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감사의 이유가 되어
김재흥(202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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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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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막절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청파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가을이 오나 싶었는데 단풍이 들기도 전에 겨울이 먼저 온 느낌이 드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들녘의 곡식과 열매들은 무르익어 농촌에서는 수확이 한창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서적 근거를 찾자면 그것은 초막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간에 히브리인들은 여러 광야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수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 등. 광야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하고, 잘 곳이 마땅치 않은 결여와 결핍의 공간이었습니다. 광야길 여행 세 달만에 히브리인들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방법으로서 율법을 알려주셨는데, 그 율법 속에는 초막절을 지키라는 율법도 있었습니다.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수장’이란 곡식과 열매를 ‘거두어 저장한다’는 뜻입니다. 초막절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은 10월 초순 경, 추수를 끝내고 일주일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매일 소와 양과 염소 수십 마리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는 여러 제사 중 가장 많은 양의 제물을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크게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좀 특이한 점은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 나뭇가지와 천으로 지은 장막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에서 탈출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지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에는 저마다 옥상이나 베란다나 마을 공터에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이 되면 전도서를 읽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초라한 초막과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의 말씀은 얼핏 보면 풍요로운 추수절기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요로울 때 어려웠던 처지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더 크게 감사를 할 수 있었고, 소출이 많건 적건 간에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함을 고백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변치 않으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은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케인즈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항시대에 했던 말입니다. 생산 시설은 충분하지만 소비가 줄어들어 실업과 빈곤이 증가한 모습을 보며 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물질적으로는 이전시대보다 풍요해졌지만 정서적으로는 더 빈곤해진 시대를 뜻하는 말로도 많이 쓰입니다. 우리들의 옷장과 신발장과 냉장고를 보십시오. 옷이 가득하고 신발이 가득하고 음식이 가득하지만, 입을 옷이 없고 신을 신발이 없고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옷 한 벌 사주시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파란색 바지와 남방, 몸에 맞지 않을 때까지 아껴 입었습니다. 신발도 그랬지요.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시장에서 운동화를 하나 사오셨습니다. 체크무늬 운동화, 얼마나 감사했는지 구멍이 뚫리고 헝겊이 헤어질 때까지 신었습니다. 어머니가 가끔 진빵을 만들어 주실 때면 그걸 얼마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옷과 신발과 음식이 넘쳐나니 그런 아낌과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진정한 감사를 회복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빵과 물과 빛이 되어준 사람
요한복음 7장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명절을 쇠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초막절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 곳곳에 초막을 짓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해의 초막절은 다른 해의 초막절과는 좀 달랐습니다. 순례객들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논쟁은 예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무리를 미혹하는 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제사장은 매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금으로 만든 단지에 물을 담아와서 성전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 예식 속에는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셔서 새해에도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초막절 마지막 날에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고생하던 사람들에게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이 생명수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오랜 로마의 식민살이와 유교대의 부패로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생명의 샘물이 되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도 초막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초막절에는 제물을 바치고, 초막을 짓고, 제단에 물을 뿌리는 행사 이외에도 성전에 불을 밝히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뜰이 안뜰과 바깥뜰로 구분이 되어 있었는데 안뜰은 남성만 들어갈 수 있었고 바깥뜰은 여성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여 바깥뜰을 여인의 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사람들은 그 여인의 뜰에 매일 밤 네 개의 큰 등대에 붉을 밝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구전 율법서인 미쉬나에 보면 초막절 성전에서 밝힌 불빛이 예루살렘 전역을 환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그 불빛은 밤에도 순례객들로 축제를 즐기게 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떠돌 때 어둠 속에서도 이스라엘에게 길을 알려주던 불기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절 끝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난 불기둥은 그냥 빛이 아니라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헤매이는 영혼들이 당신을 빛 삼아 참된 생명의 길을 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이스라엘의 광야시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빵은 육신의 배고픔만 면하게 해줄 뿐이지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빵은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먹는 만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배고픔을 면했지만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죽지 않는다.” 예수님은 참된 영혼의 양식이 없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생명의 양식을 먹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찢어서라도 사람들을 먹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3. 서로 감사의 이유가 되어
그런데 왜 요한복음은 출애굽 공동체의 광야 생활과 생명의 빵과 물과 빛이 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연결시키고 그것을 반복한 것일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함께 읽던 사람들, 요한공동체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성전이 무너진 유대교는 그 후 20년이 지나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 경전 중심의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앞세워 비유대교적인 것은 모두 정죄하고 축출했습니다. 그로인해 그전까지는 유대교의 한 분파처럼 존재하던 유대기독교인들도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고 유대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학자들은 그때 요한복음을 함께 읽던 요한공동체도 다른 유대기독공동체와 더불어 유대교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공동체가 겪은 어려움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다른 유대기독공동체들과도 다른 길을 갔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과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찬식보다는 세족식을 통해 섬기는 삶을 강조하였고, 물로 행하는 세례식보다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12제자의 명단도 나오지 않고, 제자들을 파송하는 말씀도 나오지 않으며, 베드로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형식과 전통보다는 본질을 중시하던 요한공동체는 다른 유대기독공동체와도 거리를 두고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요한공동체의 상황은 광야와 같았습니다. 동족에게 추방당하고 다른 기독공동체와도 함께 가지 못하는 요한 공동체는 광야 속 이스라엘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그 광야를 지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러셨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빵과 물과 빛이 되어주어야 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이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 4:7,8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가와 나의 주린 몸과 마음을 채워주고, 나의 마른 목과 마음을 적혀주고, 내 앞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준 사람은 나의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두 주 전에 결혼식 주례를 맡았습니다. 신부는 우리교회 교인이고 신랑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저와 10년 이상 알고 지낸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랐습니다. 선도 보았지만 ‘딱 이 사람이다’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혼할 사람이라며 데려왔는데 제가 보아도 ‘이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참 좋은 사람, 참 잘 맞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가 예식에서 부를 찬양을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보통 결혼식 때 부르던 찬송가 ‘완전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은혜’라는 곡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 때 ‘은혜’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찬양을 부르던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서로를 마주 보며 연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던지요.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감사의 이유가 되어주었기에 서로를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풍요롭지만 빈곤한 시대입니다. 내 빵도 내 빵이고 네 빵도 내 빵입니다. 내 물도 내 물이고 네 물도 내 물입니다. 내가 빛나기 위해서 기꺼이 너를 어둠으로 내몹니다. 그런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광야가 되는 세상입니다. 폐허가 된 가자지구를 보십시오. 우크라이나를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나와 너 사이의 황량해진 관계를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과 물과 빛으로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이유가 되어 주셨습니다. 감사는 벽에 공을 던지는 것과 같다지요. 내가 먼저 너에게 감사의 이유가 되어줄 때 너 또한 나에게 감사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황량한 광야가 점점 넓어지는 이 때에 광야를 더욱 넓혀가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에게 감사의 이유가 되어 황량한 광야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가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