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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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라

김기석(2020/01/26)
듣기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라
신28:9-14
(2020/01/26, 주현 후 제3주)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만 걸으면,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당신들을 자기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께서 당신들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고, 당신들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주시겠다고 당신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이 땅에서, 당신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땅의 소출을 풍성하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풍성한 보물 창고 하늘을 여시고, 철을 따라서 당신들 밭에 비를 내려 주시고,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하는 바,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진심으로 지키면,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으시며, 당신들을 오직 위에만 있게 하고, 아래에 있게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들은, 좌로든지 우로든지,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씀을 벗어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섬기지 마십시오.]

∙에발산에 세워진 큰 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한 폐렴의 확산으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질병이 세계에 큰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안간힘을 다하여 질병의 확산을 막아내려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더해주시기를 빕니다. 여러 복잡한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가까운 이들과 친밀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새해 덕담들 나누셨는지요? 도종환 시인은 ‘덕담’이라는 시에서 “새해 첫날 아침 우리는 잠시 많은 것을 덮어두고/푸근하고 편안한 말씀만을 나누어야 하는데/아직은 걱정스런 말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올해도 새해 첫날 아침/절망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시를 읽은 반칠환 시인은 푸근한 덕담으로 감상을 갈음합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뽀드득 뽀드득 눈길 지나 봄길 걸음, 풀 내음 맡고 단풍비 내리도록 달 같은 임, 해 같은 벗들 만나십시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남의 눈에 꽃으로 보이고 잎으로 보이며, 무병 무탈하고 운수 대통하십시오.”(반칠환, <뉘도 모를 한때>, 종려나무, p.151) 그는 여전히 양지보다 음지의 냉기가 사무치고, 걸어갈 꽃길보다 진흙 수렁 걱정되지만 그래도 이 때만큼은 덕담만 나누자고 말합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택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신명기에 등장하는 커다란 두 번째 설교 단락을 마감하는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신명기 28장은 27장과 연결시켜 보아야 그 뜻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가서 정착생활을 하게 될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세세히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시내 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광야에서 맺었던 그 언약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잘 지키며 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세겜 땅에 들어가면 시내 산 언약을 재확증하는 언약 체결식을 시행하라고 명합니다. 세겜(Shechem)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에서 약 49km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나블루스(Nablus)에 해당하는 도시입니다. 그 유명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있는 분지입니다.

언약 체결식의 절차는 간단했습니다. 먼저 큰 돌을 취해 그 위에 석회를 발라야 했습니다. 거기에 율법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록하여 한 후에 에발 산에 세워야 했습니다. 그 다음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돌 위에 석회를 발랐다는 것은 그 위에 기록된 내용을 변개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분명하게‘(바에르ba’ar)는 ‘간명하게’, ‘구별되게’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산 위에 우뚝 세워진 말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그 말씀이 이스라엘의 삶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만든 제단은 가나안 문명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복과 저주의 갈림길
그 절차를 완료한 후에는 여러 지파를 각각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세우고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산 위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명명백백하게 하라는 말일 겁니다. 성서 종교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특권을 누리는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탈중심주의, 탈권위주의 혹은 말씀의 민주화라고 할까요? 백성들은 능동적으로 언약의 주체가 되어 자기 삶을 책임적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27장에는 축복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고 저주에 대한 내용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기 때문일까요? 28장으로 가면 축복의 선언이 나오지만 불과 14절에 불과하고, 저주의 선언은 54절이나 됩니다. 어쩌면 이게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역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어긋나가기 일쑤인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단단한 제어 장치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위인들에 의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받는 저주의 내용이 선포될 때마다 백성들은 ‘아멘‘ 하고 응답해야 했습니다. 27장에 등장하는 ‘하지 말아야 할 행위들‘은 지금도 유효하게 들립니다. 저주 앞에 서는 자는 우상 만드는 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 이웃의 땅 경계석을 옮기는 자, 장애인을 오도하는 자,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 다양한 형태의 성적 일탈 행위자, 이웃의 생명을 해하는 자,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절이 무섭습니다. “‘이 율법 가운데 하나라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십시오.”(신27:26)

28장에는 복과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장황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사실 복과 저주 선포의 문학적 원형은 고대 국가에서 종주국과 봉신국 사이에 맺어진 조약 문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복속시켜 봉신국으로 삼고는 종주국 주군을 배신할 때 받게 될 징벌을 세세히 기록하고 선포했습니다. 이게 성경에 들어온 것이지요. 복과 저주의 갈림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 대전제가 28장 1절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신28:1)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shama),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는 것(‘asah)이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입니다. 그저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자기 삶을 조율해야 우리 삶이 맑고 깊어집니다. 수도사들이 성무일도聖務日禱(Officium Divinum)를 거르지 않는 것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정신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입니다. 시편을 읽고, 찬송과 기도를 바치고, 교부들의 글을 낭독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깃들기 쉬운 욕망의 때들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무효화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기 위해 말씀을 제멋대로 왜곡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비밀스러운 계시를 전해주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거의 다 종교 사기꾼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믿는 이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29:29)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들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명기 기자는 변명의 여지를 두지 않고 말합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신30:14)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반역의 충동이 하나님의 뜻을 자꾸 거역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핑곗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삽니다. 그런 현실을 저는 무작정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향만은 분명해야 합니다.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타협하면 안 됩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은 비루해집니다. 힘들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끝내 지켜내야 합니다. 그래야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8장 15절부터 68절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이 직면하게 될 삶의 곤고함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정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삶의 우환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간추려 말하자면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이들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한곳에 정착하여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고, 결국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주 선포의 마지막 절인 68절은 이 모든 것을 요약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않게 하겠다’ 하고 약속하신 그 길로, 당신들을 배에 태워 이집트로 끌고 가실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당신들이 당신들 몸뚱이를 원수들에게 남종이나 여종으로 팔려고 내놓아도, 사는 사람조차 없을 것입니다.”(신28:68)

이 구절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사는 삶의 결국은 출애굽의 무효화, 애굽으로의 귀환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인간의 반역에 의해 좌절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들의 불순함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뭔가에 묶인 채 자유인이 아닌 종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사람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 앞에는 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28장 2절은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복이 찾아와서 따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우리가 앞서 가면 복이 마치 추격전을 벌이듯 우리 뒤를 따라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인사를 함께 나눕니다. 하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고, 다른 하나는 ‘새해 복 되게 사십시오’입니다. 사실 이 둘은 나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복 되게 살면 복이 뒤따라옵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입니다.

그 복은 참 다채롭습니다. 땅의 소출을 풍성하게 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풍성한 보물 창고인 하늘을 여시고 철을 따라 비를 내리시고,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꾸어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이고,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이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구하는 것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끈질기게 지키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보람입니다. 설교의 초반에 인용했던 반칠환의 말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남의 눈에 꽃으로 보이고 잎으로 보이며, 무병 무탈하고 운수 대통하십시오.“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마다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빕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비난을 멈추는 순간

김기석

비난을 멈추는 순간



오래 전에 들었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장학사가 어느 학교 교실에 들어가서 교탁에 놓여 있는 지구의를 보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지구의가 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요?” 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마도 ‘지구의 자전축은 원래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자리에 앉은 학생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안 그랬는데요.” 책임을 추궁당할 위기에 처한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이며 “너희같은 악동들이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라고 책망했다고 한다.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지만 우리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을 두고 누구도 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욕심 사납기 때문이고, 세상이 위험해진 것은 난민들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이렇게 혼미를 거듭하는 것은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이분법은 내 편 만들기에는 유리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영 무능하다. 무능이라면 그런대로 견딜만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이분법이 세상을 더욱 조각내고, 갈등을 심화시키고, 타자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더욱 앗아간다는 데 있다.



사실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 속한다. 인류의 첫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남자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를 만난 것 같은 감격을 담아 말한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살도 나의 살, 뼈도 나의 뼈’.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이 고백 속에 담긴 것은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나의 있음은 바로 너의 존재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아닌가?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인간은 이런 존재였다. 성서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이 발화한 첫 문장은 사랑의 고백이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모든 것이 변했다. 왜 금지된 일을 행했느냐는 여호와의 책망에 남자는 슬그머니 핑계를 댄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제게 줌으로 제가 먹었나이다”. 남자는 여자를 넘어 하나님까지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도 뱀의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 말함으로 자기 책임을 면하려 한다. 사랑의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원망의 말이었다. 말의 타락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타락한 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는커녕 사람들 가슴에 건너기 힘든 틈을 만든다. 권력으로 변한 말은 힘 없는 이들의 가슴에 대못으로 박히기도 한다.



말이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는 슬픔이 크다. 희망은 어디 있나? 말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류의 첫 사람들의 행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성경은 실낱같은 희망의 가능성도 열어 보인다. 죄의 결과 남자와 여자와 뱀은 각각 땀 흘림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 흙을 먹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선고받는다. 그 큰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인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죄로 인해 불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했다. 씁쓸했을 것이다. 시르죽어 지내다가 문득 개체로서의 자기 생명은 유한성 속에서 소멸하겠지만, 생명은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통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는 여자를 비난하는 일을 그만 두고 그 여자에게 존귀한 이름을 부여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거룩한 이름 아닌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을 통해서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역사의 어둠만 가중시킬 뿐이다. 불의는 불의라 말하고, 어둠은 어둠이라 말해야 하지만, 사람을 경멸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경멸과 혐오와 원망의 말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절망의 어둠을 넘어 자기 파트너를 ‘하와’라고 호명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아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홀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등 돌렸던 이웃들이 마주보게 될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비난을 멈추는 순간 빛이 우리 속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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