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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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덫인 줄 알면서도

김기석(2021-08-01)
듣기

덫인 줄 알면서도
누가복음 6:6-11
(2021/08/01, 성령강림 후 10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 우리 안에 감춰진 보물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무덥다고는 하지만 이제 조석으로 바람결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계절의 순환조차 하나님의 은총의 일부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휴가지를 찾는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좋은 쉼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염천의 하늘 아래서 일해야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방역복을 입고 코로나와 맞서 싸우는 이들을 생각하면 휴가 혹은 휴식을 말하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휴식은 꼭 필요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온 사도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막6:31). 쉼은 게으름의 징표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위한 지혜이고 숨 고르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렛날에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2:3)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배쓰‘(shabath)의 기본적 의미는 ‘멈추다’, ‘쉬다’입니다. 물론 일을 멈추고 빈둥거리는 게 곧 안식은 아닙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들은 안식일은 일에 몰두하느라 잠시 잊고 지내던 근본을 회복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인간과 세계의 조화를 깊이 자각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 뜻에 따라 조율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일의 거룩함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속물근성, 곧 시끌시끌한 흥정과 수고의 멍에를 내려놓아야 한다. 불협화음으로 소란스러운 날들, 신경질을 부리며 맹렬히 타오르는 소유욕, 자신의 생명을 배반하고 야금야금 갉아먹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략) 우리는 한 주에 엿새 동안은 땅에서 이윤을 짜내며 이 세계와 씨름하지만, 안식일에는 영혼 속에 심겨진 영원의 씨앗을 각별히 보살핀다.“(아브라함 헤셸, <안식>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57)

시인 오세영 선생은 “8월은/오르는 길을 멈추고 한 번쯤/돌아가는 길을 생각하게 만드는/달”이라고 노래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던 삶에서 벗어나, 우리 영혼 속에 심겨진 아름다운 것을 가꾸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 ‘밭에 숨겨놓은 보물’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실 그 보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 친절, 온유, 자비, 공감, 경외심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보물을 바깥에서만 찾습니다.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바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높은 산봉우리, 망망한 바다의 물결, 넓은 강의 흐름, 끝없는 대양, 별의 운행을 구경하러 여행을 떠납니다만 자신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10권 8장,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p.263)

이 구절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페트라르카(1304-1374)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진 바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동생과 함께 오른 방투 산에서 대자연의 파노라마에 취해 있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늘 가지고 다니던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꺼내 읽다가 앞에서 말씀드린 구절과 만났습니다. 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살면서도 정작 자기의 내면을 살피는 일을 잊고 살았음을 자각했습니다. 이후에 그의 글과 생각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봅니다. 우리도 속에 있는 보물을 본체만체 하고 밖의 보물만 찾느라 고단한 것은 아닌지요? 안식으로의 초대는 우리 삶의 근원을 돌아보라는 부름입니다.

• 전문가라는 자부심의 허망함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안식일은 성전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두 기둥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시장했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일종의 밀 서리를 한 셈이지요. 그러나 당시 문화에서 그것은 지탄을 받을만한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다닐 때 일어났던 일을 환기시킵니다.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거룩한 떡(showbread, 진설병)을 얻어먹었습니다(삼상21:1-6). 거룩한 떡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바꿔 올린 후, 물려낸 것은 제사장들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전통은 지켜져야 하지만, 비상한 상황에서는 전통을 어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무슬림들은 금식월인 라마단 기간 중에도 노약자나 임산부, 환자, 여행객들은 금식 의무를 면제해준다고 합니다. 종교적 계율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근본적 사실을 지적하신 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믿었을 테니 말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자리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른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처한 곤경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왼손잡이들도 많지만, 성경에서 오른쪽은 하나님의 도움이 오는 방향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는 말은 신체적 장애를 안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가 사회적으로도 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회당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실 것임을 알고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를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탐색하는 듯한 그들의 눈빛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토라와 예언서의 전문가를 자처하면서도 오른손 마른 사람에 대해 어떤 연대감도 보이질 않을 뿐 아니라, 그의 쓰라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 조문이지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가 설 땅을 마련해주고, 그가 회복되도록 돕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오른손 마른 사람은 자기들의 해박한 신학 지식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부정적 예였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다 읽고 계셨습니다.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지만 그들 속에는 정작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니 잘 알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저주받은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속 생각을 드러내는 깃발처럼 그는 회당 한복판에 우뚝 섰습니다. 긴장이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투명 인간 취급을 받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긴장합니다.

• 회복 탄력성을 잃은 마음
그때 주님은 지도자연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6:9)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답을 하는 순간 예수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의 본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자기들이 오히려 자기들이 판 함정에 빠진 격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다룬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12:11) 그러면서 주님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본문은 주님의 질문에 묵묵부답인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이 노하셨다고 전합니다(막3:5).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아테네 법정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까닭은 세 가지였습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 국가가 인정한 신을 부정한다는 것,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 즉 그가 다이몬이라 한 것을 도입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지도자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쓰고 있던 허위의식의 가면이 벗겨질 때 사람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수긍했더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굳어진 마음에는 탄력이 없습니다. 돌이키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일어난 재앙 이야기에서 사람들을 당혹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强愎)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의 굳어진 마음은 새로움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다는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주님은 깊은 침묵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명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 것은 오직 이 사람뿐입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숨죽인 채 살던 사람, 언제나 다른 이들의 행복을 드러내기 위해 부정적으로만 소환되던 사람, 그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이적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마땅했습니다. 손이 회복된 사람의 등을 토닥이며 정말 잘 됐다고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이란 온통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기뻐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구겨진 자기들의 자존심뿐입니다. 전문가라는 자기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한 예수의 말과 행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이야기를 훨씬 더 정치적으로 해석합니다. 마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막3:6)고 전합니다. 악한 이들의 공모는 이렇게 단단합니다. 자기가 누리던 사회적 지위와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못할 일이 없는 겁니다.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하나님 나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 불순한 의도를 뻔히 아시면서도 왜 그 자리를 회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람들의 말대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촌음을 다투는 일도 아니니 말입니다. 주님은 적대자들을 말로 설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면 그들의 태도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주님은 누구보다 인간의 복잡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죽하면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셨겠습니까?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릅니다.

전략적으로 보더라도 주님의 처신은 다소 위험해 보입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뜻을 펼치셨더라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진실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신변 안전을 최우선의 관심으로 삼았더라면 주님은 그들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안전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은 그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터벅터벅 그 덫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살고 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돌려주기 위해 주님은 위험을 무릅쓰셨습니다.

본문은 숨어서 엿보는 이들과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숨김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누가 빛인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의 적대감은 깊어졌을지라도 침묵하고 있던 다수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법입니다. 취약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기꺼이 모험에 뛰어들고, 그 결과는 사랑으로 감내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뜨거운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주님이 앞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어둠을 찢고 빛을 낳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소명을 가슴에 새기고 살 때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아멘.

새컬럼



심연에서 빛을 보는 사람들

김기석

심연에서 빛을 보는 사람들

 

히말라야의 브로드피크를 등정한 후 하산길에 실종된 김홍빈 대장은 결국 그 무심한 설산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장애인이라는 타이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려는 도전 정신이다. 그는 일찍이 북미 대륙의 최고봉인 매킨리 단독 등반 도중 조난 사고를 당해 열 손가락을 다 잃었다. 잠시 암울한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는 자기 삶의 조건을 씩씩하게 받아들였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발휘했다. 일곱 대륙의 극점에 도전했고, 마침내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꿈을 이루고 말았다. 사고였지만 그는 마치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며칠 동안 그의 생환 소식을 기다리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와서 어두운 심연에서 끝을 맺으면서 우리는 반짝하는 그 사이의 삶을 부른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되돌아감은 시작되고, 전진과 후퇴는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매순간 죽는다.” 조금 불길하긴 했지만 이게 삶의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심연과 심연 사이에서 반짝하는 사이, 바로 그곳에서 우리 삶이 빚어진다. 심연은 어떤 설명도 불가능한 인식의 절벽이다. 삶도 그러하고 죽음도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심연을 짐짓 외면하며 산다. 심연을 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보는 순간 인간은 벼랑 끝에 선 듯 현기증을 느낀다. 심연을 응시한 후에 깊은 침묵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는 이도 있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이도 있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이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심연 앞에서 눈을 감는다. 심연의 공포를 마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안전하다. 요령 있고 신중한 이들은 안전지대에 머물 뿐, 경계선 너머를 꿈꾸지 않는다. 그때 정신은 늙기 시작한다. 문틈으로 공기가 스며 들어오듯, 먼지가 소리 없이 쌓이듯 일상은 그렇게 우리 정신을 잠식하여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하게 만든다. 비속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앙버티며 사는 동안 우리 삶의 지평은 점점 좁아진다. 길들여진 삶의 쓸쓸한 풍경이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하계 올림픽 경기를 보며 감탄한다. 젊은 날에는 승자들에게 눈길이 많이 갔지만 이제는 이기든 지든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들의 모습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 몸과 마음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탐색하는 그들의 장한 도전 덕분에 우리 문명은 활력을 얻는다.

 

세상에는 인간 정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전쟁의 세기인 20세기에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통해 새로운 생명 윤리를 제시한 앨버트 슈바이처, 제국의 가혹한 폭력을 겪으면서도 비폭력적 저항을 통해 압제자나 피압제자가 함께 해방되는 길을 제시했던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고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인간 정신을 고양한 존재라 해야 할 것이다. 모든 고통이 다 정신의 숭고함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은 언제나 비범한 고통을 통해 발현된다. 비범한 고통이란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 고통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고통이다. 약자들을 삼키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그 격랑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제단 앞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진실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신의 숭고함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비루한 정신이 나라를 대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어찌 정치인들만의 문제겠는가. 우리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초월의 관점에서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종교조차 정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한다면 역사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2021/07/31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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