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이기에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재훈(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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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이기에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욥 42:1-6
(2025/07/27, 성령강림 후 제7주)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 알 수 없음이 주는 고통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날이 참 무덥습니다. 더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무더위가 여름날,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손님이라는 생각 또한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시간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우리는 늘 뭔가를 떠나보내거나 어딘가로부터 떠나오며 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고 또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 박노해는 자신의 일곱 살 때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아기도 아니고, 소년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고, 보호의 품은 깨어졌으나 홀로 걸어갈, 내 안의 무언가는 깨어나지 못한 나이(일곱 살)." (박노해, <눈물꽃 소년>, 느린걸음, 2024, p.45)
‘추억’한다는 것도 이렇게 근사하게 해야 하나 봅니다. 시인은 그 후로 60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아오게 되는데, 힘들지만, 즐거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잠시 ‘그리움’에 젖어 들었습니다.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많을수록 그리움 또한 많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움’이라고 하는 감정은 특히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휴가나 명절을 맞으면 ‘고향’을 가게 되는데, 기차를 타고 가다가 횡성-진부-정동진역을 지나게 되면, 뭔가 ‘따뜻함’과 ‘아련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보통 ‘향수’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향수’라는 감정은 주로 이런 사람에게 찾아오는 게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떠나왔지만, 아직 어딘가에 이르지 못한 사람’ 혹은 ‘어딘가에 이르지 못해, 아직 떠도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에게 찾아오는 게 ‘향수’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향수’라는 개념을 병으로 진단한 최초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호퍼’입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의대생이었는데요. ‘요하네스 호퍼’는 산속에 주둔하고 있던 ‘스위스의 용병들’이 바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설명하고자 이 ‘향수’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향수’는 영어로 ‘노스탤지어(nostelgia)’입니다. 이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귀환’이나 ‘귀향’을 뜻하는 그리스어 ‘노토스(notos)’라는 말과 ‘고통’을 뜻하는 ‘알고스(algos)’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해외에 파견된 군인들(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때문에 얻게 된 ‘그런 질병’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향수’에 관한 이야기는 구약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탈출한 ‘히브리 민족’은 이제 엘림을 떠나서 신 광야에 이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점 먹을 것도 떨어졌고, 새로운 먹거리 또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출 16:3)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는 늘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과거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반응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히브리 민족은 ‘살던 곳’(이집트)에서 떠나왔으나, 아직 ‘살아갈 곳’(가나안)에는 이르지 못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향수라는 병에 걸린 민족’이었습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향수’의 어원을 살펴보다가 ‘고통’이라는 것이 ‘무지’ 때문에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고통을 초래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알 수 없음’이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 교만하게 하는 지식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안다는 것’(지식)은 무언가를 판단할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안다는 것’이 사람을 참 이중적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반대로 발목을 붙잡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하나의 근원적 명제를 던집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 새한글성경은 이 ‘지식’이라는 것을 ‘사람을 거들먹거리게’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관해 말할 때, 등장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바울이 말한 이 이야기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형제를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 ‘지식’이라는 것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후반부에 가서 다시 다루겠지만, 바울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만이 답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여러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닌 이상은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방을 친절히 대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알아가고 또 그 사람과 가까워지다 보면, 이전의 친절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상대를 점점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상대를 잘 모를 때는 친절을 베풀지만, 그 사람을 알게 되면 될수록 ‘친절’이나 ‘환대’를 잘 베풀지 못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환대’는 가능한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 그러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서 시간을 오래 보내다 보면, 상대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상대에 대한 ‘지식’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을 노력해야 하느냐? 상대에게서 ‘좋은 점’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쉽게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 누구 혹은 무엇이든 간에 ‘모르는 부분을 늘 담겨둬야 한다.’라는 점입니다. 모르는 부분이 없어지는 순간,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모르는 부분이 없어지면’ ‘그리움’ 또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리움’이 사라진 바로 그 상태가 ‘교만한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그리움’을 늘 안고 살아야 합니다.
∎ 완벽에 가까운 재앙
구약의 <욥기>는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인데, 이 <욥기> 안에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 다시 말해 ‘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 ‘앎’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하나는 욥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세 친구의 ‘앎’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욥의 ‘앎’입니다. 오늘 이 ‘두 가지 앎’에 대해 나눠볼까 합니다.
<욥기>의 저자는 욥이라는 인물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정해 두었는데, 이 욥은 하나님 앞에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욥은 물질 또한 풍부했는데, 그에게는 일곱 명(7명)의 아들과 세 명(3명)의 딸이 있었고, 재산 또한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양, 낙타, 소, 나귀 가릴 것 없이 모든 가축이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까 하여 자녀들을 대신해 ‘번제’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욥은 그야말로 신앙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절망에 빠뜨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욥을 시험해 보겠다는 사탄의 요구가 있었고, 하나님은 흔쾌히 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사탄은 이제 욥의 소유 한 가지 한 가지를 빼앗아 가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먼저 욥의 가축과 종을 빼앗아 옵니다. 하루는 욥이 자식들과 식사하고 있는데, 일꾼 하나가 달려옵니다. 그는 말하기를 갑자기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가축을 빼앗고, 종들을 칼로 쳐서 모두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스바 사람’은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고, 약탈을 일삼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일꾼의 말이 다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일꾼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욥에게 말하기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더니, 양 떼와 목동들을 모두 살라 버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아찔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 명의 일꾼이 찾아오더니, 갑자기 ‘갈대아 사람들’이 나타나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욥의 재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또 한 명의 일꾼이 찾아오더니,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갑자기 강풍이 불더니 집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욥의 모든 자녀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욥이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면, 그야말로 그에게 일어난 일은 ‘완벽에 가까운 재앙’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 잔인한 일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소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단 하루 만에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상실’과 ‘절망’을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욥은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이지만, 주님께 ‘원망’보다는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이제 <욥기>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가 등장합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 욥은 깊고 깊은 절망 가운데에서도, 한 줄의 빛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 쏟아져 나오는 말
그런데 욥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일은 이다음에 발생했습니다. 어쩌면, 욥이 당했던 재앙은 차라리 사탄을 통해 온 재앙 정도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본격적인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련은 그의 오랜 벗인 ‘세 친구의 방문’을 통해 시작됩니다. 그들의 이름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었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욥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욥의 상황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이 상황을 묘사하기를, 친구들은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1:12b)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살아 있었지만, 죽음에 가까운 자였습니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를 해 줍니다. <욥기>는 세 친구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1:13)라고 말했습니다. 세 친구는 욥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를, 욥이 가장 원했던 위로를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커다란 공감’과 ‘진심 어린 위로’를 경험한 욥은 그동안 헤아리지 못한 자기 내면의 말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는 이미 죽은 줄 알았던 마음, 마비되고 얼어붙어 차마 헤아리지 못했던 말들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게 됩니다. 아주 찰나였습니다. 욥은 거의 쏟아내듯이 말을 토해냈습니다. 홀로 감내해야 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자기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리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들은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독백에 가까운 이 욥의 말에 말을 보태는 친구들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이제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논쟁이 펼쳐집니다. 어느 순간, 위로는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이들의 논쟁은 <욥기> 4장에서 시작하여 31장까지 이어집니다.
∎ 세 친구들의 교만
<욥기> 11장에는 욥의 세 친구 가운데, 마지막으로 소발이 등장합니다. 그는 엘리바스, 빌닷과 마찬가지로 욥이 지은 죄, 욥이 지은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친구들의 논리는 모두 동일했습니다. 공의롭고 정의로운 주님이 결코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으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그럴듯해 보입니다. 믿음 좋은 자들의 말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소발의 이야기를 듣던 욥은 그의 말에 이렇게 응수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곤 너희밖에 없는 것 같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너희와 함께 사라질 것 같구나. 그러나 나도 너희만큼은 알고 있다. 내가 너희보다 못할 것이 없다. 너희가 한 말을 모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12:1-2)
욥은 친구들의 지혜를 비꼬았습니다. 공감이 배제된 조언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그는 알려주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하고 판단하는 말’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꼬집어 설명해 줍니다.
“한때는 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적도 있지만, 지금 나는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의롭고 흠 없는 내가 조롱을 받고 있다.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너희가 불행한 내 처지를 비웃고 있다. 너희는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민다.”(4-5) 욥은 머리로만 아는 앎이 어떻게 진정한 앎이 될 수 있냐며, 친구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넘어지려는 욥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안다고 하는 것’은 ‘경험’과 관련됩니다. ‘참된 앎’은 자기 경험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고통’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 내게 해줬던 말과 행동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또한 잘 알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일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어쩌면 <욥기>는 아무도 욥보다 더 심한 고난을 겪을 수 없게끔, ‘욥의 고난값’을 가장 높게 설정해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만약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한 고난의 ‘근사치 정도’라도 경험했더라면, 욥을 그토록 구석으로 내몰진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경험’과 ‘공감’이 부족했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자신들의 한정된 경험 안에서만 바라보았고, 그러하였기에 그들은 개의치 않고, 욥을 재단하고, 정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21장에 넘어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 내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조롱하려면, 내 말이 다 끝난 다음에나 해라.”(2-3) 욥에게 필요한 위로는 그리 대단한 위로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귀가 되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귀’가 되어주기보다는 욥의 상황에서 쓸모없는 ‘입술’이 되었던 것입니다. 욥은 외로웠습니다. 욥은 친구들 때문에 ‘재앙’과 ‘정죄’라는 ‘이중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 욥의 교만
그러나 욥에게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욥 또한 친구들과 논쟁을 벌이느라 너무 많은 ‘자기 지식’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또한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자기 생각의 틀’ 안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욥은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탄과 원망, 호소의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질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더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이름은 아카드어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입니다. 욥의 이름 자체가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게 참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질문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곧 ‘자기 정체성’을 잃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욥은 자기 절망에 집중하느라 하나님의 크심을 망각한 것입니다.
<욥기> 38장에 이르면, 드디어 잠잠히 계시던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듣고 계셨습니다. 세 친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욥의 이야기도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친구들의 말에는 거의 침묵을 지키셨고, 오직 욥을 향해서만 많은 말을 쏟아내셨습니다.
주님은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38:2, 4) 하나님은 다정하거나, 친절하게 등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을 깨고 등장한 하나님은 욥의 무지를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욥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한 욥은 친구들과 논쟁하느라 쏟아냈던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런저런 말을 보태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아프게 고백했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42:2-3)
욥은 하나님에 대해 다 안다고 자부했던 그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욥은 결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임을 고백했습니다. 욥의 마음속에 다시 하나님은 ‘질문의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초대 교부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시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엇이나 네가 이해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일 수 없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지혜로 가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한 성인(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실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광활한 우주, 혼돈의 바다, 찬란한 태양, 칠흑 같은 어둠. 알 수 없는 부분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
다시 바울이 한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라고 말했습니다(고전 8:1). ‘아는 사람’은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알려고 하는 열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 문장 뒤에 한마디 말을 덧붙이는데, 그는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고전 8:2)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뭔가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뭔가를 알지 못한다. 모른다.’라는 ‘무지에 대한 자각’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참 무용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사랑’을 논해야 합니다.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어린 왕자>라는 소설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긴 편력 끝에 ‘순수함’을 지불하고 얻은 소득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요청되는 사막이며, 그 사랑은 긴 시간을 거쳐 공들여 만들어져야 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새번역). 사랑은 사람을 바르게 세워줍니다(새한글). 누군가를 다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지상의 명령’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욥은 끝끝내 ‘고난과 재앙’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깨달은 바는 고통의 의미를 찾는 일의 ‘무의미함’이었습니다. 욥이 자기 속내를 거둬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을 때, 하늘의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끝까지 ‘시련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럼에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었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아픔이 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음’으로 두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의 사정’ 또한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알 수 없음’ 앞에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안개 같은 상황이 사랑을 실천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더 깊고, 더 넓은 믿음의 세계로 데려가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