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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

김기석(2021-05-16)
듣기

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
히 4:14-16
(2021/05/16, 승천주일)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아픔의 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승천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상에 40일 동안 머무시다가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주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5월 중순, 만물이 싱스러운 계절입니다만 세상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입법이 되었지만 아직 시행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평택항 컨테이너 해체 작업 중 사망한 고 이선호 씨의 빈소에 들러 유족들을 위로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억울한 죽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런 몸짓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 누꿈해지는 것 같던 코로나19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거의 집단면역에 이르렀다며 마스크를 벗고 자축하던 이스라엘에서는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백신은 없는 것일까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격화되고 있고, 이스라엘 국적을 지닌 아랍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갈등이 도처에서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펠레스타인 평화협상이 또 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저절로 이해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마23:37)

혐오와 배제가 일상이 된 세계에서 진실의 불빛은 가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이들은 상대방을 타격할 더 날카로운 무기를 마련할 뿐, 그들이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찢기고 저리 나뉜 세상이기에 장벽철폐자인 주님이 더욱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아픔의 땅, 모순의 땅을 떠나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고요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일까요? 주님은 매정하게 우리 곁을 떠나 하늘의 평화를 누리며 우리에게 그리로 오라고 손짓하고 계신 것일까요?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늘에 오른다는 것
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를 통해 경험을 이해하고, 구별하고, 기억의 방에 배치합니다. 또한 자기 경험 혹은 이해를 너비, 높이, 깊이 등의 공간적 범주를 통해 분류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이 계신 공간에 대한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창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 세계를 지칭합니다. 땅은 사람들이 금을 그어 나누고 내 거니 네 거니 하고 싸우지만, 하늘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하늘은 여전히 하늘입니다. 우리가 사는 장소가 어디든 하늘은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세계에 돌입한 이들을 가리켜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을 몇 알고 있습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습니다(창5:22).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이 이야기는 그들이 공간 이동을 통해 다른 장소로 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크신 생명의 강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차원의 변화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에 높이 혹은 오름이라는 이미지에 기대곤 합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야곱은 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에 닿는 계단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깊은 접촉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올라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 올라 비로소 예수님의 신적 모습에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올라감‘의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육신 사건은 ‘내려옴’의 모티프를 사용합니다. 빌립보서는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한 모습에 주목합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심이야말로 구원의 신비입니다.

내려오신 분이 올리우신 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이 꼴 저 꼴 안 봐도 좋은 저 절대의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심으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고성쇠(榮枯盛衰)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꽃이 피고, 마르고, 채워 풍성하게 되고, 쇠해 줄어드는 일이 반복됩니다. 주님은 더 이상 그런 변화에 종속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우리 곁에 다가오십니다. 공간의 제약조차 넘어섭니다.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b). 주님의 이 약속은 주님이 하늘에 오르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위대한 대제사장
히브리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을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제사장은 머리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 입는 옷은 그들의 직무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소를 떠나거나 더럽히지 말아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을 바쳤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경계인입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분명히 대제사장의 직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서러운 이들의 아픔을 온 몸으로 부둥켜안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백성들 앞에 여실히 드러내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은 취약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기만 해도 위안을 받은 느낌이 드는데, 주님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주님과 만난 이들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가없는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대제사장인 까닭은 동물을 희생시킴으로 우리 죄를 씻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제물로 삼아 우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은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에 처하면 냉랭한 세상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거나 더 물어뜯으려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기에 지금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지만, 삶이 힘겹다, 절망스럽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없는 법입니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저는 잊기 어렵습니다. 영화는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마을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쿠르드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아윱은 소년 가장입니다. 어머니는 막내를 낳다 죽었고 아버지는 먹고 살기 위해 밀수에 나섰다가 지뢰를 밟고 죽었습니다. 그의 형 마디는 열다섯 살이지만 정신과 육체가 세 살 아기 상태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입니다. 마디는 때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아윱은 형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어른들을 따라 국경 밀수 행위에 가담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국경지대의 겨울 추위는 혹독해서 짐을 싣고 다니는 말들도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밀수꾼들은 말에게 술을 먹여 추위를 견디도록 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 따뜻함이 배어드는 것은 마디를 돌보기 위해 어린 가족들이 보여주는 훈훈한 사랑 때문입니다. 존재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마디이지만 아윱과 여동생 아마네는 한 번도 그를 귀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마네는 오빠에게 끝없이 입을 맞추고 말을 건넵니다. 오빠를 안고 다니며 시간에 맞춰 약을 먹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마디를 안고 부모의 무덤에 가서 비석을 붙잡고 신께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큰 누나 로진은 동생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나이 많은 남자에게 기꺼이 팔려갑니다.

이 영화는 절망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연약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이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아딧줄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셨기에 주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 사랑의 자장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외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구입니다. 그렇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 신분의 변화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3:12)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여 함부로, 무례하게 처신해도 괜찮다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우리의 무례함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거룩 앞에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16절은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 앞에 생략되었으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머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우리 속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 위함입니다. 그 뜻이 우리 속에 채워지면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뭔가를 채워달라고 하던 기도가 자기 비움을 위한 기도로 바뀌고, 사랑받기를 구하던 기도가 사랑에 무능력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로 바뀌고, 나의 영광을 구하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고, 평안을 구하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던 기도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로 바뀝니다.

이런 기도를 바치며 살 때 우리는 영적인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우리를 휘몰아치던 세상의 서슬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우리 속에 들어섰음을 알 게 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적절한 시간에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고통과 슬픔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연민에 삼키워졌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주님의 은혜의 보좌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늘에 오르신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 담대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식구가 되어 산다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요? 이 믿음으로 고통 많은 세상에 희망을 파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릴 때

김기석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릴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입하와 소만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떡갈나무 잎이 넓게 퍼지고 뻐꾹새와 꾀꼬리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올 때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는 시에서 “5월 7일 오전 9시 43분/올해 첫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다고 적었습니다. 청명한 대기를 울리는 꾀꼬리 울음소리는 아득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소리의 품 안에 안기고 또 안긴다고 말합니다. “번개처럼 귀밝히며/또한 천지를 환히 관통하는/이 세상 제일 밝은 光音, 새소리!” 숲길에서 만나는 새소리는 울울한 우리 마음을 말끔히 닦아내는 하늘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런 소리의 세계 속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런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주함에 포획된 채 허둥거리며 사느라 정작 귀한 시간을 낭비하곤 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하면서도 흔쾌히 즐겁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5월의 대지를 물들인 피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귀의 객이 된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만 23살이 갓 지난 이선호 씨의 때 이른 죽음이 참 가슴 아픕니다.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 해체 작업을 하다가 300kg이나 나가는 철판에 깔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후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기 전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잠시 구했던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치 그 죽음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아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아들의 전화번호를 ‘삶의 희망’이라고 입력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아들의 죽음을 어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 젊은이의 꿈이 그리고 한 가족의 희망이 그렇게 무너진 것입니다. 일터에서 집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어린이날에도 어버이날에도 일터에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한다 해도 한순간 방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다른 이들의 실수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 문제는 그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도 부족할 판입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율법도 그와 유사한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가 어떤 사람을 들이받아서 죽게 하였으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처형된 소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면 소의 주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에게 받는 버릇이 있는데, 그 임자가 남에게 경고를 받고도 단속하지 않아서 어떤 남자나 여자를 죽게 하였으면, 그 소만 돌로 쳐서 죽일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함께 죽여야 한다.”(출21:29) 위험을 알고도 방치한 사람에게 무겁게 책임을 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이 원하면 소 임자를 처형하는 대신 배상금을 물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놓거나,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출21:33)에는 구덩이의 임자가 짐승의 임자에게 배상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세세히 적시한 까닭은 강자들에 의해 약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기보다는 강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집행되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율법은 약자 보호가 하나님의 관심사임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과부, 고아, 채무자들은 친족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부모나 남편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도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약자의 보호자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출22:23).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그들이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책무입니다.



며칠 전부터 잠시 짬이 날 때 읽는 책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파시스트 정권과 나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당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지막 편지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짤막한 편지도 있고 긴 호흡으로 쓴 편지도 있지만, 처형을 며칠 혹은 몇 시간 앞두고 쓴 편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의를 따라 살다가 맞이하게 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남겨진 가족들이 겪을 상실의 고통을 염려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은 41세의 가구공인 피에트로 베네데티의 편지입니다. 젊어서부터 낡은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해왔던 그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긴 호흡의 편지를 썼습니다. 특별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아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슬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겨질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합니다.



“내 사랑이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 주렴. 그리고 네 엄마를 사랑해 드리려무나. 내 빈자리를 너희들의 사랑으로 채워 다오. 공부와 일을 사랑하렴. 정직한 인생은 살아 있는 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란다. 인류애를 신조로 삼고 너희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결핍에 항상 신경 쓰렴. 자유를 사랑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이 안녕은 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혹은 누군가가 목숨을 바친 대가로 이뤄진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저들의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모국을 사랑하되, 진정한 조국은 전 세계이며, 어디에나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너희들의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렴.”(피에로 말베치·조반니 피렐리 엮음,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 임희연 옮김, OLDBEN, p.92-93)



아직은 세상 물정을 다 알기 어려운 나이의 아이들이 그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임을 잊지 말라는 말, 파시스트들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마치 피울음처럼 들립니다. 단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는 것처럼 자기가 하려 했던 일의 의미를 밝힙니다.

“인류에게 가해진 이 끔찍한 모욕을 견디고 지금의 슬픈 현실보다는 우리가 누려 보지 못한 더 아름답고 더 좋은 미래를 그들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그 미래는 곧 실현될 거야. 어찌 되었건 나는 사람, 사물 할 것 없이 전부 파괴하는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질 거야. 나는 내 아이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꽁무니를 빼는 겁쟁이가 아닌, 의무의 호소에 응답하다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앞의 책, p.96)



그는 인류에게 가해진 끔찍한 모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려 하지 않고 거기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켜 결국 더 나은 세상의 꿈이 영글게 하려 했기에 떳떳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겁쟁이가 아니라 용감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가 견지한 단호한 입장은 소시민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우리 삶에 큰 도전이 됩니다. 지금도 인류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모욕이 세상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삽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11:3)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다가도 문득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의인은 가려내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곧 희망입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됩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상황이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명랑하고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는 일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사랑의 범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백신 접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도우심이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1년 5월 1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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