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과 틀린 것 사이에서
김재흥(202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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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은 요한을 잡아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헤롯이 자기와 형제간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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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린 것을 틀린 것인 줄 모르고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주중에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서소문에서 공사 중이던 철로 위 고가의 상판이 붕괴되면서 세 분이 사망했습니다. 새벽에 작업자들이 고가를 떠받치고 있던 대들보가 2.9센티미터 가라앉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낮에 관계자들이 가라앉은 부분을 살피기 위해 비계 위로 올라갔는데 그때 상판이 무너지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고 후 한 전문가는 이미 균열이 발생해 위험한 상태였는데 별도의 대비 없이 비계 위에 올라간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들보가 가라앉은 것을 발견한 이후에도 철도차량들이 계속 오가며 균열이 더욱 커졌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들보가 가라앉은 것을 발견한 이후에도 철도 운행을 차단하지 않고 166대의 철도차량들이 계속 고가 아래 철로를 오가게 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세 분이 돌아가신 것 자체도 큰 사고지만 더 큰 대형사고가 될 뻔했습니다. 위험을 위험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한 커피 전문점과 그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기업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 커피 전문점에서 판매한 제품의 이름과 홍보문구와 판매날짜가 문제였습니다. 많은 국민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문구와 날짜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에서는 4단계의 점검과정을 거쳤음에도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문제를 지적받은 이후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업의 회장은 사과문에서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말은 “이번에 우리가 행한 일은 많은 다른 생각 중 하나의 다른 생각이었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번 일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것을 위험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할 때, 틀린 것을 틀린 것으로 인지하지 못할 때 무너지지 말아야 할 것이 무너지고 죽지 말아야 할 생명이 죽고 공동체가 지켜온 고귀한 가치가 손상당합니다.
2. 헤롯 안티파스와 요한
오늘은 여러분과 헤롯 안티파스와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비슷한 이름이 반복되는 헤롯왕가의 이야기라 조금 헷갈릴 수도 있으니 집중해서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헤롯 대왕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혼자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렸지만, 그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헤롯의 아들들이 분할통치를 했습니다. 그 왕들을 분봉왕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 파사엘리스와 결혼했습니다. 국가안정을 위해 이웃 왕가와 결혼하는 정략결혼이었지요. 그런데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이복형제인 헤롯2세의 아내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부인인 파사엘리스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둘 다 이미 결혼을 하여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재혼을 한 것인데, 율법에서는 이런 결혼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결혼을 ‘옳지 않다’라고 여러 번 지적했습니다. 목숨을 건 지적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안티파스는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지만 세례 요한을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예언자였기 때문이며, 헤롯 안티파스 본인도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여겨 요한의 말을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달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세례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은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롯의 생일잔치 자리였습니다. 많은 고관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함께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잔치에 흥을 한껏 돋우었습니다. 헤롯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딸에게 끔찍한 소원을 말하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주세요.”
물론 안티파스에게도 세례 요한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은 견뎌야 하는 불편이었지 넘으면 안 되는 불편이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남편이 넘지 못하던 선을 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헤로디아의 딸에게 주어졌습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희생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그저 한 사람이 아니었고 세례 요한의 주장은 그저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의롭고 성스럽게 살았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면서 “저가 메시아가 아닐까”(눅3:15)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은 참된 삶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그 기준을 무시하고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안티파스의 본부인인 파사엘리스의 아버지 나바테아의 왕은 안티파스를 공격했고 안티파스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더 많은 권력을 탐했습니다. 로마의 황제인 칼리굴라에게 자신을 분봉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역자로 몰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제국의 변방으로 유배 가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지켜야 할 기준을 지키지 않고 무시한 자의 삶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하였습니다.
3. 다른 것과 틀린 것 사이에서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회는 유독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것을 틀리는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위험한 것, 제거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분단의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였는데 그 수는 약 300만 명에 이릅니다. 그 상처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름을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나 더 넓은 세계로의 확장으로 경험할 수 있는 여유와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도 그런 아픔은 있었습니다. 같은 예수를 믿지만 17세기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30년 간 전쟁을 벌여 서로를 죽였는데 그 수는 약 800만 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것’도 있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인정하면 되지만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정말 잘 구분해야 합니다. 다른 것인지 틀린 것인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위험한 것인지 위험하지 않은 것인지, 대립되는 명제 중 바른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른 삶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살아온 배경, 문화, 자신이 속한 나라의 역사, 인종, 성별, 나이 등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철학자들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기준을 주장했습니다. 근대철학의 대표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과 보편 도덕’이 바른 삶의 기준이라고 말했고, 공리주의자인 제러미 벤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바른 삶의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仁인, 어짐을 말했는데 이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노자는 無爲무위, 억지로 하지 않음을 말했는데 이는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의미가 있고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바른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의 기준이 우리의 기준이어야겠지요. 먼저 예수님께서 ‘그릇된 것’으로 여기신 것들을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위선자들, 눈 먼 인도자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 독사의 새끼들. 겉으로는 좋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 권리를 누리려 할 뿐 의무는 저버린 자, 돈을 중히 여기고 신의를 가볍게 여기는 자, 좋은 말만 있고 바른 삶은 없는 자. 그런 자로 사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옳은 것’으로 여기신 것을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소위 ‘최후의 심판’ 말씀인데 그 말씀을 보면 주린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를 마시우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아 주고, 갇힌 자를 찾아가 주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곧, 버림과 냉대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귀히 여겨 그들을 내 몸과 같이 돌보아주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옳은 것’과 ‘틀린 것’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틀린 것’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며 내가 틀릴 수도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소문 고가차도 공사현장 관계자가 비계 위에 올라서기 전에 ‘이 비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닐까?’ 한 번 더 생각했다면, 그 커피 전문점 마케팅 팀이 작업을 하면서 ‘이 문구가 틀린 것은 아닐까?’ 한 번 더 생각했다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저는 이 말씀을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워진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하나만을 붙들고 그것에서 흔들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서 먼 것입니다.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 생각되면 힘들고 어려워도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 끝이 그때그때 계속 흔들리면서 북극과 남극을 찾아 가리키듯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옳은 쪽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그릇된 기준을 버리고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할 때 이 세상은 보다 천국에 가까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예수님 안에서 진실하게 흔들리며 바른 길을 찾아가는 청파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