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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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주님의 빛을 받아

김재흥(2022-05-15)
듣기

성경본문: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 시편 36:5~10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위로와 소망이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우크라이나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주중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무엇보다 새 정부가 극단적으로 반반으로 나누어진 이 사회를 지혜롭고 진정성 있게 잘 통합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통합은 자기를 중심에 놓을 때는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이득과 독단적인 주장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는 통합은 진정한 통합일 수 없습니다. 정의, 평화, 공의, 존중과 같은 보편진리를 중심에 놓을 때만 통합은 가능합니다. 부디 새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 시국, 세계적인 경제 불황, 북한과의 관계, 한미-한중의 외교 균형, 기후위기 등의 문제를 하나하나 잘 대처해 나가 국민이 안정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어 나가길 소망합니다.

• 무엇을 보고 있는가?
오늘은 우리가 보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눈은 정말 많은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이 중 시각, 곧 눈을 통해 얻는 정보의 양이 약 90프로라고 합니다. 사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봅니다. 시계, 사람, 날씨, 하늘, 나무, 길, 길 위의 비둘기, 화단의 꽃들, 건물, 신문, 책, 텔레비전, 컴퓨터, 핸드폰 등등.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컴퓨터와 핸드폰을 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각종 문서 작업과 설교 작성, 영상 편집 작업 등으로 인해 컴퓨터 사용시간이 많습니다. 또 코로나 시국 이후 사람들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 플랫폼을 통해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보고 있지요. 오징어게임, 사랑의 불시착, 나의 아저씨, 빠찡코 등등. 볼 것들이 홍수처럼 밀려들면서 우리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시력이 코로나 이전보다 조금 떨어졌다고 하지요. 저는 요즘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하나의 작업을 끝내고 이어서 또 다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라도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눈을 쉬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눈이 안 좋아지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눈을 아껴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꼭 보아야 할 것인가? 안 보아도 되는 것인가?도 간혹 생각합니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가 재미난 구절을 보았습니다. 저는 인터넷 포털 뉴스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살펴보는데, 나 선생님은 뉴스나 드라마를 별로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끼리는 다 알고 하는 이야기인데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가 많다고 합니다. 아예 텔레비전을 본인 손으로 안 켜고 지낸 지 십 년이 훨씬 넘었답니다. 나 선생님은 매체에 대한 접근이 줄었다고 해서 비사회적이 되거나 세상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정보를 접하지 않으니 문제의 양상이 더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고,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의 내면이 부실한 것은 별 영양가도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보고 들으면서 살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석진 시인의 <자연 닮기>라는 시의 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산에 사는 이는/ 산을 닮았다
바다에 사는 이는/ 바다를 닮았다
산을 닮아 포근하고/ 바다를 닮아 넉넉하다
시를 여기까지 읽다가, 에이, 산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 산을 닮고, 바다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 바다를 닮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을 읽는 순간, ‘맞다 맞아’를 연발했습니다. 다음 구절은 이렇습니다.

도시에 사는 이는/ 도시를 닮아 창백하다
정말 맞는 말이죠? 도시에 살아도 산 같고 바다 같은 이도 있겠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 대부분은 정말 창백합니다. 창백한 콘크리트와 시멘트와 그리고 생명력 없는 핸드폰과 모니터만 보고 사니 창백할 수밖에요.

만약 인생을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있다면, 또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가 닮게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면서 살고 계십니까?

• 시편 36편 기자
시편 36편의 기자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그의 주변에는 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고, 자기의 잘못을 전혀 살피지 않고, 잘못을 살피지 않으니 그 잘못을 고치지 않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사기와 속임수뿐이고, 그는 늘 남 속일 궁리하고 고집스럽게 죄의 길을 걸어가며 한사코 악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시편 기자의 가까운 곳에는 오만하고 악한 무리도 있어서 그를 짓밟으려 하고, 쫓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곧 시편기자의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악한 자, 오만한 자와 사기와 속임수와 폭력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고 생각만 해도 숨이 꽉 막힙니다.

그런데 5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그는 그가 처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그는 그 숨 막히는 상황에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찬양합니다. 좀 생뚱맞기까지한 그의 찬양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시죠. 먼저, 5절과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분위기는 온통 어두운데 시편 36편 기자는 아주 밝은 분위기로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갑작스런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대한 찬양’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시인의 갑작스런 시선 전환에서 왔습니다. 시편 기자가 마치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하늘과 산줄기와 바다와 짐승들은 아마도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상상 속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 하늘과 산과 바다와 짐승들이 상상 속의 것이었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시편기자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하늘을 보며, 산을 보며, 바다를 보며, 동물들을 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아름다우심과 의로우심과 공평하심과 자비로우심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상황보다 더 큰 영역에서 지속되고 있는 자신을 향해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보았기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7~8절에서 시편기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느꼈던 또 하나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해 숨었고, 그곳에서 양식을 얻어서 먹고 마시며 기력을 회복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의 양식은 물질적인 양식이었을 수도 있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양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왕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고, 그때 주님께서는 까마귀로 하여금 빵과 고기를 물어다 주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빵과 고기와 시냇물을 먹고 마시며 어려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에게 쫓길 때는 광야로 도망갔고, 홀로 광야 길을 하루 동안 걸어간 후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 죽기를 원하며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고, 천사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양식을 먹고 힘을 내서 하나님의 산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체험은 하도 강렬하고 찐한 경험이어서 엘리야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때 일들을 회상했을 것이며, 그런 회상은 엘리야로 하여금 새롭게 힘을 내게 만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시편36편 기자는 자기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9절 하반절에서 이 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이 구절은 우리교회 주보의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글귀이기도 합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주보 하단에 적혀 있었지요. 시편 36편은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볼 수 있는 방법 두 가지를 알려주었습니다. 한 가지의 방법은 어두운 상황에 매몰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창조세계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악, 오만, 사기, 속임, 폭력이 가득한 상황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만드신 광활한 우주와 높고 푸른 하늘, 우람한 산맥과 드넓은 광야, 깊고도 넓은 바다를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야는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종종 일상의 자리를 떠나 대자연 속으로 여행을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시편 36편이 우리에게 알려준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빛나던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라는 시에서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추억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인간과 사랑만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추억에 깊게 뿌리를 내린 우리의 믿음과 신앙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 주님의 빛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입니다. 상황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 짓습니다. 눈앞에 제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눈을 돌려 이 세상과 우주와 자연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지난날 곤고했던 시절에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끝내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셨던 일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기억을 디딤돌 삼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어려움을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내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보는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관련 뉴스를 보다가 가슴이 찡해지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는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주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급히 몸만 피해 국경을 걸어서 넘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나와서 음식과 옷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창고에는 폴란드 곳곳에서 사람들이 보내온 구호물자가 넘치도록 쌓여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사람들 수십 명이 차를 한 곳에 세워두고 손에는 도시 명이 적힌 푯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그곳까지 무료로 데려다 주려는 자원봉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아저씨가 종이 푯말에 도시이름뿐 아니라 자동차, 집, 사람을 그려놓고, 숫자 6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게 뭐냐 물으니 ‘이 도시’까지 가길 원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차로 태워줄 것이고, 집도 제공할 것이고, 6명까지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구호물품과 구호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직접 내가 차를 몰고 가서 그들을 차에 태워와 내 집에서 함께 지내겠다, 그것도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을 6명이나. 그 폴란드의 선한 사마리아 아저씨는 그 귀한 마음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요?

어둠 속에서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엘리야의 까마귀와 천사 같은 존재가 내게 주님의 빛을 가져다주기만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 이를 찾아가 그에게 내가 가진 작은 빛을 나누어 주어 그로 하여금 밝은 내일을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환한 내일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 옆에서 나 또한 그 환한 내일을 함께 보는 것이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빛을 비추어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빛이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폴란드의 선한 사마리아인 아저씨도 잘은 몰라도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분이었을 것입니다. 빛을 바라보지 않은 자에게서는 그런 빛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빛을 나누어 주려는 자에게 당신의 빛을 더욱 강하게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존재의 빛이 점점 옹색해지는 것은 누군가가 다가와 우리의 빛이 되어주기만을 바랄 뿐 우리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빛이 되어 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오랜 시간 바라보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둠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어둠을 이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빛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빛을 이 세상에 드러냅니다. 악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악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선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선을 드러냅니다. 자기의 욕망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자기의 욕망을 언젠가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하나님의 꿈을 언젠가 드러내게 됩니다.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닮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둡고 힘든 세상입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는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둠과 우리 내면의 어둠과 욕망을 바라보지 맙시다. 빛이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해를 간절히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해를 닮듯, 우리도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면 생명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생명의 사람이 되면 어둠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의 기운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그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해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고

김기석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고



사람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이야기가 빚어진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합류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낳는다. 사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간다. 이야기 전체의 시종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각자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와 성격을 날실과 씨실로 삼아 다양한 삶의 무늬를 만든다. 그 무늬가 모인 것이 문화이다. 세상에 무의미한 이야기는 없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각 개인의 삶은 저마다 각별하다.



젊은 날에는 삶의 보편적 진실에 더 끌렸다면 지금은 개별적 삶의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이 감내하거나 극복해야 했던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가슴이 저릿해온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는 에덴의 동쪽, 놋 땅 주민으로 살아간다. 안식 없는 삶을 견디며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하지만 ‘잘’이라는 부사에 담기는 의미는 제가끔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잘 산다’는 말을 물질적 풍요나 바라는 바를 유보 없이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도 있다.



산다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상황의 요구에 응답함을 통해 성숙해진다. 신앙생활이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이웃이 되라는 요구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이웃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떠나야 한다. 익숙하고 친숙한 세계에만 머물 때 삶은 진부해진다. 떠남은 위태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하는 것이다.



몇 주 째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이들과 만나고 있다. 언어도 문화도 피부색도 다른 이들 속에 섞여 살면서 겪은 애환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기가 막힌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교회는 그곳에 이식된 고향이었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통해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새로운 비전을 품었다. 비스듬히 기댄 채 세찬 바람을 함께 견디며 새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숲의 나무들처럼 그들은 그렇게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버지니아 지역 목회자 모임에서 팔십 육 세 되신 원로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시종일관 모임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면서, 젊은 목회자들과 똑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강의를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국을 떠나온 지 60여 년, 그는 한동안 유일한 한국인 목사로서 미국 회중들을 섬겼다. 한국과의 모든 연결이 사라진 지역에서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 때문일까? 그는 어려움을 겪는 젊은 목회자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있었고, 적절한 조언으로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는 젊은 목사의 질문에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교회는 죄인들이 있어야 해요. 죄인이 없는 교회는 없어요. 그들이 들어와 치유되고 새로워질 수 있어야 해요.” 불화를 일으키는 교인들을 처리해야 할 문젯거리로 보기 쉽지만 그들을 사랑과 관용의 마음으로 대할 때 전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뜻이라 짐작한다.



뉴저지 어느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잠시 친교의 시간을 가질 때, 한 분이 다가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소명을 느껴 미국으로 건너와 신학을 공부한 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품는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이들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꽤 많은 이들이 그런 노력을 목회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번번이 좌절을 맛보다가 이번 집회를 통해 자기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노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타박을 들었다.



점잖음은 때로 진실한 신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 이야기에 연결되어 공감과 이해, 환대와 수용, 경탄과 기쁨이 스며들 때 서름한 삶이 푼푼해지지 않을까? 



(2022/05/11자 국민일보 '김기석의 빛 속으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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