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빛을 간직한 사람들
김기석(202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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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빛을 간직한 사람들
본문: 마가복음 9:30-32
(2026/02/22, 사순절 제1주)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1. 가이사랴 빌립보, 오늘 우리의 욕망이 세운 도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느덧 얼어붙었던 대지가 풀린다는 '우수'입니다. 눈석임물이 흘러내리며 생명을 깨우듯, 우리 마음에 깃든 차가운 이기심과 두려움의 얼음, 수치스러운 기억, 미움과 원망의 응어리, 경직된 마음이 녹아내려, 생명의 새순이 돋아나길 소망합니다.
사순절에 접어들었습니다. 상상 속에서나마 주님의 동행이 되어보려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서 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기획된 그 도시는 로마의 화려한 문명과 압도적인 힘이 과시되던 곳이었습니다. 황제를 기리는 거대한 대리석 신전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고, 로마식 건축물과 신들의 조상이 도처에 서 있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오직 힘 있는 자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폭력의 논리와 '로마의 평화'라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이 되고, 물질의 크기가 존재의 무게를 결정하는 세상입니다. 누구나 '성공'이라는 신전에 제물을 바치며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바로 그 욕망의 제국 한복판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
베드로의 고백은 폭력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부정이고, 거대한 소비 흐름에 대한 저항입니다. 힘으로 지배하는 황제가 아니라, 상처받은 이들의 곁을 지키는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진짜 '주님'이라는 고백은, 세상이 강요하는 가치 체계를 뒤엎는 용기 있는 선언입니다.
2. '나'라는 우상을 깨뜨리는 아픔
베드로의 고백은 장엄했지만, 정작 주님이 "내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거세게 항의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며 항의합니다. ‘항의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사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실 때, 귀신을 꾸짖으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이 단어는 그가 느낀 당혹감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아직 승리와 영광의 신학에 머물고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은 그의 계산에 없었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신앙을 '마음의 평안'이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보험' 정도로 여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손해가 오거나,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신앙은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모두 나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자기중심성'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이 오직 '나'여야만 한다는 그 지독한 개인주의의 껍질을 깨는 고통을 감내하라는 뜻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으로 들어올 공간이 생깁니다. 믿음은 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사랑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3. 평온을 넘어선 '애태움의 빛'
엿새 뒤, 주님은 높은 산에서 해처럼 밝게 변하셨습니다. 이 빛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외부의 소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햇빛'에 비유했습니다. 그것은 고요하고 품격 있는 '자족의 빛'입니다. “그 빛은 장애물과 사납게 충돌하거나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자신의 빛을 허용하는 대상을” 비출 뿐입니다(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자성록>, 박민수 옮김, 열린책들, p.137). 그러나 한지에 물이 스미듯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은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빛은 '애태움의 빛'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하는 마음, 그들을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사랑이 존재 전체를 뚫고 터져 나온 것입니다. 나 혼자 고상하게 평온한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잠긴 이들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사랑의 발광(發光)입니다.
욕망의 벌판에서 겅중거리며 사는 동안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집니다. 다른 이들의 일에 간섭하다가 불유쾌한 상황에 놓이게 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각자도생의 세상은 그렇게 형성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뜨거워질 것'을 요청하십니다. 타자를 향해 마음을 졸이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 애태울 때 우리 속에서도 그 거룩한 변화산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4. 사순절, 빛을 간직한 나그네의 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소비주의 제국이 밝히는 불빛은 화려하지만 곧 사그라들고 우리를 더 깊은 공허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빛은 약해 보여도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행복에 겨워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고통 중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이 부분은 번역이 모호하여 재번역]. 어두운 밤에 새벽을 확신하는 것, 저주를 축복으로, 고뇌를 노래로 바꾸는 힘을 확신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괴물의 격렬한 분노를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떳떳이 나서는 것… 지옥의 한복판을 걸으면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계속해서 신뢰하는 것—이것이 참 도전이요, 참 길이다.”(<어둠 속에 갇힌 불꽃>, 이현주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329-330)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괴물의 격렬한 분노를 알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길입니다.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도 새벽이 오고 있음을 확신하며 묵묵히 걷는 길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영광의 자리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빛을 속에 간직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내가 작아지는 것 같아도,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이 밝아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번 순례의 길을 통해 우리 속의 빛이 더욱 맑고 투명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