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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김기석(2021-11-28)
듣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벧후 3:1-13
(2021/11/28, 대림절 제1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이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두 편지로 나는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서,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신 구주께서 여러분의 사도들을 시켜서 주신 계명을, 여러분의 기억 속에 되살리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는 것과, 또 물로 그 때 세계가 홍수에 잠겨 망하여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일부러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기억 되살리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기를 맞이하며 감회가 새롭습니다. 신앙생활의 주기를 기다림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참 귀합니다. 이미 오셨던 주님을 기억하는 동시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품고 사는 것이 우리 소망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자기 생을 반추하면서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어렵고 난감한 일을 겪기도 했지만 그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경험했기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시간은 과수원 같기도 하고 사막 같기도 합니다(르네 샤르). 기쁘고 행복한 시간도 있지만,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을 내면화하고 우울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완벽한 삶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습니다. 과수원에서 즐거워하는 것도 우리 인생이고, 사막에서 버티는 것도 우리 인생입니다. 다만 그런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선물로 주어진 시간을 값지게 살아가는 비결을 주님은 간결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다림의 절기를 맞으며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죄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면서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전장인 세상살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뿐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지만, 우리는 짐짓 고통받는 이웃들을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재확산되고 있습니다. 중동 난민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폴란드와 벨라루스의 국경지대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하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영국으로 가기 위해 프랑스 해변을 떠났던 고무보트가 전복되어 27명의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별 걱정 없이 사는 이들에게 난민들은 골칫거리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들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지를 두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병자,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과연 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 조롱하는 자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 순수한 마음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이 말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이 더럽혀졌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우리 삶의 병통입니다. 물론 망각이 복일 때도 있습니다. 평생 과거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은 삶을 옥죄는 사슬이 되어 자유스러운 비상을 가로막습니다. 그런 기억에서 놓여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기억을 직시하면서 ‘이제는 나를 놓아 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발목까지 잡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용납합니다. 인간성에 반하는 죄를 저지른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춰내서 뭐하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화해와 용서는 숨겨졌던 진실이 밝혀지고 가해자들의 처벌과 참회가 선행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기억보다 망각을 택할 때가 많습니다. 기억은 고통스럽고 망각은 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딱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값없이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사람으로 택함 받았다는 사실, 주님께서 우리를 장벽을 허무는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편지라는 것,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잊는 순간 우리는 욕망의 벌판을 가리산지리산 헤매게 마련입니다.

욕망이 잡아 이끄는 대로 걷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람이 됩니다. 초대교회 교인이라 하여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낡게 만듭니다. 뜨겁던 사랑의 열정도 시들하게 만들고, 순수하게 빛나던 것들도 바래게 만듭니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믿음이 해이해졌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시 오시겠다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자꾸만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욕망대로 살면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4). 정말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시편 73편의 시인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거만한 자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을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시73:7-9).

이런 현실을 목도하다 보면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조롱하는 이들이 힘을 얻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은 체 하지만 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근시안으로 보면 세상은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옵니다.

•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 시편 시인도 이와 똑같은 고백을 하면서 인생의 유한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시 90:5).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시 90:12)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유한함을 되씹으며 허무에 빠진 이의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이라는 선물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내고 싶은 이의 간절한 청원입니다. “삶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달고 저주를 퍼붓는 자에게 매섭게 군다“(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이세진 옮김, 인플루엔설, p. 96-97)지요?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 농부 이야기는 특별한 행운을 얻은 사람의 행운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의 숨결을 느끼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남은 질문이 있습니다. 주님은 왜 속히 이 세상에 오시지 않는 것일까요? 믿음 때문에 고통을 겪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었을 겁니다. 주님이 약속을 잊으신 것일까요? 땅의 현실을 모른 척 하시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지금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이들, 욕망에 따라 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기다리는 집행유예執行猶豫의 시간입니다.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먼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애태움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마음을 깨닫고 주님께 자기 마음을 가져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그 인생의 밑바닥에서 문득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고, 돌아갈 결심을 했을 때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단테의 <신곡> 첫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나 올바른 길을 잃고/어두운 숲 속에 있었노라“. 자기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빛은 갈라진 틈을 통해서도 스며드는 법입니다.

• 기다림의 자세
주님의 시간은 차분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 혹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베드로는 아주 간명하게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벧후3:11b-12a) 거룩하고 경건한 삶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레위기 19장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경외하는 이의 삶은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몫을 남겨둘 줄 아는 마음,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태도, 힘이 있다고 하여 약자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는 것,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않는 것,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막연히 좋은 날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나태함입니다. 나태함은 영혼의 활기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그 날‘을 앞당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선취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상상하십니까? 이런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비전, 곧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세상(계 21:4)을 떠올립니다.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이들은 지금 여기서 그 세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공해가 없다고 믿는다면 지금 여기서 공해를 만들지 않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쟁이 없다고 믿는다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곳에 기쁨과 감사가 있다면 지금 현실 속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경탄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다른 이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 다른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기다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기다리는 세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벧후 3:13)

새 하늘과 새 땅은 정의가 깃들여 있는 곳입니다. 불의를 용인하고, 참회하지도 않은 이를 용서하는 곳이 아닙니다. 역사 앞에 지은 죄를 참회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계절, 우리 마음에 주님이 머무실 여백을 마련해야 합니다.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요일 2:16). 촛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는 것처럼, 우리의 어둔 마음에도 하늘의 빛이 스며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기다림의 시간

김기석

기다림의 시간



교회력으로 일년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하여 성탄절기, 주현절기, 사순절기, 부활절기, 성령강림절기를 거쳐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그 주기를 완성한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다림은 설렘과 조바심을 동시에 안겨준다. 설렘은 다가올 존재에 대한 기억 혹은 기대가 우리 영혼 속에 일으키는 작은 파문이다. 조바심은 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흔들림이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세상사에 초연한 사람이거나 영혼의 불씨가 꺼져가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다가오는 시간을 공포로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기대 현실의 공포를 이겨내려 한다. 기다린다고 하여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거니와 밀어낸다고 하여 시간이 뒷걸음질치지도 않는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보드 위에서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서퍼들처럼 시간의 파도를 타고 영원의 해안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도 낡아질 수 있다. 사실 이 말은 어폐가 있다. 낡아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다. 삶은 반복이다. 매일 반복하는 일들이 우리 힘을 고갈시킬 때가 많다. 반복에 지친 이들은 커다란 변화를 꿈꾼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 새로운 장소에 대한 맹목적 그리움은 그렇게 발생한다. 그러나 반복이 늘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늘 흐름 혹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반복 속에서 경험하는 미세한 차이가 우리 삶의 무늬를 이룬다. 사람들은 시간 속에 마디를 만들어 지속하는 시간의 권태를 이겨내려 한다. 국가가 제정한 기념일, 축제, 각 개인의 일정표에 매년 기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적 기념일들은 시간을 건너기 위한 일종의 징검돌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일곱 번째 달인 티쉬리월에 로쉬 하샤나라는 신년 축제를 즐긴다. 대략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에 해당되는 날이다. 로쉬 하샤나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날, 허비한 인생을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는 날, 하나님께 돌아가는 날이다. 이 날을 알리는 제사장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가까운 냇가나 강에 나가 옛 삶의 흔적들을 띄워 보내는 의례를 행한다. 20세기의 유대 철학자인 마이마너디는 뿔 나팔 소리 속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너의 악한 방법과 생각에서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로쉬 하샤나는 시간을 새롭게 하는 의례인 셈이다. 



겨울의 초입에서 맞이하는 대림절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의 파도를 타고 넘느라 힘겨웠지만 삶의 열매는 부실한 것 같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 쉬운 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푼푼하기는커녕 서부렁하기 이를 데 없어 부끄럽지만 우리 삶을 시간의 주인이신 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설사 꾸지람을 들을지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꾸지람은 우리를 불모의 땅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사랑일 테니 말이다. 나태함과 변덕스러움, 비열함과 잔혹함이 넘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평화와 생명을 꿈꿀 수 있다면 아주 버림받은 생은 아니다.



대림절의 초에 하나 둘 불이 밝혀질 때 우리 속에 도사린 어둠과 우리 사회를 은밀히 지배하고 있는 공포와 혐오와 분열의 영이 스러질 수 있으면 좋겠다. 빛이 그리운 시절이다. 그런데 시간의 주인이신 분은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름값을 하며 살고 싶다.



(2021/11/24,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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