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 없는 사랑
김기석(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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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없는 사랑
요 12:1-8
(2025/04/06, 사순절 제5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순례 여정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전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사건이 일단 일단락되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도 있고, 깊은 시름에 잠긴 이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우리 스스로를 성찰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의 꿈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폭풍의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폭풍이 남긴 잔재들을 치우며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드리웠던 분열과 갈등의 어둠을 빛으로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의 몸으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물어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서로를 응시하던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이웃으로 대해야 합니다.
프란체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평화의 기도’가 자꾸 입가에 맴돕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도입부에 이어지는 내용은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믿음의 사람은 세상 논리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대지에 새로운 가치를 심고 거두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산불 현장에서 모두가 넋을 놓고 있을 때, 밭에 엎드려 마늘을 수확하는 어느 할머니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절망에 몸을 맡기지 않고 일상을 건강하게 살아내려는 검질긴 마음이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삶의 자리가 척박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이들의 책임이 막중한 시대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다정함의 씨를 심어 화해와 일치와 평화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 사랑엔 낭비가 없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기대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값비싼 나드 향유 한 근(1리트라=327그램)을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다 기록한 것을 보면 초기 교인들이 이 사건이 얼마나 놀랍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에 집에서 무명의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14:3-9, 마26:6-13).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다고 전합니다(눅7:36-50). 오랫동안 사람들은 ‘죄인인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로 특정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든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교수님이 김남조 시인을 특강 강사로 초대했습니다. 50대 초반의 시인은 단아한 옷차림이었고, 작고 차분한 음성으로 당신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미 그분의 시집 몇 권을 읽었던 저는 시종 설레는 마음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기 일생의 시적 목표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에서 시인은 그 여인을 가리켜 “일곱번의 일곱갑절/남자를 사랑해, 끝내 한사람의 영혼과도 못 만난 여자/어둡고 더 추워서/누구와도 다르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탕약보다도 졸아든 평생의 죄를’ 안고 살았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안아 주시던 주님과의 접촉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그 여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싶어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여인의 행위가 못마땅했습니다.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 수 있는데 왜 그런 낭비를 하느냐고 불퉁거립니다. 다른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우리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효율성과 실용성을 따지는 이들에게 사랑과 헌신과 사랑의 행위는 낭비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실용성과 효율성에 따라 배치하고 사용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게 마련입니다. 우정과 사랑을 위한 시간은 낭비처럼 보이지만 우리 삶의 든든한 기초입니다. 사랑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과 벗들의 낭비하는 사랑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낭비하는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슬픔과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의 사랑 또한 낭비하는 사랑입니다. 낭비하는 사랑은 쓸데 없는 낭비가 아닙니다. 사랑엔 낭비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김남조 시인은 인생의 말년에 쓴 ‘낭비 없는 사랑’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엔 낭비가 없다
더 많이 주었다면
그 풍요로 이미 보상받았다
그 사람 있었기에
불 꺼진 한 세월이 밝고 따뜻했다고
그리 알 일이다
사랑엔 계산법이 없고
순수와 관용이라는
열쇠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시인이 평생이 시적 목표로 삼았던 마리아의 마음이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에는 계산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월을 견디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감정까지 낭비한 누군가 덕분이 아닌가요? 시인은 그 사람 덕분에 ‘불 꺼진 한 세월이 밝고 따뜻했다고/그리 알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사랑으로 대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그 사람도 우리 삶을 밝힌 등불입니다. 지금 우리도 누군가의 한 세월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누군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 도움이 절실한 순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글들을 모은 책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에는 그의 인생 앞에 밝혀졌던 등불과도 같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뿐!’이라는 글은 그가 청소년 시기에 겪은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반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잘생기고, 재능이 뛰어나고, 똑똑하고, 성실하고, 품행이 단정해서 누가 보더라도 미래가 촉망되는 친구였습니다. 한 가지 단점은 너무 고상하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점심 무렵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대형 금융회사 대표였던 그의 아버지가 사기죄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3주가 지난 후였습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는 수업 시간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 나가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고립을 깨뜨리기 어려워서 친구들은 다가서지도 못했고, 크게 떠들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먼저 용기를 내서 친구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의 자리는 다시 비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면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 그를 저버리고 만 것은 공감 부족이나 무관심, 못된 의도가 아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인 것 같다.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슈테판 츠바이크,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배명자 옮김, 다산초당, p..32-33)
∎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그에게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사랑이고 공감입니다. 그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절실한 사람에게 다가서셨고, 주춤거리며 다가오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정결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분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누구나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받아들여짐의 경험이야말로 구원의 경험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예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것입니다. 투덜거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요 12:7-8)
‘그대로 두어라’라는 말은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여기 사용된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가 홀로 있을 수 있게 간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도덕적 잣대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낭비의 기억이 어쩌면 마리아의 남은 생을 밝혀줄 빛이 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바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자기를 온전히 바쳐 사랑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매정한 말씀이 아닙니다. 흘러넘치는 사랑의 기억을 간직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 시간의 엄중함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습니다. 그 시간, 집안을 가득 채웠던 향기의 기억은 오랫동안 제자들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악취를 남긴 죽음이 아니라 향기를 머금은 사건입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향기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큰일을 하지 못한다고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마더 테레사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We cannot all do great things, but we can do small things with great love)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일은 향기를 남깁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혼신의 힘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이들의 헌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혼신의 힘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낳기 위한 진통이 자못 심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 꿈을 가슴에 품고 척박한 대지 위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