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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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김기석(2021-02-28)
듣기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요16:19-24
(2021/02/28, 사순절 제2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에게 물어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한 말을 가지고 서로 논의하고 있느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희망의 문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수에서 경칩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무들이 조금씩 생기를 띠고 있습니다. 버드나무에 생기가 도는 모습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봄 풍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겨울을 견딘 로제트(rosette) 식물들도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삶은 이렇게 지속됩니다. 우리 속에도 생기가 깃들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전성 문제로 설왕설래 하기도 합니다만, 그 속사정을 잘 아는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백신이 효과도 좋고 안정성도 뛰어나다 합니다. 차례가 되면 접종을 잘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지내야 하겠습니다. 축구 경기를 보다보면 해설자들이 시작 5분과 마지막 5분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봄은 우리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마력을 보입니다만 공공의 안전을 위해 조금만 더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근일 만났던 이들 가운데 확진자와 동선이 겹쳤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증상이 없어도 머리 속에 단편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합니다. ‘혹시 나도…그러면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 모두에게 큰 폐가 될 텐데‘ 하는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런 생각에 골똘하다 보면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다가 만났던 이가 음성으로 판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면 갑자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한 느낌이 찾아옵니다. 불안은 떨쳐버리기 어려운 인간의 버릇입니다. 불안은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입니다. 불안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황량하고 낯선 세계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지레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견뎌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에 바닥짐(ballast)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바닥짐은 배의 무게 중심이 흘수선(吃水線, 선체가 물에 잠기는 한계선) 아래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싣는 짐이나 물을 말합니다. 저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바닥짐이라는 생각을 늘 하며 삽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이 든든한 삶의 비결입니다.

∙혼돈에 빠진 제자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아주 뜻밖의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어둡고 음울한 이야기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메시야적 통치를 기대했던 제자들의 기대에 찬 물을 끼얹었습니다. 급기야 주님은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요16:5),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요16:1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질서정연한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혼돈에 빠져드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혼돈은 차이를 제거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만났던 풍랑이 형태를 바꾸어 찾아온 격이라고 할까요?

이해란 경험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경험 세계에 없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직면하여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을 뿐입니다. 종교 체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 일상적 삶에 균열을 일으키며 다가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체험을 ‘돌파’(breakthrough)라는 말로 나타냅니다. 우리의 합리적 지각을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가 들어선다는 말일 겁니다.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성스러움 앞에 선 인간이 보이는 반응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신비한 두려움과 매혹’(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이 그것입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섰던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고기잡이 이적을 경험한 베드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라고 고백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낯선 두려움 앞에 서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이고, 또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 때문에 혼돈에 빠진 그들에게 주님은 또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요16:20)

우리는 주님이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머지 않는 장래에 닥쳐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의 마음을 찢어놓을 겁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더불어 꿈꿨던 하나님 나라의 꿈이 좌절되었다는 자각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승의 죽음 앞에서 자기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그 현장을 피하여 달아났다는 자책감 때문일 겁니다. 주님은 그런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애통하는 반면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질서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성전 체제의 하수인들은 자기들의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던 예수를 제거함으로 한 시름 덜었다고 축배를 들 것입니다.

∙철저한 변화
그러나 그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힘보다 강합니다. 그런 진실이 실체화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놀라운 변화야말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게 하시는 분(시84:6)이고, 우리가 입고 있던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입히시는 분(시30:11)입니다. 지금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분들은 이런 변화가 실감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 뜻에 확고하게 서 있다면 이런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해산하는 여인을 예로 듭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진통을 두려워하지만, 낳고 나면 출산의 기쁨 때문에 고통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과 해산의 과정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는 면에서 일치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고통의 용광로를 거쳐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똘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도 비슷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반 일리치는 원래 유능한 판사였습니다.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명랑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였습니다. 좋은 아내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짜증이 는 것입니다. 가정이 족쇄처럼 느껴진 일리치는 일을 핑계 삼아 집 밖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의 질투가 커지고 불화는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됩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처럼 선하게 살던 사람이 왜 일찍 죽어야 하는지, 그 죽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지만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혼돈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갈수록 자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즐겁게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삶을 성찰하기 시작합니다. 공직자로서의 살아온 삶과 상류층의 관습과 사고방식에 절어 살아왔던 삶이 겉보기엔 근사했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마침내 참회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어떻게든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씁니다. 역전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자 공포는 사라지고 환한 빛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김나지움에 다니던 아들이 병상에 찾아와 그의 손을 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똘스토이는 그 순간 벌어진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빛을 보았다.“(똘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강은 옮김, 창비, p.117). 아들이 너무나 안쓰러웠고, 아내도 불쌍했습니다.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죽음의 공포는 사라졌고 빛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고통은 처음에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나중에는 차분히 자기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이 고마움이라는 사실과 자기 주변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만듭니다. 고통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 잘 맞아들여 그 속에 숨겨진 복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은 자기 엉덩이 뼈를 다치는 고통 속에서도 ‘나를 축복하기 전에는 놓아드릴 수 없다’(창32:26)고 말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과정을 밟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울며 애통하겠지만 주님은 그것을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
십자가는 절망의 심연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것은 영원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과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 기쁨을 맛본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더 큰 세계에 접속한 자답게 삽니다. 일상적 근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잗다란 일에 시달려 중심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중심과의 일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안에 거대한 기둥 하나가 생겼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인력을 거스르며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니다(골3:1).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지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접속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요16:24). 이 구절을 맥락과 관계없이 받아들이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나 구해도 된다는 말로 오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23절이 말하는 ‘그 날’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묻지 않아도 절로 자명해지는 날이고, ‘그 날‘은 하나님의 뜻에 접속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된 이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과 발로 살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경외심, 내적 평안, 신뢰, 기쁨, 균형감각, 타인에 대한 존중, 사랑, 희망, 친절함, 연대 의식, 일용할 양식 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진실하게 구한다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명예, 이익, 권세, 허영심을 충족할 만한 것들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일종의 연금술입니다. 슬픔과 근심이라는 재료로 기쁨과 감사의 삶을 빚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철저히 신뢰할 때 그러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날이 갈수록 ‘새 하늘과 새 땅‘의 노래집에 실렸던 곡 가사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슬픔의 파도에 떠밀려도 기쁨의 해안에 닻 내릴 수 있도록/절망의 벼랑에 떨어져도 희망의 빛줄기 잡을 수 있음을”. 우리 삶이 이런 끈질긴 희망 위에 세워지기를 기원합니다. 근심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주실 주님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십시오.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오늘도 마음을 여십시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자기답게 산다는 것

김기석

자기답게 산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제안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녹화도 진행했습니다. 그 일이 꽤 의미 있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소거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갈 때마다 외롭지 않은 것은 그곳에 스며있는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도 그리고 찬양 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부분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핍니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책무더기를 보며 어떤 분들은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는 법’이라는 책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읽을 책이에요.” 그러면 더는 묻지 않고 웃고 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많이 봤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도 아는 누군가가 머물던 장소임을 알면 돌연 친숙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에 화면에 비쳐지는 공간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달력의 지시사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구 한 개를 빼지도 못했고, 계단을 자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이동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답게 살기’와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실천 사항을 두고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답다’라는 접미사는 체언에 붙어서 체언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히 한정할 수 있어야 ‘자기다운’ 삶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자기’라는 말 속에는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하지만 늘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행여 다른 이들과 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뒤따라오는 이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늘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제게는 그런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참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적, 사회적 지위, 재산, 외모’ 등이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재는 척도처럼 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 보니 나보다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시달리고, 나보다 못한 이들은 낮춰보는 버릇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 수는 없을까요? 18세기 유대교 하시딤 지도자인 주시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어째서 너는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어째서 주시아가 되지 못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미움, 질투, 원한 감정, 복수심, 밑도 끝도 없는 분노, 심술궂음, 절망...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삶의 부산물들입니다. 그것을 제때에 분리하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해와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그것을 분해하여 흙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들려 하고, 오히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생의 부산물에 묶어 두기에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일상을 중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던 인습적 과거에서 자꾸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다가도 때가 되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곤 하셨습니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삶은 건강해집니다. 지금은 물러서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을 맞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봄볕이 잠시 머문 화단에서 푸른 움이 터 오르듯 하나님의 숨과 만날 때 척박해진 우리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야말로 바벨의 소음이 오관을 뚫고 쳐들어오는 판에 듣기는 무슨 음성을 듣겠습니까. 온갖 소리와 빛깔과 모습과 느낌과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을 뒤덮고, 열두 살짜리면 이미 자동차 이름, 자전거 선수 이름, 축구 선수 이름, 영화 배우 이름, 모르는 게 없는 판인데 들리기는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이 북새통 속에서 어찌 내심의 노래가 들려 오겠습니까.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새 소리와 트는 새싹으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러끌레르끄, <게으름의 찬양>,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1988, p.45-46)



러끌레르끄 신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에 골몰하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몰두하느라,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는 외면하고 삽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그 신비 앞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 소리, 새싹이 움트는 소리,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화성탐사선인 퍼시비어런스 호가 보내온 화성의 바람 소리를 들어 보셨는지요? 그 소리는 우리를 저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의 신비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누가 대신하여 살아주지도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내야 합니다. 더 큰 세계와 접속된 사람은 현실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겁니다.



예년 같으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입니다. 한 자리에 다 모여 졸업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지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하는 식의 감격스러운 졸업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한 과정을 마치는 의례를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급 학교를 졸업한 이들, 그리고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도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서슴없이 학생들과 교회학교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백신 접종이 드디어 시작된다지요?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백신 접종에 응하시면 좋겠습니다. 백신이 만능은 아니어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의 기본 방역 지침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백신 접종 기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혐오, 냉소, 분열증을 예방해주는 백신은 없을까?’ 올바른 신앙이야말로 그런 백신이 아닐까요?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새로운 날을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봄을 단순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의 봄소식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2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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