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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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땔감이 다 떨어지면

김기석(2021-10-17)
듣기

땔감이 다 떨어지면
잠 26:20-28
(2021/10/17, 창조절 제7주)

[땔감이 다 떨어지면 불이 꺼지듯이, 남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다툼도 그친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과 같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난 데 부채질을 한다.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악한 마음을 품고서 말만 매끄럽게 하는 입술은, 질그릇에다가 은을 살짝 입힌 것과 같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입술로는 그렇지 않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흉계를 꾸민다. 비록 다정한 말을 한다 하여도 그를 믿지 말아라. 그의 마음 속에는 역겨운 것이 일곱 가지나 들어 있다. 미운 생각을 교활하게 감추고 있다 하여도, 그 악의는 회중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기가 그 속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은 자기가 그 밑에 깔린다. 거짓말을 하는 혀는 흠 없는 사람의 원수이며, 아첨하는 사람은 자기의 신세를 망친다.]

• 말이라는 선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농부들은 농작물이 입을 냉해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집을 잃고 거리를 떠도는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인근에 머물고 있는 노숙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일을 해 오신 이들과 상의하며 미약하지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느닷없이 닥쳐온 추위는 우리가 손잡아 주어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간밤에 집에 난방을 하면서 마종기 선생의 ‘겨울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잊지 않게 하시고,/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고마워하게 하소서”. 시의 첫 부분입니다. 우리 모두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히브리의 지혜자가 들려주는 말에 대한 교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피려 합니다. 경희대 김진해 교수는 <말끝이 당신이다>라는 책의 표제 컬럼을 통해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줍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에 사람들은 직접 통화보다는 문자를 주고받거나 채팅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더 선호합니다. 김진해 교수는 문자를 보낼 때 말끝을 어떻게 맺고 있는지를 보면 친한지 안 친한지, 기쁜지 슬픈지 다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친할수록 어미를 일그러뜨려 쓰거나 콧소리를 집어넣고 사투리를 얹어놓는다. ‘아웅 졸령’ ‘언제 가남!’ ‘점심 모 먹을껴?’ ‘행님아, 시방 한잔하고 있습니더’ ‘워메, 벌써 시작혀부럿냐’”(김진해, <말끝이 당신이다>, 한겨레출판, p.19). 친하지 않은 사이엔 주로 ‘-습니다’라는 종결어미를 사용합니다. 제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꼭 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는 학생들과 친구처럼 지내도 결석을 통보할 때는 ‘이러저러한 사유로 결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식으로 통보하더라며 서운해 합니다. 그가 받고 싶은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패랭이꽃도 예쁘게 피고 하늘도 맑아 오늘 결석하려구요!’ 흥미롭게 그 글을 읽다가 ‘어이쿠’ 한 대목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말끝이 닳아 없어지기도 한다면서 그가 예로 드는 것은 부부 사이의 대화입니다. ‘어디?’ ‘회사’ ‘언제 귀가?’ ‘두 시간 뒤’ 그리고 결론으로 말합니다. “말끝이 당신이다.” 최근에 아내와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제가 한 말을 살펴보았습니다. ‘응’ ‘살펴 와요.’ ‘오케이’ ‘지금 공덕’.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어떤 경험을 하긴 했는데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때, 누군가가 가장 거기에 딱 어울리는 표현을 하면 비로소 자기 경험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언어라는 기호를 공유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고, 공감도 일어납니다. 외국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호가 아니기 때문에 늘 어렵습니다. 그런데 언어는 의사 소통의 도구만이 아닙니다. 언어는 사건도 일으킵니다. 이사야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 싹이 돋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이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사 55:10-11). 그 말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 말도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그런 말의 힘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말로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도 있고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유통되고 있는 언어는 너무 난폭하고 오염되었습니다. 거친 말, 거짓말, 기만하는 말들이 여과 장치도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말은 이래저래 문제입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이 짓는 죄업 가운데 ‘구업’(口業)이라는 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남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거짓말인 망어(妄語), 비단결 같이 부드럽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기어(綺語), 마구 꾸짖고 욕하는 악구(惡口),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양설(兩舌)이 그것입니다. 말은 제대로 활용할 때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릇 사용하면 악마의 도구가 됩니다.

• 말의 오용
말이 오용될 때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시작됩니다. 아담은 어찌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그 책임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사용한 그 말이야말로 사람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고, 사탄은 그 버름한 사이에 파고들어 관계를 파탄으로 이끕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의 지혜자는 ‘남의 말을 잘하는 사람’,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 ‘악한 마음을 품고서 말만 매끄럽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하는 사람,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은 이웃의 존엄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특정한 이미지 속에 가두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수구 꼴통’,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합니다.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그들은 상종 못할 사람이 됩니다. 언어가 차꼬이고 감옥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시때때로 경험합니다.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에드가 포의 무덤’이라는 시에서 사람들이 하는 뒷담화를 가리켜 ‘히드라의 비열한 소스라침’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데 머리가 여럿 달린 뱀입니다. 히드라의 끔찍함은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다른 머리 여러 개가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헐뜯는 말은 또 다른 말을 낳고, 그것이 증폭되면서 편견을 만들고, 편견은 적대감을 만들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끕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땔감이 다 떨어지면 불이 꺼지듯이, 남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다툼도 그친다”(20)고 말합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숯불 위에 숯불을 더하고,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처럼 불난 데 부채질을 합니다. 예레미야도 이런 현실을 통탄했습니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렘 9:8) 언어가 소통되는 광장이 오염되었습니다. 거짓 뉴스가 진실로 치장한 채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다른 이가 말할 때 잘 끼어들어 자기 말을 보태는 것을 보고 재치 있다고 칭찬하는 세태는 말의 품격이 무너진 세상을 반영합니다. 침묵이 더 이상 금이 아닌 세상에서 사람들은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이 횡행합니다. 오죽하면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책이 다 나오겠습니까?

• 말과 정체가 다른 사람들
정치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하면서 우리는 너무 갈라졌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세계 속에 사는 사람처럼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가족끼리 모였을 때 종교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는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그 주제는 사람들을 친밀하게 이어주기보다는 갈라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이라는 매개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 논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 진리가 승리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성격만 드러날 뿐입니다. 논쟁은 상대방의 생각에서 약점을 찾기에 급급할 뿐, 함께 배운다는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생각을 치열하게 가다듬어야 하는 사람들은 논쟁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대화가 논쟁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늘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사사건건 싸우자고 대드는 사람과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칼이 되어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남을 헐뜯는 말입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22)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도 남에 대한 험담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합니다. 그 말이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헐뜯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 속에는 하나의 편견이 자리 잡습니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하는 말조차 진실일 거라고 쉽게 속단합니다.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이들의 말은 다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격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옹호의 덫(advocacy trap)이라 합니다. 자기가 지지하는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죄다 그릇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적대감이 발생하고 냉소, 비난, 모욕, 험담, 저주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매끄럽고 다정한 말도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노자는 ‘신언불미(信言不美)요 미언불신(美言不信)’라 말했습니다.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노자 ‘도덕경’의 맨 마지막 장인 81장에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알속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지적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히브리의 지혜자는 노자가 말하는 진실을 한결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마음을 품고서 말만 매끄럽게 하는 입술은, 질그릇에다가 은을 살짝 입힌 것과 같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입술로는 그렇지 않은 체하면서, 속으로는 흉계를 꾸민다. 비록 다정한 말을 한다 하여도 그를 믿지 말아라. 그의 마음 속에는 역겨운 것이 일곱 가지나 들어 있다. 미운 생각을 교활하게 감추고 있다 하여도, 그 악의는 회중 앞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23-26)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악한 마음을 품고 말만 매끄럽게 하는 이들의 말은 질그릇에 은을 살짝 입힌 격이랍니다. 다정한 말의 이면에 역겨운 것이 일곱 가지나 들어 있답니다. 이것은 물론 부드럽고 품격있는 말을 다 배척하고 투박하고 직정적인 말만 신뢰하라는 뜻이 아닌 건 다 아시지요? 비단결 같은 말 곧 기어(綺語)에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언자들의 말은 거칠었습니다. 사람들의 양심을 습격하는 말은 대체로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도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가끔 사람들의 안일함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거칠게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비난은 문제지만 비판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쁜 생각을 숨긴 채 말만 매끄럽게 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인들의 생각은 회중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 아름다운 말
히브리의 지혜자는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의 말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말은 마치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기가 그 속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은 자기가 그 밑에 깔린다. 거짓말을 하는 혀는 흠 없는 사람의 원수이며, 아첨하는 사람은 자기의 신세를 망친다.”(27-28)

어린 시절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친구들을 골탕 먹이려고 친구가 다니는 길목에 함정을 파고 잔 나뭇가지를 그 위에 얹고 흙으로 덮어 위장을 해놓았다가 되레 내가 빠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 양편에 자란 풀을 엮어서 매듭을 만들어놓고는 누군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내가 거기에 걸려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사는 게 꼭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악한 말은 반드시 돌아와 우리에게 보복을 합니다. 존 웨슬리는 ‘험담의 치료’라는 설교에서 메소디스트라 불리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견책을 몸에 지니고 메소디스트라고 불리는 당신들은 소위 기독교 세계에 적어도 이 한 가지 경우에 있어서만은 모범을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험담, 험구, 수군거리는 일을 버리십시오. 이런 말들이 하나라도 당신의 입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선한 말 이외에는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당신이 타인과 구별되기를 원한다면, 이것을 감리교인의 구별되는 표준(덧붙임/기호, mark)으로 삼으십시오. 감리교인은 사람 뒤에서 그를 책망하지 않습니다.”(<웨슬리 설교 전집 3>, 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p.279)

험담(evil-speaking), 험구(talebearing), 수근거림(whispering)은 세상의 일치를 허무는 여우입니다. 그걸 버려야 합니다. 이게 어디 감리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교훈이겠습니까?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을 닮아야 합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의 말씀은 순결한 말씀,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요, 일곱 번 걸러 낸 순은”(시12:6)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인들은 시 한 구절을 얻기 위해 마음으로 문장을 수도 없이 썼다 지웠다 합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해도 결정적인 순간 우리의 말도 침묵의 깊이 속에서 길어낸 말이어야 합니다. 아무런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지도 못하는 말에 땔감을 제공하거나,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말이 변하면 우리 삶의 풍경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의 말이 생명을 북돋는 말, 평화를 만드는 말이 되기를 빕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것

김기석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것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을 네게 들려주고 싶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동해야 할 때이다. 에너지가 차올랐다. 그러니 쟁기를 손에 잡아라. 우리는 강해짐으로 강해질 수 있고, 믿음으로 믿음을 배울 수 있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Carol Berry, <Vincent van Gogh>, His Spiritual Vision in Life and Art, Orbis, p.68)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10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계절은 벌써 상강(霜降)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교회에 작은 국화 화분 12개를 보내주셔서 현관 앞에 두었습니다. 국화가 외로울까봐 가끔 밖으로 나가 눈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슬그머니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지나치게 화려하여 눈길을 끌지도 않고, 수수한 듯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국화꽃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크고 좋은 국화 화분을 장만하여 교우들 맞을 생각입니다. 화단에 있는 양달개비는 때를 잊었는지 새로운 꽃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하고 있고, 꽃댕강나무도 여전히 꽃을 피워 향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지난 6월경부터 예쁘게 피기 시작한 일일초는 조금 기운이 약하여지긴 했지만 며칠마다 새로운 꽃을 피워내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꽃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안간힘을 다하여 꽃을 피워올리는 나무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교우 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 다녀왔습니다. 창밖으로 산을 내다보며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단풍의 시간은 다가오지 않았는지 산은 아직 형형색색으로 물들지 않았더군요. 추수를 이미 끝낸 논도 보였고, 가지런하게 서 있는 벼포기가 바람에 일렁이는 논도 보였습니다. 길가에 선 은사시나뭇잎이 오가는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빈소는 대개 슬픔의 공간이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고인이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고, 가족들의 우애가 깊을수록 빈소는 따뜻한 공감과 사랑이 깃드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왠지 가을산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인근에 있는 계족산을 찾아 한 시간 정도 황톳길을 걸었습니다. 검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마음은 사뭇 유쾌했습니다. 흙을 느껴보고 싶어 맨발로 황톳길을 조금 걸었습니다. 발은 아리도록 시렸지만 흙이 주는 탄력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월요일이면 가까운 산에 오르곤 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아예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습니다. 주중에는 시간을 토막을 내 사용해야 하기에, 옹근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은 늘 월요일로 미루곤 했던 것입니다. 일단 그런 일이 습관이 되자 더러 일정이 비어 있는 날에도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산에 가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얼마 전 설악산 공룡능선을 걸으며 찍은 교우의 영상을 보며 ‘와우, 와우’ 감탄사만 터뜨렸습니다. 절경 앞에 서면 사람은 말을 잊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움 앞에 설 때 사람은 오염된 말을 버리고 침묵 속에 젖어듭니다. 정화의 시간입니다. 땀 흘림이 없다면 그런 체험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영상을 보다가 문득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방문했던 지리학자의 별이 떠올라 쓰디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별은 어린왕자가 지구에 오기 바로 직전에 들렀던 곳입니다. 어린왕자가 그 별에 도착하자 책상 위에 커다란 책을 펼쳐놓고 있던 늙은 신사가 그를 맞아줍니다. 그는 어린왕자에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묻고는 자기를 지리학자라고 소개합니다. 지리학자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바다와 강과 도시와 산 그리고 사막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그 별에도 강이나 산 그리고 사막이 있냐고 묻자 지리학자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탐험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탐험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기억이 진실하다는 판단이 들 때면 기록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실과 학자적 거리를 두고 사는 판단 강박증 환자입니다. 







학자다운 호기심을 품고 그는 어린왕자의 별에 대해 묻습니다. 어린왕자가 자기 별은 아주 작다면서 그 별에는 불이 있는 화산이 둘이 있고 불이 꺼진 화산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꽃 한 송이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지리학자는 자기는 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니, 왜 그 예쁜 것을 기록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꽃이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영원한 것, 변치 않는 것만 기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왕자가 덧없다는 게 뭐냐고 묻자 지리학자는 “그것은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다'는 뜻”(앙투안 마리 로제 드생텍쥐페리, <어린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80)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어린왕자는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세상에 맞서서 자기를 보호할 수단이라곤 가시 네 개밖에 없는 꽃을 홀로 두고 왔다는 자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슬그머니 덧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만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줍니다. 하지만 작고 여려 언제라도 소멸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둘 때 우리는 비로소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날이 차갑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산이나 강가에 있는 나무에 서린 상고대를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앞에 서면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 해도 신비감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상고대를 사시사철 볼 수 있다면 그 감성이 살아날 리 없습니다. 쉬 스러지는 것이기에 더욱 애틋한 눈길을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雅歌)에 나오는 사랑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 임이여, 가요,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나무 숲 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요. 이른 아침에 포도원으로 함께 가요.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함께 보러 가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임에게 드리겠어요.”(아7:10-13)







작고 여린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골몰하던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에 눈길을 주는 순간 나와 타자를 가르는 담장들이 무너지고 잠시나마 하나 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쓸모와 유용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지만,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긴장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느낍니다.







벌써 몇 해가 흘렀군요. 이맘때면 우리는 가을 기차 여행을 하거나, 한적한 곳으로 소풍을 떠나곤 했습니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교우들의 표정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함께’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고샅길을 천천히 걸으며 꽃들에 눈길을 주기도 했고, 산길을 걸으며 식물들의 이름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소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밝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간간이 끼어드는 예배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어느 동시에서 본 구절입니다만 우리는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제 다시 그럴 때가 곧 오겠지요? 올해는 모두 함께 그런 시간을 누릴 수는 없지만,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한적한 곳을 찾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멋진 숲길을 걸을 때 저를 초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교회의 영상장비와 조명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린다 해도 예배 영상을 송출하는 일은 중단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늘 질 좋은 영상을 접하는 이들은 영상의 품질이 떨어지면 매우 힘들어한다고들 하시더군요. 저는 새로운 물건을 구입하거나 교체하는 일에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른 체하며 젊은 세대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강대상을 향해 달린 여러 대의 조명 장비가 조금은 낯설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영상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방송실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사랑으로 격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1월 첫째 주는 우리 교회가 해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침 그 주간은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며 맞이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예배에 동참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교우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송을 바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힘겨운 일상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만 헤아려 보십시오. 나무가 가을볕을 머금어 아름다운 색을 만들듯, 우리도 주님의 빛과 사랑을 받아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모든 가정에 머무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0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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