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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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

김기석(2020-02-16)
듣기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
막7:31-37
(2020/02/16, 주현 후 제6주)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유랑하는 설교자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가 주춤해지자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가 찾아왔습니다. 이래저래 불편합니다. 그래도 우수 절기를 앞둔 때인지라 산수유는 벌써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니 힘겨워도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유랑하는 설교자라고 말합니다. 랍비들처럼 어느 한 곳에 머물며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바람이 임의로 불듯 어떤 그리움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방 지역이라고 하여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더불어 정결한 삶에 대해 논쟁을 벌이신 후에 두로 지역으로 이동하셨다고 말합니다. 두로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조용히 지내기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기적 행위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그리스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런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막7:27).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냉정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짐짓 냉혹하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과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예수님이 심정적으로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저의 견해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막7:28). 딸의 치유를 원하는 어머니의 절박함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언어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어둠이 걷힐 날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일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습니다. 시돈은 두로보다 북쪽에 있는 지중해변의 도시입니다. 시돈을 거쳐서 간 데가볼리 지역은 갈릴리 호수의 동편 지역입니다.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한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괜히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이것은 이사야 9장의 예언과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고 말한 이사야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사9:1)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가가 전하는 주님의 행로는 이 예언의 실현이었던 셈입니다. 주님은 ‘어둠이 걷힐 날‘을 가져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데려온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야말로 어둠 속에 갇힌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막4:12) 말씀하셨습니다.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고 책망하시기도 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어쩌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귀 먹었다고 번역된 단어 코파스kophos는 시력 혹은 청력이 ‘무디다’, ‘둔하다’는 뜻입니다. 말 더듬는다mogilalos는 말 역시 간신히, 힘들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왠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 사람을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십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실 수 있는 분이 그를 따로 데려가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에는 이와 유사한 장면이 또 나옵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벳새다의 눈먼 사람을 만나신 주님은 그를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막8:23).

‘무리‘ 혹은 ‘마을‘은 익숙한 세계, 곧 통념이 작동하는 현장입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익숙한 세계는 정신의 늪일 때가 많습니다. 익숙한 세계에서는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기 어렵습니다. 모든 게 당연한 세계에는 감사가 없고 경탄이 없고 새로움이 없습니다. 시인 김승희 선생은 그래서 “당연의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그는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라”고 도발합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시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통념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따로 불러 세운 것은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자기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없는 법입니다. 가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 훈련을 받은 이들의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가 너무 협소하다는 사실을 알고 답답함을 느끼지만, 그 신앙의 틀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공감은 하면서도 께끔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틀 밖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그를 따로 불러 세우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언의 성취
그런데 치유의 과정이 좀 독특합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게 당시의 치유자들이 하던 행태를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침에 있는 치유력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을 사용하셨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을 당연의 세계, 익숙한 세계에서 끌어내려 하시는 주님이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게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었다는 말은 은유적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대개 모욕의 의미인데 주님이 침을 뱉으신 까닭은 성경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탄식하다는 뜻의 스테나조stenazo는 뭔가에 눌려 답답한 상황, 혹은 그로 인해 터져나오는 내적 신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23)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8:26).

주님의 탄식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답답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는 명령법 수동태로 ‘열려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예수님 당시에 히브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것이 언어인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에 이 아람어가 몇 개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꽤 됩니다. 압바, 달리다쿰, 마라나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등이 그것입니다. 민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말을 번역하지 않고 남겨둔 셈입니다. 표준어에 비해서 사투리 혹은 방언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서울말을 쓰던 사람들도 고향 사람 만나면 고향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투리를 통해 정서적 일치 혹은 연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바다‘라는 외침이 떨어지자 그는 곧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역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의 날이 올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사35:5-6)

∙그가 하시는 일은 훌륭하다
결국 이 치유 이야기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 대한 놀라운 치유 이야기이지만,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통해 온전함을 회복한 그 사람은 말을 똑바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치유의 이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 그가 메시아적 질서 속에 들어갔음을 암시합니다. 예수와 만나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만났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말대로 하자면 먹구름을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던 사람이 마음 속 구름이 스러져 푸른 하늘을 보게 된 겁니다(‘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머리를 덮은 쇠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있던 사람이 그 쇠항아리를 찢고 맑은 하늘을 보게 된 겁니다. 시인은 “아침 저녁/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볼 수 있는 사람은/외경(畏敬)을/알리라.”라고 노래합니다.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고, 차마 발걸음도 조심스럽게 살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 예수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거나, 쭈뼛거리며 살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은 침묵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손자 손녀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도 이런 것일 겁니다. 얼마 전에 색맹으로 태어나 녹색과 적색을 구분하지 못하던 남자가 색맹 교정용 안경을 끼고 감동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내가 생일 선물로 선글래스를 선물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는 순간 뭔가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하늘도 보고 꽃도 보더니 울먹이기 시작합니다. 안경을 벗었다 다시 쓰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들 눈을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귀여운 아이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편은 돌아앉아 눈물을 훔칩니다. 그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불행의 무게를 떨쳐버린 사람과 목격자들은 주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말리면 말릴수록 더욱더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막7:39).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적이 이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스스로 말 잘 한다, 영적으로 밝다 하는 이들의 말로 인해 개신교회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해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들어야 할 말을 바로 들어야 우리 영혼이 맑아집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해야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우리는 당당해집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바다’라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 가슴에도 우렁우렁 들려오기를, 그래서 우리의 귀가 밝아지고 혀가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뜻밖의 손님

김기석

뜻밖의 손님



눈송이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던 주일 오후, 밖에 있는 내게 아내가 두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장은 부등깃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의 분홍빛 생명체였다. 다른 한 장은 눈을 또랑또랑 뜬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비둘기 한 마리였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내 서재에 연해 있는 베란다 창밖에 놓인 실외기 틈에 외로운 생명 하나가 깃들었던 것이다. 저물녘 집으로 돌아가 창문을 열어보니 어미 비둘기는 갑자기 닥쳐온 추위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경계는 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비둘기 배설물이 켜켜이 쌓여 있어 습도가 높은 날에는 그 냄새가 문틈으로 스며들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날이 푸근해지면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여린 생명이 내 창가에서 탄생한 것이다. 차마 그 가족을 내쫓을 수는 없고,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까지 불편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고 여린 것들을 대할 때 우리 마음은 말랑말랑해진다. 여린 생명은 종이 무엇이든 우리의 굳은 표정을 녹여 벙싯 웃게 만들지 않던가. 새싹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정진규 시인은 봄볕에 돋아난 새싹을 가리켜 초록의 자유가 터졌다고 노래했다. 그 초록을 트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새싹은 별이고 빛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신비 아닌 것이 없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신작 소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남녀 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다.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 말 히즈라는 신성한 영혼이 깃든 육체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일종의 멸칭이라 할 수 있다. 히즈라들의 내면에 깃든 어둠이 깊다. 어느 날 안줌은 계단에 버려진 세 살배기 아이 자이나브를 데려가 키우기 시작한다. 안줌은 한 인간이 타인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자각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이었다. 자이나브와의 만남은 안줌의 삶에 카타르시스적 전환점이 되었다. 자이나브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는 자기 속에 깃든 어둠과 화해해야 했고, 단순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다.



누군가의 품이 되어주려 할 때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거룩해진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새벽에 일어나면 한 그릇의 물도 엎지르지 말고, 한 삽의 흙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자고 말한다. 차라리 달팽이라도 어루만지고, 풀잎을 가슴에 담고 설레어 보라는 것이다. 시인은 ‘풀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방울’을 호명하며 말한다.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인간은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할 때 거룩하다 말할 수 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 모두 변화를 경험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는 흙과 같은 존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뜻하지만, 스스로 거룩함을 자처하는 이들이 정작 거룩함을 알지 못한다. 거룩함이란 잣대를 가지고 다른 이들을 재고 가르는 이들은 예수의 마음에서 가장 멀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노골적이든 은밀하게든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깊어진 것 같다. 최근에 외국을 다녀온 이들은 아시아인들이라 하여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불쾌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속상해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염의 위험을 알면서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의료진들, 방역을 담당하는 분들, 지원 업무를 하는 분들은 누군가의 품이 되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연약한 것들을 부둥켜 안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증오와 혐오의 바이러스는 스러진다. 그들이말로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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