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1월의 마지막 주일이며 설 연휴 가운데 맞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연휴가 길어서 그런지 해외로 여행을 가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해외와 고향, 먼 길 다녀오시는 분들 모두 가족과 좋은 시간 보내고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새해를 두 번 맞습니다.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은 새해를 세 번 맞습니다. 지난 12월 첫째 주일이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이었지요. 해마다 세 번의 새해를 맞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살라고 세 번씩이나 기회를 주시는구나.’ 설날의 ‘설’자는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설다, 낯설다에 온 말로 보는 견해가 가장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낯설다는 것은 새롭다는 뜻이니 설날은 새로운 첫날입니다. 새해를 맞아 하나님 안에서 새롭고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주중에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수 십 개의 행정명령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파리기후협약 탈퇴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석유 및 가스 시추를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탄소 발생을 두 번째로 많이 하고 있는 나라가 탄소를 더 발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난민의 입국도 불허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0년 동안 미군을 도와 이미 입국이 허락되어 있던 1,600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해서도 입국을 불허했습니다.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개칭하고 파나마 운하를 되찾아오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는 취임 전에 그린란드를 매입하고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겠다는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결정 하나하나가 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입니다. 국제사회와 지구 공동체에 대한 공적 책임을 무시한 발상이며, 타국의 주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나라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될지언정 문화적으로 윤리적으로는 빈궁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도 갈등과 분열이 심각합니다. 그런 와중에 보수개신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한 인물은 갈등과 분열을 더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말이라기보다는 폭력 그 자체입니다. 거의 모든 말 속에 폭력이 담겨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내가 죽을 기회를 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서 효과 있는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며 자살을 선동하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는 2019년에는 하나님도 자기에게 까불면 죽는다는 막말을 한 바도 있습니다. 그는 여러 교단에서 면직 및 제명을 당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부지법 폭동 사태 때에는 그 교회의 전도사라는 이가 법원 판사실의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구속된 일도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막힌 담을 허무시고, 둘로 나뉜 것을 하나 되게 하시는 평화의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폭언을 일삼고 폭행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보다 높이고, 폭력으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이 아닐 뿐 더러 그릇된 신앙입니다. 저는 결단코 그런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그릇된 신앙에 빠져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제사장과 바리새인의 모습에 가까울 뿐입니다.
2.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떠난 자
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참에 두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며칠 뒤 작은아들은 제 것을 챙겨 먼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지방에 크게 흉년까지 들어 작은아들은 아주 궁핍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는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얻어먹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아버지에게 사죄하고,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말해야겠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버젓이 건강하게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들 같았으면 크게 야단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처럼 그 아들에게 방황의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방황의 자유 끝에서 작은아들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지극히 작음과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극히 크심과 은혜였습니다. 그 깨달음이 작은아들로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늘 아들이 사라져간 길 끝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작은아들이 저 멀리에서 오는 것이 보였을 때, 아버지는 ‘드디어 돌아왔구나’하시며 그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 주셨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사죄하고 아들이 아니라 이제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나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종들은 주인의 명을 따랐고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작은아들이 떠났던 곳은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온전한 아들로 다시 맞아주신 것은 작은아들이 당신의 마음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잘못이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고하고 깊이 반성하는 자에게만 주님의 은총과 용서가 임하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종은 ‘아우님이 돌아오셨고, 주인께서 기뻐하시며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큰아들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위로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의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지금 아버지의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 있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동생의 존재와 아버지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사실 계속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늘 아버지의 마음 밖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과 몸이 모두 아버지의 집 안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큰아들은 이제 그 마음과 몸이 모두 아버지의 집 밖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작은아들보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훨씬 더 멀리 떠나 살았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3. 자기 우상화와 폭력
큰아들은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세계는 얼핏 보기에는 괜찮아 보입니다. 성실하고, 경건하고, 하나님과도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집, 성전 안에서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마음, 성전의 정신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스스로 제한하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집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자신이 정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지 못할 자로 정한 병자와 창기와 이방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하나님과 율법과 성전과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십계명 중 제 1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그 계명을 참으로 잘 지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자기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아래입니다. 자기가 중심이요 자기가 절대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우상화입니다. 자기 우상화에서 나오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폭력.
지난 화요일인 1월 21일에 미국 워싱턴 DC 성공회 대성당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예배가 있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행해온 미국 대통령 취임식의 일부 순서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리안 에드가 버드Mariann Edgar Budde 주교는 트럼프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됨을 지향해야 한다. 하나됨이란 차이를 포용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멸의 문화를 넘어서야 한다. 경멸의 문화는 우리를 파괴한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서로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이기도 하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됨의 기초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존중. 모든 인간은 고유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존중해야 한다. 둘째, 정직. 정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정직이 없다면 하나됨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셋째, 겸손. 자기는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이는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가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어질 때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된다.’ 설교 말미에 버드 주교는 이런 부탁도 트럼프에게 했습니다. “대통령께 부탁합니다. 부모가 추방될까 두려워하는 아이들, 전쟁과 박해로부터 도망쳐 온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자비와 환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나그네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버드 주교의 설교는 트럼프의 이기적인 자국중심주의, 배타주의, 폭력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잡으려는 예언자의 예언 선포처럼 들렸습니다. 그의 설교 중 나그네 됨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저에게는 가장 크게 와 닿았습니다. 버드 주교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 그 땅의 원주민이 아니라 이주민이기에 새로운 이주민에게 자비와 환대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나그네 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말이 쉽게 이기주의와 자기 우상화화에 빠져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인생입니다.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악악거리면서 살지만 우리는 잘 살아야 백 년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땅, 집, 지위, 힘, 우리의 몸 그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자기만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며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며 사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마음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마음에 다다른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 같은 나를 환대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나와 다른 이, 연약한 이를 존중하고 환대하고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자기 우상화에서 벗어나 덜 폭력적인 존재가 되고 너와 나 사이에 생명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