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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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장영숙전도사



결정적 순간

김기석(2019/05/19)
듣기

결정적 순간
행26:12-18
(2019/05/19, 부활절 제5주)

["한번은 내가 이런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임금님, 나는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자의 당당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제는 5.18 민주화 항쟁 39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항쟁의 의미를 폄훼하고 왜곡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해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청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통해 접하는 청년 계층의 현실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가 큽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미래의 삶을 기획할 단초조차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참 암담한 일입니다.

동구권이 해체되고 소위 말하는 세계화가 진행된 이후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중심의 상실, 공유된 가치에 대한 믿음의 붕괴로 인해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외로움, 괴로움, 고단함, 억울함이 증대되면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거칠어졌습니다. 레기온 귀신에 사로잡힌 돼지 떼가 비탈길을 내리달아 물속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어쩌면 이미 그런 길에 접어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지금 적나라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투덜거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는 만무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막연히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작하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소설가 이승우 선생에게서 그가 ‘서자의 당당함’이라고 명명한 삶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그가 말하는 서자들은 승자독식사회에서 뒤쳐진 이들, 중심이 아니라 변방으로 내몰린 이들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내세울만한 스펙도 없고, 직장도 번듯하지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없는 이들은 괜히 주눅 들어 지내기 쉽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하여 행복하게 살 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우 선생이 말하는 서자의 당당함이란 적자(嫡子, 정실 자식)들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 인생을 살아내려고 어깨를 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가치 기준을 따라 가느라 허덕이지 않고, 자기 보폭과 리듬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내는 것 말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우리 삶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날마다 시간마다 삶이 제기하는 질문 앞에 서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삶이란 결국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바른 대답을 찾아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고, 삶이 각 개인에게 끊임없이 부과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Viktor E. Frankl, , Washington Square Press, 1984, p.98)

빅터 프랭클은 그 잔인한 나치의 수용소에서도 인간적인 품격을 보여준 이들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여퉈두었던 빵 조각을 배고픈 이들에게 건네곤 했습니다. 프랭클은 그들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불의한 체제는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다 앗아갈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처지에서든 자기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p.86). 내 삶을 망칠 수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라는 말일 겁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삶이 우리에게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입니다.

∙바울의 회심 체험
우리가 다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극적으로 삶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그 극적인 순간에 대한 증언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9장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서술이고, 22장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당한 바울이 소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의 경험을 증언한 것이고, 26장은 황제에게 상소하여 재판을 기다리던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증언입니다.

새롭게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를 만나려고 가이사랴에 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총독과 담소를 나누던 중에 총독이 바울에 대한 고발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으니 그를 로마로 보내야 하는데 공문서에 기록할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자 베스도가 일종의 청문회를 열고는 바울을 이끌어냈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고 말하자 바울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내력을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엄격한 바리새파 전통을 따라 살았다는 이야기,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이야기,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벌어진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과 일행이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고 있을 때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그들을 둘러 비추었고, 그들은 모두 신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땅에 엎어졌는데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놀란 바울이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빛 속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인하여 겪는 제자들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주변화된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의 지혜 전통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잠14:31)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지킬 힘이 없거나, 그들의 편에 서 줄 사람이 없다고 하여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려야 할 몫을 가로채서 제 배를 불리거나, 그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만들어 가난을 영속화하는 일을 하나님은 못 본 척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는 성육신 신학의 심오한 의미를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히4:15)라는 말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예수님과 무관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마태복음의 증언도 똑같은 내용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주님은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권 선생님이 어느 날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기차를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테니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황송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권정생은 자리에 앉아 무심코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여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금방 반색을 하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데 한 십 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습니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흘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했습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를 마친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덧보탰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1997년 1월 15일, p.116-7)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마음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요? 옳고 그름을 식별할 정도의 분별력만 있다면 복잡한 신학 이론은 굳이 몰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신학 이론의 부재가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려는 의지와 열정의 결여가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 바울이 만난 것은 주님의 그런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에 복무하기 위해 일하다가 겪는 어려움은 고통이지만, 다른 이들의 생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자초하는 어려움은 고난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 고난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소명을 받들다
구원의 또 다른 신비는 박해자를 변화시켜 고난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일종의 단절입니다. 지진이 일어나 단층이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의 사건을 가리켜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을 찬송가 436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 없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436장).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렇게 우리에게 발현됩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이르십니다. “자,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행26:16). 저는 믿음의 사람을 가리켜 ‘일어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절망의 자리를 딛고 일어선 사람,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지 않고 벌떡 일어나 악과 맞서 싸우는 사람 말입니다. 주님이 ‘일어나서, 발을 디고 서라’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으로 일어선 사람들은 주님의 일꾼이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신 까닭은 그를 통해 하실 일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행26:18).

한 사람을 어둠 가운데서 건져 빛으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제멋대로 살던 이들을 초대해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무리에 합류시키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는 절망의 강, 탄식의 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 그리고 희망의 강에 뛰어든 사람들입니다. 희망은 어딘가에서 찾아야 할 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해야 할 가치입니다.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때 세상은 달라집니다. 청년 바울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 나라의 일꾼과 증인으로 삼으신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과 우리 교우들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서 이루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파밀리아 데이

김기석

파밀리아 데이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마12:49) 하신 주님,

날마다 주님의 가족이 된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고 해산의 수고를 다 하겠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몸으로 삼아주십시오. 아멘.



어머니를 상기할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느낌은 따스함과 고요함이다. 엔도 슈사쿠가 <깊은 강>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는 바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머니의 따스함뿐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 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보아 주시던 따스함!“ 엔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따스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말한다.



시인 정호승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에서 늙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시인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을 차마 옛날처럼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벽에 쾅쾅 박지 못하고, 헝겊으로 닦아놓는 까닭은 그 못이 아버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 드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아무리 펴려고 해보아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구부러진 못이 되었다“(<못> 부분).



가족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의 총량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잔하다. 구부러진 아버지의 등은 어쩌면 가족들을 위해 그가 평생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헌신의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무엇이길래 부모들은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는 것일까? 어떤 이는 가정을 ‘둥지’ 혹은 ‘품’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가정은 세상살이에 지친 그를 품어주고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해독해주는 곳이다. 반면 가정을 ‘감옥’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이 쉼 없이 울려 퍼지는 가정은 벗어나고픈 질곡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예수님도 가정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혼인을 부정하지 않았다. 주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새롭게 탄생하는 가정을 축복하셨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잔치의 흥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정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가두는 차꼬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으셨다. 역사 변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내 자식은 그 일에 끼지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주님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어느 제자의 요청에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눅9:60) 하고 말씀하셨다. 너무 매정한 말씀처럼 들린다. 심지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마10:37)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사실 가정은 우리를 사사로운 정리와 인정에 묶어두어 보편적인 가치나 공공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집을 떠나셨다. 유대사회에서 그것은 부덕한 행위였다. 주님은 한 집안의 장남이셨고,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 해 가족들을 건사할 책임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에까지 이르렀으니, 가족 모두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들은 주님이 계신 집 안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사람들이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12:46-50)



주님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다.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주님은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탈영토화’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재영토화’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셈이다.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는 주님의 그런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 위험에 처한 사람들, 난민이 되어 떠도는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가슴에 자존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은 ‘파밀리아 데이Familia Dei‘ 곧 하나님의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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