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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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주님의 숲이 되어

김기석(2021-06-13)
듣기

주님의 숲이 되어
롬10:9-13
(2021/06/13, 성령 강림 후 제3주, 환경주일)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위기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정한 환경주일입니다. 많은 이들이 환경環境이라는 말보다는 생태계라는 말을 사용하자고 말합니다. 환경이라는 말 속에 이미 ‘인간중심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계라는 말에는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이 상호 연결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도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온갖 생명들을 품어 안고, 물을 저장하기도 하고 흘려보내기도 하고, 구름을 만들기도 하며 우주의 리듬을 만들고 있습니다. 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생명을 품에 안고 흐르고 또 흐르며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다. 인격성이 없다 뿐이지 강도 살아있는 실체임이 분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 생태계에 뒤늦게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손님은 주인이 정한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무도한 무리처럼 주인집을 난장판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집에 온 손님이 사방 뒤지고 다니고, 냉장고를 함부로 열고, 쇼파에 퍼질러 눕고, 밤늦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소란을 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은 그를 더 이상 손님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을 잘 돌보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고, 값진 것을 얻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연을 윽박지르고 닦달했습니다. 그런 닦달질을 사람들은 ‘개발’ 혹은 ‘발전’이라 말합니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 가운데 지난 200여 년의 세월, 특히 20세기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닦달 행위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고향인 지구는 황폐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졌고, 자연 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급기야는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 우리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습니다. 탄소중립위원회가 발족되고 기후 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며칠 전 광주에서 벌어진 재개발 지역 건물 붕괴 사고가 그 한 예입니다. 안전 불감증이 빚은 참극들이 끊일 새 없이 벌어집니다. 한 순간 벌어진 그 사고들은 수많은 가족들의 삶을 조각냅니다. 스러진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가족들은 평생 그 아픔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우리 문명에 대한 일종의 빨간 신호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잠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부푼 욕망을 다 채우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거짓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관차가 우리를 이끌 때 오히려 행복이라는 목표로부터 더 멀어지는 게 우리 삶의 솔직한 경험입니다. 몸이 아프면 모든 일정을 재조정하는 게 지혜입니다. 하던 일이니까 계속하다보면 무리하게 되고, 병이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재조정의 시간입니다. 우리 삶이 지나칠 정도로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에 경도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꽤 많은 분들이 기후위기에 대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 삶의 관성에 저항할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과 계산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이기에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늘 어리석어 보입니다. 희망이란 본래 아주 희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희박한 것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이들 덕분에 우리는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고백과 믿음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시는 분으로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버나드 브랜든 스캇은 <예수의 비유 다시 듣기>를 통해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 비유를 새롭게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부제는 ‘세상 다시 상상하기’(re-imagine the world)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에 적응만 하다보면 그 시대의 정신을 닮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그 흐름에서 도태될까 무서워서 숨을 헐떡이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순치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는 뜻이 아닐까요? 성경은 이것을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 담긴 속뜻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10:9-10)

‘입으로 하는 고백’과 ‘마음으로 믿음’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이것은 물론 신30:14의 말씀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특정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신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속에 이미 심겨져 있습니다. 다만 세상의 때가 묻어 가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우리 삶의 최고 원리로 삼고 살기로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고백을 뜻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오(homologeo)는 자기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회복되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새로운 생태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이들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각도, 취향도, 정치적인 입장도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어야 합니다. 건강한 생태계의 특징은 다양한 생물들이 어울려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토양, 곤충, 미생물, 초식동물, 육식동물들이 어우러지면서 균형을 유지할 때 숲은 건강합니다. 옛날 농부들은 밭에 한 작물만 심지 않았습니다. 사이짓기(섞어짓기), 그루갈이(이모작), 돌려짓기(輪作)를 통해 밭이 황폐화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질소를 땅에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식물과 그것을 이용하여 열매를 맺는 작물을 함께 심어 서로 보완하도록 하는 경우를 생각하며 되겠습니다.

단일경작의 폐단은 다른 것들이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땅은 지력을 잃고 황폐화됩니다. 사회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노라면 갈등도 생기고,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여러 모로 다른 이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취향과 생각, 삶의 방식을 존중하려 할 때 우리 영혼이 커집니다.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을 보면 참 다양합니다. 갈릴리의 어부들, 세관원, 열혈당원 등, 서로 섞이기 어려운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소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자신들의 삶이 회복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오늘 환경부가 부른 찬양 ‘주님의 숲’의 가사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찾아온 푸르른 저 숲속엔/평온하게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당신이 지나온 이 거리는 언제나 낯설게 느껴/그 어디에도 평화 없네 참 평화 없네/그렇지만 당신의 앞에 펼쳐진 주님의 숲에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숲은 두 팔을 벌려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당신의 지친 어깨가/이젠 쉬도록 편히 쉬도록 여기 주님의 숲에”

평화 없는 세상에서 사느라 지친 이들을 품어 안는 주님의 숲, 그곳은 병든 사람, 세리와 죄인, 귀신 들린 사람, 여성들, 날품팔이 노동자들, 진리를 구하던 공회원들과 율법학자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숲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안아주듯이 주님은 우리가 숲이 되어 그런 역할을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해 전에 독일의 라이프찌히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후기 고딕 양식,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탑으로 구성된 예배당을 둘러보던 중 문득 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독일이 통일 되기 이전에 동독에 속한 그 지역에서 니콜라이 교회의 담임 목사인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는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주제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를 개최했습니다.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반체제인사 등 많은 이들이 그 기도회에 동참했습니다. 니콜라이 교회는 그런 모든 이들의 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숲은 바로 이런 넉넉한 사랑의 공간입니다. 차이를 근거로 하여 사람들을 가르고, 배제하고, 혐오하고, 모욕을 안겨주는 일은 예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삶
주님의 숲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게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일종의 지배 전략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의 시야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눈길을 준 채 전전긍긍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크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신앙을 가리켜 ‘먼 빛의 눈길’(오시다 시게또)이라 말한 분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를 초조함 속으로 몰아넣던 일들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숲에 들어온 이들은 곁에 있는 이들을 경쟁해서 물리쳐야 하는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으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그도 역시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 됨의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숲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벧전4:10)라고 권고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는 주님의 숲을 풍요롭게 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혈통을 이어받은 생태학자 로빈 월 키머러는 교육의 목적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 이것이 교육의 목적 아닐까? 나 자신의 선물이 지닌 성질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선물을 쓰는 법을 배우는 것.“(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p.352)

이게 단순히 교육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겠습니까? 신앙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취할 것, 남에게 받을 것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 나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이용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것들이 아닐까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이웃들을 대한다면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키머러는 “우리가 느끼는 생태적 공감의 원은 생명 세계를 직접 경험하면 넓어지고 경험하지 못하면 쪼그라든다“고 말합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낭비하며 살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한국교회 탄소중립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그 주제를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으로 정했습니다. 캠페인은 7가지의 실천 사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녹색 교통, 기후 미식(climate gourmet), 그린 에너지, 슬로우 패션, 녹색 서재, 미니멀 라이프, 생명 경제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는 삶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나 물건의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녹색 기업이나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삶의 방식 자체가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주님의 숲을 이룰 때,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이 다가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숲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이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다운 삶을 통해 우리 믿음을 입증할 차례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날마다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더 큰 이야기 속으로

김기석

더 큰 이야기 속으로



난감한 질문 앞에 설 때가 많다. 그런 질문은 학교 시험과는 달리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했던 햄릿의 질문 같은 것이 그러하다. 시간 속에서 바장이는 인간의 삶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름길이라 여기며 걷던 길이 느닷없이 뚝 끊기기도 한다.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예기치 않은 길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선한 뜻으로 행했던 일이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하고, 불행의 전조인 줄 알았던 일이 행운의 서막이 되기도 한다. 새옹지마 이야기는 삶의 그러한 모호성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 



모호함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일수록 확고하고 단정적인 답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회의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단호하게 답을 제시하는 사람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상찬하며 추종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을 숭배에 가까운 감정으로 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모든 사람은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산다. 무오류에 대한 신념은 교조주의를 낳을 뿐이다. 세상에는 다름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차이를 무질서와 혼돈으로 보기에, 차이가 해소되지 않으면 불편해한다. 과도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폭력적이다. 정신의 무르익음은 차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시인 김승희는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에서 삶의 모호함을 아프게 고백한다.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영원히 결론에 이르지/못하는/나는 하나의 물음표“. 답하기 어렵지만 삶은 결국 선택이다. 그 갈림길 앞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움 때문에 시인은 자신을 “더디 지워지는…울음표“로 소개한다. 물음표와 울음표 사이에 인생이 있다. 머뭇거리면서도 어차피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꽤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에 이르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상대방을 골탕 먹이거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삶의 과정 중에 비롯된 진실한 질문이라면 굳이 정답을 찾아 제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질문자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에 깊이 공감하고, 그런 동일한 질문 앞에서 ‘나는 이런 선택을 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청년들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촘촘하게 직조된 사회의 그물망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보다는 그 속에서 포획된 것처럼 옴쭉달싹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 그 그물망을 찢을 엄두를 내지는 못하기에 비애감은 더욱 깊어간다.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문법 구조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라는 말은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들이 처한 질곡을 반영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신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그저 상처를 다독거리고,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격려하면 그만인가? 성경은 인간의 죄와 욕망 위에 세워진 주류 질서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이 빚어낸 대안적 흐름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출애굽 사건은 계층의 사다리 맨 아랫단을 형성하는 사람들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제국의 질서를 전복하며 시작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지중해를 내해로 거느린 군사대국 로마제국에 맞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과 연결시킬 때만 그 의미가 오롯이 드러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길들이려 한다. 그 체제 안에 머물 때 우리 영혼은 납작해진다. 비루한 일상 속에 허덕이는 동안 우리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남는다. 분주함 속에서 바스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높이와 깊이의 차원을 되찾아야 한다.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우리 삶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지만,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은결든 마음에 하늘빛이 스며든다.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더불어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2021/06/09,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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