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 죽음의 말
김재흥(202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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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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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1. 언어의 타락
만추입니다. 산과 들이 온통 울긋불긋하고 공원의 나무와 가로수도 단풍이 절정을 지나 낙엽을 떨구고 있습니다. 푸르고 노랗고 붉던 이파리를 떨구고 가지를 드러내는 나무들을 보면서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1연과 3연만 읽어보겠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시인은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와 같은 험난한 시절을 지나, 백합이 가득 핀 골짜기와 같은 행복한 시절도 지나, 나뭇가지 위에 앉아 고요히 하늘을 바라보는 까마귀같이 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가을 우리도 그렇게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늘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와 같아서 평온한 날보다 힘겨운 날이 더욱 많습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의 경지는커녕 오늘의 우리는 백합의 골짜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늘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굽이치는 바다’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시에서 답을 찾아보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겸허한 모국어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 기도의 언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겸허라는 말을 그대로 풀어 자신을 낮추고 비운 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비운 말보다는 스스로를 높이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말들이 훨씬 많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운 말들은 서로 만나면 평화를 만들어 내지만, 자신의 생각과 주장으로 가득 찬 말들은 서로 만나면 다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삶은 계속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평온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짝으로 지어주신 하와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아주 열렬한 사랑이 느껴지요. 화와를 위해서라면 뼈도 살도 생명도 내어줄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입 밖으로 내뱉은 처음 말이 이 말이었습니다. 너라는 존재를 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는 말, 그 말 속에는 그 귀한 존재를 자기 곁에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도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말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말 또한 겸허한 모국어이며 우리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 주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에 그들의 말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은 “네,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제가 먹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와가 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답은 참으로 구차하고 누추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를 정죄하고 그 존재를 지으신 하나님을 탓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가 타락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이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이를 정죄하고, 남 탓만 하는 언행이 타락이었습니다. 아담의 말은 생명의 언어에서 죽음의 언어로 타락했습니다. 전에는 너를 위해 자기의 생명도 내어줄 것 같더니 이제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얼마든지 너를 죽음에 내어주려 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생명의 언어가 무너지고 죽음의 언어가 자리할 때, 관계도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인 에덴도 무너집니다.
2. 죽음의 말 죽음의 기도가 되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두 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드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기도드리러 간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같은 공간에서 기도하게 된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고개를 들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한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세리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일반적인 장소에서 기도드리지 않고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세리는 주님이 계신 곳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머리를 수그린 채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뿐이었습니다. 아마 그 말만을 계속 반복했겠지요.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두 사람 중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며 자기를 높이고 남을 멸시하며 낮추어 보는 이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고,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고, 간음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이 자기 돈벌이를 위해 동족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을 했고, 본수입만이 아니라 부수입의 십일조까지 바쳤습니다. 완전 바른 생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가 기도할 때 사용한 언어는 ‘죽음의 언어’였습니다. 자기 낮춤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한껏 높였습니다. 자기 비움이 없었습니다. 자기로 가득 찼습니다. ‘이 세리와 같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동시에 세리를 멸시하고 정죄했습니다. 세리의 기도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세리, 그는 그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배국인 로마가 시킨 일이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동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늘 있었지만 먹고 살아야 했기에 그 일을 했겠지요. 세리는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에 오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자리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좀 떨어져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리는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 중에 자기를 욕하는 말을 해도 화내지 못하고 그저 자기 가슴을 칠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의 잘못을 고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여김 받았지만 그의 기도 속에는 ‘생명의 언어’가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자기를 비웠습니다. 세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역사를 탓하고, 자기를 욕하는 이들을 정죄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저 동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채웠을 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눕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한 인물이지만, 복음서에 등장한 여러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충분히 그와 같은 기도를 드렸을 바리새인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주 사용했던 말들이 어떤 말들이었습니까? “왜 당신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오?” “왜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깁니까?” “그는 성령이 아니라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등. 그들은 늘 자기 의가 충만한 말,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는 말,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이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죽음의 언어로 드린 기도는 바리새인들이 다른 이들을 향해 사용하던 죽음의 언어에서 온 것입니다. 죽음의 말이 죽음의 기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죽음의 언어라면 우리가 다른 이와 나누는 대화는 죽음의 대화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죽음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생명의 말 죽음의 말
우리가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사용하는 ‘생명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지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8장 다음에 나오는 19장의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8장에도 세리가 나왔는데 19장에도 세리가 나옵니다. 여리고 마을의 세리장 삭개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미리 알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길가로 몰려나왔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예수님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키가 작기도 했지만 자기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를 보시고는 내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삭개오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심으로 삭개오를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게 되면 사람들이 당신을 죄인의 친구라고 부르게 될 것을 아셨지만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죄인 삭개오가 깊은 반성, 자기 비움과 낮춤,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 타자에 대한 존중과 같은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괴테는 <메르헨>이란 동화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황금보다 귀한 것은 빛이고, 빛보다 빛나는 것은 대화다.’ 우리는 ‘빛보다 빛나는 대화’가 어떤 대화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가 나눈 대화가 그런 대화였습니다. 죽음에 머물던 자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대화, 그런 대화가 ‘빛보다 빛나는 대화’입니다. 그런 대화 속에는 언제나 상호존중과 자기비움과 낮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대화, ‘어둠보다 어두운 대화’도 있다는 것을. 선악과 사건 이후 아담과 하와의 대화가 ‘어둠보다 어두운 대화’였습니다. 평온한 일상 속에 있던 이를 한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화, 그런 대화 속에는 언제나 자기 높임, 남 탓과 남 정죄가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은 파동을 가지고 있기에 주변으로 전파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한 죽음의 말이 그대로 화와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의 자녀인 가인에게로까지 전해졌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생명의 말이 그대로 삭개오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에게로 전해진 생명의 파장은 여리고 마을 전체로 퍼져갔습니다. 여리고 마을의 가장 부자, 삭개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제로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아 주었을 때 분명 마을 전체가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죽음의 말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매일 매일 죽음의 말은 그 파장을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그에 맞서 생명의 말을 하고 생명의 파장을 넓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이 무슨 말인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바리새인도 자신이 생명의 언어 의로운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언어는 죽음의 언어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이 바리새인의 말처럼 ‘죽음의 말’이라면 우리가 말을 할수록 죽음의 파장을 넓혀갈 뿐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남을 탓하고 정죄하는 죽음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 말부터 버리고, 새로운 생명의 말 – 상대를 귀히 여기고, 그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말부터 외국어를 배우듯이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매일 매일 조금씩 죽음의 말을 여의고 생명의 말로 자신을 채워나갈 때, 우리는 죽음의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를 지나 평온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생명의 말이 되길, 우리의 대화가 생명의 대화가 되길, 우리의 기도가 생명의 기도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