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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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스마야와 르호보암

김기석(2021-09-26)
듣기

스마야와 르호보암
대하 12:5-12
(2021/09/26, 창조절 제4주)

[그 때에 유다 지도자들이 시삭에게 쫓겨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는데, 스마야 예언자가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을 찾아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내주겠다.'" 그러자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왕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렇게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다시 스마야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이렇게 잘못을 뉘우치니, 내가 그들을 멸하지는 않겠으나, 그들이 구원을 받기는 해도 아주 가까스로 구원을 받게 하겠다. 내가 내 분노를, 시삭을 시켜서 예루살렘에 다 쏟지는 않겠으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보아야,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주님의 성전 보물과 왕실 보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 갔다.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들도 가져 갔다. 그래서 르호보암 왕은 금방패 대신에 놋방패들을 만들어서, 대궐 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에게 주었다. 왕이 주님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호원들은 그 놋방패를 들고 가서 경호하다가, 다시 경호실로 가져 오곤 하였다. 르호보암이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진노를 거두시고, 그를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유다 나라는 형편이 좋아졌다.]

• 철부지 왕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추석 연휴가 지난 후 예상했던 대로 코로나 확진자가 크게 늘었습니다. 우려스러운 현실입니다. 아직도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조금 답답합니다. 불확실성의 안개가 언제나 걷힐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우줄거리며 걷다 보면 마침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오늘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저는 시편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이 마음으로 오늘을 견딥니다.

한반도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아주 작은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UN에서 분단체제의 당사자인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이 함께 한반도의 종전 선언을 하자는 대통령의 제안에, 북한은 선행 조건을 내걸기는 했지만 의미 있는 응답을 해왔습니다. 대화의 문이 아주 닫히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새싹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평화의 길을 닦아야 할 때입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는 말이 한반도에서 진실로 입증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찾아보려 합니다. 역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즉위식에 앞서 백성들의 대표자들이 그를 찾아와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솔로몬이 그들에게 부과했던 과중한 세금 부담을 줄여달라는 것과,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해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정책을 철회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궁전 건축, 요새화된 성읍 건설, 솔로몬의 최대 치적으로 상찬되는 성전 건축 등은 사실 민중들의 고혈을 짜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먼저 원로들에게 정책 자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르호보암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온갖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젊은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주었다가는 왕권이 약화될 것이라면서 오히려 더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이 르호보암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지혜’ 즉 ‘듣는 귀’를 달라고 청했지만 르호보암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때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가죽 채찍이 아니라 쇠 채찍으로 다스리겠다는 르호보암의 대답을 들은 백성들은 깊이 절망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왕이 그들의 요구를 전혀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외쳤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무엇이냐? 이새의 아들에게서는 받을 유산이 없다. 이스라엘아, 각자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너의 집안이나 돌보아라." 그런 다음에, 온 이스라엘은 각자 자기들의 장막으로 돌아갔다.”(대하 10:16)

• 분단시대
이날 이후 여로보암을 따르는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지파 동맹이 해체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분단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유다와 베냐민 가문에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정병 십팔만 명이 소집되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질 찰나였습니다. 명분이 무엇이든 전쟁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마련입니다. 지난 세기 후반에 우리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내전을 경험했습니다. 다정하게 이웃하여 지내던 이들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서로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르완다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진 대학살은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라는 홉스의 말을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은 왕들이 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전리품을 획득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족 간의 전쟁은 경우가 다릅니다.

전쟁의 나팔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울리고, 흥분한 말들이 힝힝거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심박수를 높이고 있을 때 예언자 스마야(Shemaiah)가 등장합니다. 스마야는 아주 흔한 이름이어서 구약에 무려 25명이나 등장합니다. 스마야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스마야는 솔로몬과 르호보암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과 싸우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로보암을 치러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대하 11:4) 이 느닷없는 중단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예언자의 말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파국에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르호보암은 전쟁 대신 성읍을 요새화 했고, 양식과 기름과 술을 저장해 두었고, 무기고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내실을 다지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의 나이가 41세이니 그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금하고, 곳곳에 산당을 세우고 제사장을 임명하자,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졌던 목장과 소유지를 버리고 남왕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스라엘에 속한 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의 귀순이 잇따랐습니다. 종교인들의 가세로 르호보암의 왕권의 정통성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세월은 겨우 삼 년뿐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아내 열여덟을 두었고 첩은 예순 명이었다고 전합니다. 아들이 스물여덟이고 딸은 육십 명이었습니다. 그는 평등 공동체라는 이스라엘의 꿈을 저버리고 전제군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 권력 중독
역대기 기자는 르호보암이 어떻게 전락의 길을 걸어갔는지 짧은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왕위가 튼튼해지고 세력이 커지자, 주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온 이스라엘도 그를 본받게 되었다”(대하 12:1).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까요? 성공 혹은 성취는 좋은 것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오만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자기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율법은 스스로 성공에 도취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주 불편한 것입니다. 율법 정신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는 말씀과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레19:18)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거룩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핵심 내용이 사랑입니다. 거룩한 삶은 타자를 배려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형편과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르호보암 즉위 오 년째 되던 해에 이집트 왕 시삭(Shishak)이 침공했습니다. 이집트 22왕조의 첫 번째 왕이었던 그는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는 유다를 치기 위해 병거 천이백 대, 기병 육만 명,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국적 용병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파죽지세로 유다를 정복했고 예루살렘의 턱 밑까지 이르렀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피신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다시 예언자 스마야가 등장합니다. 그는 값싼 위로의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내주겠다.’”(대하 12:5b).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비로소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율법을 버리고 살아온 삶을 참회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가운데 하나가 생의 한복판에서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가장자리로 내몰릴 때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은 쓰린 일이지만, 마음을 열고 보면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벌을 내리려다가도 백성들이 참회하면 그 뜻을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남왕국 유다는 망해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일거에 제거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고통의 심연을 거치면서 가까스로 구원을 받게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보아야,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게 될 것이다.”(대하 12:8) 세상의 권세를 섬기는 자들은 자기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자유인이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만 꼭 붙들어도 삶이 가벼워집니다. 찬송가 336장 2절 가사가 떠오릅니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진정한 자유는 모든 멍에를 벗어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제대로 알고 섬기는 데서 비롯됩니다. 김현승 시인은 일찍이 감사하는 마음은 자기를 아는 마음이고,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마음이라 말했습니다(‘감사하는 마음’ 중에서).

• 황금시대의 종언
스마야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시삭은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 보물과 왕실 보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갔습니다.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은 데 그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제후국이 되어 공물(貢物, tributary)을 지속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도 약탈당했습니다. 그 때문에 르호보암은 놋방패들을 만들어 경호 책임자에게 맡겼고, 그가 출입을 할 때마다 그 놋방패를 들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는 솔로몬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방패를 빼앗겼다는 말은 그 시대가 끝이 났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황금시대는 삼 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까닭은 분명합니다. 그 화려하고 풍성한 삶의 이면에 백성들의 아픔과 한이 서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축적한 부는 외국과의 적극적인 교역의 결과인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은 해마다 솔로몬에게 들어오는 금의 무게가 육백육십육 달란트나 되었다고 전합니다. 한 달란트가 대략 34kg이라니 상상이 안 되는 양입니다. 관세 수입, 아라비아의 왕들과 지방 장관들이 보내오는 금도 많았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으로 큰 방패를 이백 개나 만들었다고 합니다.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작은 방패도 삼백 개나 만들었습니다.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겉에 순금을 입히기도 했습니다(대하9:13-21 참조). 그 찬란한 방패도 남왕국 유다를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토대인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운 모든 것들도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솔로몬과 르호보암은 출애굽 정신을 저버렸기에 징벌을 받았습니다.

왕이 예언자의 비전에 귀를 기울일 때 나라는 든든히 섭니다. 그러나 왕이 자만심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 예언자가 경고의 나팔소리를 울리지 않고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을 누리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정당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 돌입했습니다.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말의 난장 속에서 진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국민들은 혼돈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허물을 찾아내고 증폭시키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평화와 생명의 길을 찾으라는 스마야의 음성은 경청되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대선 후보들 가운데 누구도 긴박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욕망에 부합할 정책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하십니다(렘45:4). 이 두려운 고백 위에 서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빛이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기를 빕니다. 분단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가련한 민족의 앞길도 밝혀주시길 빕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코스메토르를 기다리며

김기석

코스메토르를 기다리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타인의 강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기 삶을 선택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함께 살아갈 세상의 모습을 형성하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정당함이 없는 권리에 순응해야 할 때 비애감이 발생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왕을 절대적 권력자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정자로 인식했다. 왕을 뜻하는 말 가운데 하나인 ‘코스메토르’는 ‘코스메오하는 사람’ 즉 ‘정돈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제적인 지배를 경계하는 동시에 정치를 미학화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가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적임자라고 말한다. 자기가 적임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정치인들은 설득의 기술을 발휘한다. 물론 그 도구는 말이다.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자연의 이치, 인간이 따라야 하는 도덕 법칙, 그것을 파악하는 인간의 이성 등이 그것이다. 정치판은 로고스가 드러나야 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적 설득의 묘를 발휘하기보다는 상대편의 문제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한다. 그가 왜 부적격자인지를 드러내는 편이 자기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말의 난장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진실과 그 나라의 미래이다. 상대를 부정함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그 승리의 기쁨 속에는 패자들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말이 문제다. 말이 세상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 이름은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는 이스라엘의 국력을 최대치로 신장시켰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화려한 궁전을 지었고, 사회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성전을 짓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은 솔로몬의 최대 치적을 성전 건축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어둠도 짙은 법이다. 솔로몬 치하에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왕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담시켰고, 양곡 저장 성읍, 병거 주둔 성읍, 기병 주둔 성읍, 궁전, 성전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위해 성인 남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성경은 성전 건축을 출애굽 사건의 완성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솔로몬 시대는 출애굽 정신을 철저히 훼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을 전제 정치로 이끌어 들였으니 말이다.



잠복되어 있던 불만은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할 때 터져 나왔다. 백성의 대표들이 그를 찾아가서 솔로몬 시대의 가혹한 정책을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민중들의 고충을 알 리 없는 측근들과 상의한 후 이전보다 더 강화된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로 인해 여로보암이라는 지도자를 따르는 이들이 독립하여 북쪽에 이스라엘 왕조를 세운다. 바야흐로 남북 분단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솔로몬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끝났다. 가장 큰 치적으로 여겨졌던 성전 건축이 오히려 분단의 단초가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인 정현종은 ‘권좌權座’라는 시에서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권좌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렇게 노래한다. “권좌는 저주의 수렴이요/권좌는 치욕의 원천이며/권좌는 강력한 오점이다”. 권력의 들큼한 맛에 취하는 순간 로고스는 뒷걸음질하여 물러가고 냉소와 조롱과 악다구니가 그의 영혼을 잠식한다. 권좌에 대한 욕구가 치욕의 원천인 것은 그 때문이다. 대립은 정치 행위 속에 불가피한 것이지만,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자의 삶 전체를 능멸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도 똑같은 덫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과정이 진행 중이다. 냉철하고 탁월하고 품위 있는 말이 오가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이미지로 포장되어 실체를 알 수 없는 말들이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다. 말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큰 죄가 또 있을까? 신뢰의 토대인 말이 타락하는 순간, 세상은 원시적 혼돈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우리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는데, 정치인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할 길만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코스메토르적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2021/09/25일,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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