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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월,토,일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김형욱 목사

이어진겨레 전도사



세베대의 마음

김형욱(2024-03-03)
듣기

세베대의 마음 - 막 1:14-20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순절 순례 여정을 뚜벅뚜벅 걷고 계신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최근 매체를 통해 올겨울은 유난히 눈과 비가 많이 와서 해마다 산과 들을 터전 삼고 살아가는 이들의 오랜 근심이었던 겨울 가뭄 걱정을 덜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내용을 살피고 기사를 읽어가며 저는 아차 했습니다. 유난했던 겨울 눈비로 출퇴근이 힘들고 야외 활동이 어려워 불만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겨울에 내리는 비가 누군가에는 생명의 단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은 저 알아서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우리 인간은 아니 저를 비롯한 우리 자신은 얼마나 나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중반으로 접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의 중심에 나를 두고 생각하는 오래 묵은 습관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내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과 마음을 중심에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며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후 하신 첫 번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함께 성찰하며 하나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제자이자 나의 사랑하는 친구라고 불러주셨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함께 성찰해 보겠습니다.

위대한 선포
오늘 우리의 본문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함께 등장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당신의 첫 번째 공생애 사역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단서를 붙여 두었습니다. 이제 요한의 시대적 사명이 종료하고 비로소 예수의 시대가 열림을 표현했습니다. 이윽고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1:15)

여러분, 이 짧은 선언을 기억하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단출한 문장이니 암송도 가능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서의 위대한 시작이자 주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신약 성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바가 있다면,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인류에게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첫 번째 복음서,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첫 번째 음성이 바로 이 선언입니다. 이 짧은 문장이 주님께서 입을 열어 세상을 향해 외치신 첫 번째 음성이라면, 우리 믿는 자들이 이 말씀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고 단단히 붙들고 살아야 함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 말씀은 문장의 형태로 보자면 명령형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이 명령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주님의 명령에 우리는 토를 달거나 의문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 분의 제자를 자처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복음서의 첫 번째 말씀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 말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지요. 때가 다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창조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시간 안에서 이미 그 나라가 도래하여 실현되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저 멀리 어렴풋하게 언젠가 나타날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눈앞에 당도했다는 긴박한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왔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대한 거대한 역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에도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욕망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힘없는 자들이 살기가 더 각박해지는 세상,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효율과 성과라는 이름으로 삭제되는 세상이 지금입니다. 현대사회에 절대 불가할 명제가 있다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 5:44)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거대한 역설인 이유는 세상 때문만이 아닙니다. 세상은 애초부터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 명령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면서 동시에 우리시대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에 도래하여 주님의 길을 밝히며 따라가야 할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마치 오지 않은양 아니 오지 않기를 마라는양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래 기다려온 하나님 말씀의 성취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주님을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주님을 지우려했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지금 이렇지 않은지요. 주님을 앞에 두고도 주님 없는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주님께서 계셔야 할 교회의 중심에 우리는 엉뚱한 것들을 세워두고 절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난 세기 위대한 신학자이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찌 권력에 절하기 시작했던 교회를 향한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교회 안에는 제단이 하나만 있습니다. 그것은 지존하시고 유일하시며 오직 영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주님, 모든 피조물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창조주, 가장 힘 있는 자를 먼지처럼 여기시는 창조주의 제단입니다. (중략) 자기의 제단이 필요하거나, 다른 사람의 제단을 세우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 297)

교회 안에 하나님외 다른 것을 두고 거기에 절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닫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들을 부르심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위대한 선언이 땅에 울려 퍼졌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음성이고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의 실현을 위한 일꾼들, 즉 제자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주님의 복음 선포 이후 첫 번째 행동이 제자들을 부르셨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이 처음부터 공동체적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을 찾아 이 위대한 사역을 이어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주 의외의 곳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위대한 선포를 실현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떠난 곳이 고작 갈릴리 바닷가였기 때문입니다. '고작'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의미를 잘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부들, 포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어부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사고팔고 하역하는 자들, 저녁 반찬을 위해 싱싱한 물고기를 사 오라는 주인의 명을 받고 항구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많이 배운 학자도, 능력 있는 권세자도 아닌 그야말로 평범하고 낮은 위치의 사람들, 바로 그들이 모여 저 나름의 삶을 일구어가는 곳이 바로 갈릴리 해변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곳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의 위대한 사역을 맡기실 당신의 동료들을 찾기 위해 대단할 것 없는 사람들이 모인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기 위해 성공담이 가득한 근사한 공간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삶의 노고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 노동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 서로의 그물을 손봐주고 동료들의 배가 돌아오지 않으면 함께 모여 걱정과 기도를 올리는 낮은 자들이 모인 곳으로 주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셨던 것이지요. 갈릴리 바닷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했던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보냈던 편지의 말씀을 들어보시지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26-27)

바울의 이 말씀에 덜어내거나 보태야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 또한 물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조차 마음의 그림자가 없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과 어둠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약한 너를 내가 불렀으니, 너도 가서 약한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라. 마음에 그늘 많은 너를 불렀으니, 너도 가서 슬픔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라.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이 마음을 가질 리 만무하겠지요. 주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셨을 때 우리의 약함도 함께 부르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약함으로 다른 약함을 보듬어 안아야 함이 우릴 부르신 사명의 핵심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베대의 마음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찾기 위해 해변을 거닐던 주님은 시몬, 곧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만나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들에게 그 유명한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 일을 하는 모습을 보시고 마찬가지로 '나를 따르라' 하시며 제자로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때론 좌충우돌하지만 어엿한 사도로 성장해 훗날 교회의 기둥들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께 관심을 요청하는 이는 주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인 세베대입니다.

세베대는 복음서에서 비중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이따금 언급되는데 주로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라는 관용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당연히 그가 누구인지에 기록은 없습니다. 역사비평작업을 통해서도 세베대의 역사적이고 실증적 의미를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베대의 유일한 기록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한 구절,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입니다. 저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짧은 기록에 하나님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베대를 이해하기 위해 신앙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길 요청드립니다. 그날 아침도 다를 것 없는 하루였습니다. 세베대는 아들들을 이끌고 항구로 나가 오늘의 뱃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정리하고 어선을 정비한 후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는 일상이었습니다. 언뜻 목가적인 장면이 떠오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베대와 아들들이 살았던 갈릴리 가버나움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도시였습니다. 어부들은 자기들이 잡아 판 물고기값의 상당액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행여 문제를 제기했다간 큰 화를 당할 뿐이었습니다. 제국의 착취도 괴로운데 이들은 동족 유대인들, 특히 성전 권력자들에게도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세베대의 삶은 그야말로 팍팍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더 넓은 도시로 아들들을 보내어 가난한 어부의 삶을 내 자식만큼은 끊었으면 했지만, 세베대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따라 그물을 깁는 아들들의 손을 보면 한없이 미안할 따름이었겠지요.

그날도 다름없이 뱃일을 하던 중 갑자기 한 사내가 나타납니다. 그 사내가 제 아들들을 보더니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두 아들이 그 말씀을 듣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눈빛은 희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다른 어떠한 반문도 질문도 없이 그물을 버리고 그 사내를 따라나섰습니다. 지금 어디 가느냐는 말이 목에 찼으나 세베대는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 포도주가 되었듯, 두 아들이 주인을 만나 다른 삶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을 아버지 세베대는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두 아들을 아무 말 없이 보내줍니다. 두 아들이 예수를 만나 하나님 나라 사역을 마음껏 펼쳐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 세베대의 마음 어떠했을까요? 대견하면서도 행여 로마 군대나 바리새 사람들에게 위해를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베대는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살게 하시다, 우리 삶 어느 때에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실 아버지의 마음 말이지요. 우리를 대견히 여기시고 때론 염려하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세베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닮아있음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허투루 살 수 없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나야할 분을 만나 하나님 나라 사역의 길로 걸어갈 때 우리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주시는 분의 마음을 말이지요.

사랑하는 청파교우 여러분, 세베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임과 동시에 신앙 공동체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마음이기도 함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몇 주전 아버지 세베대의 마음을 경험한 바가 있지요. 오랜 시간 교회 안에서 동고동락하던 나의 친구와 가족을 두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훌쩍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마음껏 축복했지만, 마음 한켠 어딘가 쓸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세베대의 마음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교회로 파송을 떠난 우리의 친구들은 두 교회로 간 것 이전에 우리 주 예수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파송 받은 사람들임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걸어온 신앙의 여정 어딘가에 여러분들도 여러분 등 뒤에 남겨둔 세베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세베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또한 헤아리는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컬럼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김기석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



얼마 전 시카고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다녀왔다. 미국 전역에서 온 참가자들은 3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울림과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모임의 첫 시간에 진행자는 참가자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에 다섯 글자로 이 모임에 참여하며 품은 소망을 표현해보라고 요구했다. ‘날마다 기적’, ‘방향성 찾기’, ‘울림 내 안에’, ‘비움과 채움’, ‘살고 싶어서’, ‘한 박자 쉬고’, ‘한 걸음 성장’, ‘나 좀 살려줘’, ‘별을 찾아서’, ‘홀로와 함께’, ‘모름 속으로’, ‘날 놀래켜 줘’. 아주 짧은 이 표현들 속에 각자가 처한 상황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인생은 저절로 살아지지 않는다. 편안하던 일상에 금이 갈 때마다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묻곤 한다. 내가 이 세상에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달한 듯 삶이 답답할 때, 지지부진한 일상에 지쳤을 때, 비일상적인 삶의 계기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물론 그것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동반한다. 낡아버린 시간을 말끔히 비우고 새로운 시간을 채우는 일이 가능할까?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더 높은 곳의 안내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가끔은 이 세상에서 천애의 고아가 된 것처럼 외로울 때가 있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홀로됨이라면 외로움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고립감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고,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고통이라 말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홀로 있을 수 없으면 함께 있을 수도 없고, 함께 있지 못하면 홀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한 참가자는 ‘헤어질 결심’ 혹은 ‘깨어질 결심’이라고 자기 소망을 표현했다. 물론 영화 제목을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사느라 자기다움을 잃어버린 자기의 과거와 헤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익숙한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 동시에 취약해진다는 뜻이다. 취약해짐이 두려운 사람들은 갑각류처럼 딱딱한 외피를 입고는 그것을 ‘확신’이라 이름 붙인다. 그러나 확신은 올바른 인식에 근거하기보다는 무지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확신 속에 머물 때 그는 확고하게 선 듯 하지만 오히려 변화에 닫혀 있기 일쑤이다. 종교적 확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넓고 복잡하고 정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정묘한 세상에 눈길을 던질 때 우리는 신비 속에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경외심이 절로 솟아난다. 경외심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이 된 세상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삶의 자리가 장터로 변한 곳에서 신비에 대한 감각은 스러진다. 어쩌면 신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 우리를 장터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낯익은 삶이 낯설어질 때, 편안하던 삶이 갑자기 권태로워질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살다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암담함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그것을 형이상학적인 우울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우울감에 침윤되지 않고 삶의 기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조형예술가인 클로디 윈징게르는 <내 식탁 위의 개>라는 책에서 기쁨을 감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위로 떨어지는 섬광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과분한 것. 그 섬광은 최악의 순간일지라도 예외가 없다. 예를 들어, 진흙탕 같은 전투 중에도 불현듯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 그것이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우수 절기에 접어들었다. 눈석임물이 흘러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깨우듯 우리의 척박한 역사에도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린다.



(* 2024/02/23일자 경향신문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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