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슬퍼해 주십시오
김재흥(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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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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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으면, 잃어버리면 안 된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봄이 돌아와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부활절이 지났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겨울 같은 냉기가 가득하고 죽음의 소식들이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7일 미국과 이란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바로 다음날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폭격했습니다. 공습경고도 없이 민간인 주거지역을 폭격했습니다. 장례식장과 유엔 평화군이 있던 곳도 폭격했습니다. 폭격으로 인해 수백 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유엔은 이는 엄연한 국제법 위반이고 전쟁범죄라며 비난했습니다. 전쟁은 멈추어야 합니다. 이미 이번 전쟁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번 폭격으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부상당했습니다’라는 뉴스를 우리는 매일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살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바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한 많은 죽음이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지난 2월 28일 전쟁 첫날에 이란 미나부 여자초등학교 폭격으로 죽어간 100여 명의 아이들에게 유난히 마음이 많이 갑니다. 4월 5일 일본에 있는 미국대사관 앞에서 재일 이란인들이 모여 미나부 여자초등학교 폭격으로 희생된 어린이들을 위한 추도식을 진행했습니다. 진행자는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작은 몸속에 큰 미래를 담고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희생자 아이의 어머니가 쓴 글도 소개가 되었습니다. “집을 나설 때 아이가 ‘엄마, 학교 끝나면 데리러와 줘’라고 한 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새해를 맞아 사놓았던 옷이 지금도 아이의 방에 남아 있고, 남겨진 공책에는 아이가 더는 꿈을 적을 수가 없습니다. 이 고통을 초래한 이스라엘과 미국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는 복수를 위한 게 아니며 아이들의 생명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과 어떤 부모도 더는 이런 비극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미군 내 예비 조사에서 이번 폭격이 오래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오폭이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그 어떤 책임자 처벌이나 사과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으로도 사람들이 죽고 있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있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고 계신 목사님께서 우리나라에서 이민 노동자들이 한 해에 3,0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란 미나부의 아이들이나 이민 노동자들 모두 그냥 잊혀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망각 속으로 잃어버릴 때 그런 비극은 계속될 것이며 언제가 그런 비극은 우리의 비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슬픔으로의 초대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는 한 장의 말씀 속에 세 가지의 비유가 들어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이야기’입니다. 백 마리의 양 중 한 마리의 양을 잃은 목자가 그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은 이야기, 10개의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이 그 한 드라크마를 되찾은 이야기, 두 아들 중 한 아들을 잃었다 생각했던 아버지가 그 아들을 되찾은 이야기. 그런데 이 세 가지 비유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이가 되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되찾은 목자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둘째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의 아우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함께 기뻐하자”
기쁨으로의 초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말씀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아버지의 기쁨으로의 초대에 첫째 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말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미 기분이 많이 상해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도 못 마땅했지만, 그 탕자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열어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준 아버지 또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의 기쁨으로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았을 때 그와 함께 기뻐하려면, 그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느꼈을 슬픔과 아픔에 대한 공감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곧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기쁨으로의 초대 속에는 ‘나와 함께 슬퍼해 주십시오’라는 슬픔으로의 초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슬픔으로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기쁨으로의 초대 또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배경은 1,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려 세리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불퉁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를 죄인으로 정죄하였을 뿐 아니라 세리를 온전한 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는 예수님도 죄인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슬픔으로의 초대는 어떤 슬픔으로의 초대였습니까? 그것은 같은 동족에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죄인 취급 받으며 슬퍼하였던 세리의 슬픔으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들어 동족을 비인간화하고 죄인 취급하는 모습을 보고 슬퍼하셨던 하나님의 슬픔으로의 초대였습니다. 끝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슬픔으로의 초대를 거절하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으로의 초대를 거절할 때는 항상 그와 같은 폭력이 일어납니다.
3. 나와 함께 슬퍼해 주십시오.
미 국방장관이 이번 전쟁 중 드린 기도문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총알이 우리의 적들에게 명중하게 하소서. 그리고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향한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힘을 행하게 하소서. 사악한 영혼들이 그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저주로 넘겨지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하고 능력 있는 이름을 힘입어 담대히 구하옵나이다. 아멘.” 전쟁 중 적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다니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 예수님이 가신 길과 정반대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죽음과 전쟁의 세상을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는 세상, 생명과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것은 죽음과 전쟁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입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현재까지 관람객이 1,6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역대 2위 수준입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어린 단종이 숙부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오지에 유배되어 가서 살다가 16세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야기입니다. 관객의 영화평 중 이런 댓글이 있었습니다. “500년 만에 전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 평에 대해서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영화를 만든 장항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유해진 배우도 이 댓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단종의 죽음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영화를 통해 많은 이가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던 단종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했습니다. 영화에 많은 사람이 감동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 그 누구도 단종의 시신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요 일가가 몰살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종의 아픔과 슬픔은 잊어야 하는 아픔과 슬픔, 버려야 하는 아픔과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엄흥도라는 시골 하급 관리가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아픔과 슬픔을 잊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들었습니다. 거대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버림받은 시신마저도 귀히 여기는 마음, 의로운 마음, 바른 마음, 아름다운 마음,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마음,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았던 마음.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그 마음을 만나 눈물을 흘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인 16일은 세월호 참사 12주기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유족들과도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이와 함께 오래 슬퍼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동시에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너의 슬픔에 대해서 슬퍼하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계속 반복해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모습도 자주 보지만, 그보다 훨씬 자주 보게 되는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죄 때문에 슬퍼하시고, 그로인해 인간을 벌하시기도 하지만 끝내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다시 인간과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슬픔의 절규가 끝없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우리 주님은 오늘도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자.”(롬 12:15) 우리는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과 참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할 때 그 자리에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슬픔을 반으로 줄어들게 하시고, 그 슬픔의 자리를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만드시고, 결국에는 그 자리를 모두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자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이 시대 믿음의 백성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