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나아가다 빛이 되다
김재흥(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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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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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림과 어둠과 빛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예배 시작할 때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대림待臨은 기다릴 대待에 임할 임臨입니다. 임하심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어둠과 죽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과 생명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의 시작이 대림절기로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이 존재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대학입학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수험생일 것이고, 제대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군인일 것이며,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예비 아빠와 엄마일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대림절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번 대림절을 보내며 우리의 그릇된 기다림을 내려놓고,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요즘 어둠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어둠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지금 동지를 향해 가면서 점점 밤이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창조 이전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했을 때와 같은 어둠이 이 세계와 이 시대와 이 사회와 너와 나 사이에 가득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우리 가까운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와 우리의 모든 것을 잠식해 버립니다. 그럴 때면, 우리의 마음은 이내 어두워지고,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삶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라 벌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그럴 때면 물리학자인 김상욱 박사가 한 말을 떠올리곤 합니다. “밝은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두운 것이 당연한 것이다. 우주의 평균적인 모습은 어둠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빛과 낮을 당연한 것으로, 우주의 평균적인 모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체 발광하는 태양이라는 별에 유난히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를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검은 바탕에 별들이 하얀 점처럼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빛보다 어둠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그 모습이 우주의 평균적 모습입니다. 그런 우주의 모습을 떠올리면 ‘본디 삶은 어두운 것이구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일반값이구나. 내가 지금 만난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의연하게 대면해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상욱 박사는 별빛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점처럼 작은 별의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아주 어두운 공간을 가냘프게 달려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별빛에 대한 과학적 표현인데 시적으로 들리지요? 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찡해지더군요. 어둠이 일반값인 우주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빛이 되어 달려오시는 주님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2. 빛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그렇게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빛이 되어 달려오시는 주님을 있던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고 마중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 사람들이 나옵니다. 동방에 살던 박사들은 별을 관찰하던 중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아, 메시아가 곧 탄생하겠구나’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메시아에게 찾아가 경배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먼 여행길에 오릅니다. 별을 따라 여행하던 박사들은 유대땅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탄생할 마을이 어디인지를 물었고, 미가 예언자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 예언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그들이 전에 보았던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다시 나타나 한 집을 비추었습니다. 박사들은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연 그곳에는 아기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칼뱅에 의하면 황금은 예수님이 참된 왕으로 태어나셨음을 드러내는 예물이고, 유향은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제사 때 사용했던 유향처럼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시는 분으로 사실 것을 드러내는 예물이며, 몰약은 왕의 장례에 쓰이는 몰약으로 예수님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일을 다 하시고 왕으로 돌아가실 것을 드러내는 예물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단순한 경배자가 아니라 메시아의 삶을 예언한 예언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동방박사들이 몇 명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예물이 세 개였기에 세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입니다. 그런데 러시아 정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 네 번째 동방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오늘은 폴란드 태생의 작가 에드자르트 샤퍼가 쓴 <네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동방의 작은 영지의 영주였던 알타반은 메시아 탄생을 알리는 별을 발견하고는 그 메시아에게 경배하기 위해 아마포와 고급 모피와 사금가루를 예물로 챙겨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도중에 마굿간에서 출산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기와 여인을 모른 채 할 수 없어서 사금가루를 조금 덜어 주었고 아마포도 조금 잘라주었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감독관이 채찍으로 노예를 죽일 듯 때리는 것을 보고는 많은 사금을 주고는 노예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몇 명의 나병 환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곪아터진 환부를 보고는 마음이 아파 자신이 가진 아마포를 내어주었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강도에게 죽도록 맞고 옷도 모두 빼앗긴 사람을 만났는데 알타반은 그를 치료해 주고 그에게 아마포와 가죽모피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그는 메시아를 만나면 드리려고 했던 예물을 모두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거지신세가 된 알타반은 노예로 팔려가는 과부의 아들을 대신해서 노예가 되어 30년 동안 갤리선 바닥에서 노를 졌다가 풀려납니다. 노인이 된 알타반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메시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메시아에게 드릴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던 알타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 아래 누이며 메시아에게 이렇게 청하고는 숨을 거둡니다. “주여, 나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3. 빛을 향해 나아가다 빛이 되다
시인 황지우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다리면 언젠가 우리는 그에게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빛을 간절히 기다리면 우리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고, 또 그 빛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그 빛을 마음에 담게 되고, 또 빛을 마음에 담으면 결국 우리는 그 빛을 닮아가 내가 빛이 되어 결국 빛을 만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였습니다. 빛을 기다리며 살다가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빛을 향해 나아가다가 빛이 된 사람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이야기.
제가 2022년에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입니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라 한낮에 볕이 너무 뜨거워 순례자들은 그 뜨거운 볕을 조금이도 더 피하고자 새벽에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자주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걷다보면 별이 보입니다. 별을 보며 걷는 길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스페인은 하늘이 맑아 별이 반짝반짝 잘 보입니다. 순례 후반부에 오세이브로라는 해발고도 1300미터가 넘는 곳에서 이탈리아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고 일정상 혼자 새벽 일찍 출발해 걸을 때였습니다. 깜깜했습니다. 핸드폰 라이트를 켤까 하다가 어둠 속을 그냥 걸어보았습니다. 흐릿하지만 길이 보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검은 하늘에 별이 가득했습니다. 달도 없는 새벽이었지만 많은 별이 모이니 길이 보였습니다. 그 고마운 많은 별이 고마운 얼굴들과 겹쳐보였습니다.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나를 가족처럼 대해준 이탈리아 친구들뿐 아니라 내 인생에 빛과 온기가 되어주기 위해 어둠을 뚫고 찾아와준 별과 같은 얼굴들이 새벽하늘에 떠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걸어온 인생이었음을 가슴 뻐근하게 고맙게 느꼈습니다. 노년에 이른 바울이 기독교의 핵심을 서술한 로마서의 마지막 장 16장 전체를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운 것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대림절은 단순히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다가 우리 자신이 빛이 되어가야 하는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이 되어주셨던 것과 같이 우리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 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할 생명과 평화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귀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