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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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장영숙전도사



어떤 목소리에 반응하는가

김기석(2019/03/17)
듣기

어떤 목소리에 반응하는가?
요10:22-30
(2019/03/17, 사순절 제2주)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 ‘대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증오와 폭력이 끊이지 않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증오 범죄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이들에게도 주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권력형 성 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못한 채 인기를 얻은 이들의 악마적인 행태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악한 이들이 힘을 얻는 것은 선한 이들의 침묵 때문입니다. 다시는 억울하고 참담한 고통 속에 숨어지내는 이들이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을 정화하는 성도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의 사랑에다 우리를 통째로 바치는 것이 욕정에 맡기는 것보다 월등 나은 줄을 빤히 보면서도 세상의 즐거움이 우리를 확고히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마음으로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또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죄악의 법이란 습관의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즉 마음은 습관에 이끌리면서 그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으며 빠져든다는 것입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2년 12월 25일, 8권 5장, p.203)

사순절에는 이런 습관의 폭력과 결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죄의 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참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병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 귀신 들려 삶이 파괴되었던 사람들, 억압과 천대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와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당시의 성전 체제는 그들을 부정한 존재로 분류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다만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자기들의 아프고 시린 마음을 조금의 유보도 없이 헤아리시고, 정죄하기보다는 따뜻하게 감싸 안는 예수님에게서 그들은 하늘을 느꼈습니다.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아픔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53:4-5)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됩니다. 주님은 세상을 대신 앓으셨고, 세상의 모든 죄의 무게를 당신의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카산드로의 시간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드러내신 이후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 양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기꺼이 위험을 떠맡으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누구도 강요한 바 없지만 주님이 그 길을 걷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낯선 존재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곤 합니다. 우리는 7-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던 투사들을 압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인간 영혼의 연약함 뒤에 숨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이들도 있지만, 평생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폭력 앞에서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 낯선 존재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 곧 성전 봉헌절에 예수님은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이 날은 마카베오 가문이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전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성전의 등을 밝힐 기름이 하룻밤 분량밖에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기름을 찾아서 채우기까지 8일 동안 성전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봉헌절을 ‘빛의 절기’로 지켰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요10:24)

그들의 궁금증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실속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참된 말을 해줘도 믿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강화해주는 말만 경청합니다. 자기들의 생각의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말은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공격합니다. 참된 말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 서사시에 등장하는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던 여인입니다.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면서주 사랑을 구했지만 카산드라는 그 청을 뿌리쳤습니다. 아폴론은 신이기 때문에 늙거나 죽지 않지만, 자기는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름답지만 늙어 모습이 추해지면 아폴론이 자기를 버릴 것임을 알았기에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화가 난 아폴론은 카산드라를 저주했습니다. 그 저주는 카산드라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카산드로는 헬라스 군이 성 밖에 놓아두었던 목마를 트로이 성으로 끌어들이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결국 그 목마에서 쏟아져 나온 헬라스 군대에 의해 트로이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카산드로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
주님은 당신의 정체를 분명히 말하여 달라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서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요10:2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통해 드러나는 사건들이 곧 당신의 존재를 말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마케루스(Machaerus) 산성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11:3) 하고 물었을 때 주님이 뭐라 답하셨습니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11:4-6)

주님이 계신 곳에서 생명의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뭔가에 짓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던 사람들이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들이 곧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한 이들은 그런 이적들을 보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10:26-27)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까?“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유튜브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입니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나 이미지입니까? 우리는 어떤 목소리에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데올로기, 사람, 돈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예언자들의 눈으로, 또 성서를 통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다른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편을 가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다 달아올랐습니다. 그런 말들은 우리 죄된 본성을 자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 가려 듣기
최근에 알게 된 앱이 하나 있습니다. 전부터 그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오래 전부터 이미 나와 있었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겁니다. 카페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참 좋은데, 작곡자나 제목을 알 수 없어 답답했던 경우 말입니다. 음악회에 갔다가 연주자가 앵콜곡으로 연주하는 곡이 그날 연주한 다른 어떤 곡보다 가슴을 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을 때면 좀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려받은 그 앱은 선율을 조금만 듣고도 작곡자, 제목, 심지어는 연주자까지 알려줍니다. 갑자기 다른 세상이 열린 기분입니다. 개안 수술을 받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삯꾼의 뒤를 따르다가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주님의 말씀을 가려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주님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설교자들의 선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이웃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말이 넘치는 시대에 주님의 말씀을 가려 듣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건 어떤 앱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조심스럽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 말들을 잘 가려들어야 합니다.

▶ 주님은 악에게 순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악에 저항하되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 주님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제하고 경멸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이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의 벗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 주님은 재물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 주님은 높아지기 위해 어떤 수를 써도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으뜸이 되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은 원수를 미워하거나 자기 유익이나 쾌락을 위해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 주님은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장식된 성전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강도의 굴혈로 변한 성전을 채찍으로 정화하셨습니다.
▶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저 높은 하늘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셨습니다.
▶ 주님은 부유하게 살던 부자가 아니라, 그의 문간에서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던 나사로가 낙원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에 되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주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는 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면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주님의 말씀을 곱씹고 곱씹으면서 우리 삶을 그 기준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비결입니다. 그런 삶의 결과가 영생입니다. 주님은 그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유보다도 크신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봉헌절에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봉헌절은 ‘빛의 절기’라고도 부릅니다. 주님이야말로 ‘꺼지지 않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백성이 아닙니다. 빛의 백성입니다. 사순절 순례길을 걷는 동안 우리 몸과 마음이 주님의 음성에 깊이 반응할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길을 걷는 기쁨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라

김기석

습관의 폭력에서 벗어나라



봄까치꽃의 개화와 더불어 시작된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다. 산수유나무와 생강나무에 피어난 노란 꽃이 사위를 환히 밝히고, 매화나무에 돋아난 흰 꽃이 어두운 세태를 무색하게 한다. 참 좋은 계절, 우리는 재계의 시간을 보낸다. 사순절은 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삶을 근본에서부터 돌아보라는 일종의 초대이다.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자의 증오 범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다. 인간은 누구도 타자의 ‘있음’을 무화시켜서는 안 된다. 어느 종교를 신봉하든 그들의 있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의지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권력형 성범죄가 벌어지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권력기관들이 공모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배우지 못한 채 인기라는 거품 속에 갇힌 이들이 저지른 성 범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낄낄낄 웃으며 도섭을 부릴 때, 모멸감에 몸서리치며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의 고통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생각조차 없다. 칸트는 희생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상상력을 가리켜 ‘확장된 심성’이라 했다. 그런 심성을 잃는 순간 인간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 한다. 삶의 내실이 부족해도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면 흐뭇해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우리의 의지는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번번이 꺾이곤 한다. 옳음보다 이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때 삶은 누추해지기 시작한다. 성 어거스틴은 정결한 삶을 살고 싶어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까닭은 원수가 우리 의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로 인해 의지가 왜곡되면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제어하지 않은 채 계속 따르다보면 버릇이 생기고, 그 버릇에 저항하지 못하면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영혼의 고질병은 그렇게 우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다.



사순절에는 ‘습관의 폭력’과 결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경건의 표징으로 여기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의 훈련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기도가 깊어지면 ‘나 좋을 대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될 꿈을 품게 된다. 금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제어하는 훈련이다. 탐식을 제어함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편리함에 중독된 우리 삶을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화석 연료 시대의 종언이 예고되고 있는 이 시대에 탄소 소비를 줄이고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다. 구제는 이런저런 형태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을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일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 소중한 것을 나눌 때 그 물질은 정신으로 바뀐다.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이 앓고 있다. 병든 세상을 보며 하나님도 아파하신다. 하나님을 안다고 장담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하나님은 어둠 속에 계신 듯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인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논둠’(nondum은 라틴어로 ‘아직은 아니다’라는 뜻)이라는 시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영혼의 갈급함을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게 선물을 드려야 할지,/어디에서 신을 벗고 당신을 찾아야 하는지를.”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 서 있었던 모세는 행복한 사람이다. 신을 벗어야 할 장소가 명확했으니 말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신념들 때문에 서로 다투고, 군대가 깃발을 휘날리며 대적하고, 연민이 피를 흘리고, 진리가 갈대밭에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느라 지쳤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더 갈급한 마음으로 한 말씀을 기다린다. 놀란 아기의 볼에 기쁨의 보조개가 피어나게 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말처럼, 우리 영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말씀 말이다.



‘비어 있음‘이 곧 그릇의 쓸모를 형성하듯 우리 마음을 자꾸 비워 맑게 유지할 때 그 말씀이 다가온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지 않던가? 사순절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우리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온갖 소리와 거짓 정보들을 비워내고 하늘의 숨을 깊게 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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