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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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예배 11:00 대예배실
수요집회 11:00 교육관
새벽기도회 06:00 교육관(일,월 쉼)

찾아오시는 길

청파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를 지향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아는 만큼 실천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교회
  • 돈과 지위와 권력이 없어도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회
  • 내가 나를 발견하려고 애쓸수록, 내가 가난할 수록, 내가 깊이 이해할 수록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을 확인시켜주는 교회
  •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소리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교회
  • 자기의 특권과 다른 사람의 특권을 보호하기 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교회
  • 가르치는 스승이 됨과 동시에 배우는 제자가 될 줄 알며,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교회
  • 내 양심의 결단을 내림에 있어 자유의 가장 폭넓은 공간을 마련해주는 교회
  •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는 항상 부드러우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는 대항할 줄 아는 강직함을 지닌 교회
  • 평화 부재의 현실로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동감하며 평화의 씨앗으로 살아가는 교회
  •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여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자원을 아끼는 녹색교회

우리는 아직 이런 목표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이 멋진 영적 순례에 동참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목회자

김재흥 목사

이범석 목사

이재훈 목사

장영숙전도사



이삭을 줍다

김기석(2020-10-18)
듣기

이삭을 줍다
룻2:1-3
(2020/10/18, 창조절 제7주)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 어느 날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그래, 나가 보아라."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취약해진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늘 목을 보호해야 하는 저는 벌써 목도리를 두르고 지냅니다. 찬바람에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다소 주춤하는 것처럼 보이던 코로나19가 잦아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칠 때도 있지만,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의료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지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추수의 계절입니다.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한 때입니다. 다소 상투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맘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룻(Ruth)입니다. 룻은 ‘우정’ 혹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 이미 룻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닥쳐온 기근 때문에 이방 땅으로 이주해야 했던 한 가족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요 인물들은 대개 떠돌며 살던 이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렇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출애굽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그들은 흉년과 기근, 박해와 차별로 인해 한 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약속은 떠도는 이들에게 고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명기서는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두는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이렇게 아뢰라고 명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신26:5)

떠돎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자기 확장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소설가인 김탁환 선생은 “성장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전제로 한다. 뒷배인 고향과 가족을 떠나야 비로소 온전히 세상과 맞닥뜨릴 수 있다.”(김탁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해냄, 2020, p.67)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익숙한 것 속에만 머물면 정체상태를 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떠남입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비로소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낯선 세계에 던져질 때 조금은 주체적이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어려움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성숙한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살다보면 어쩔 수 없어 떠나야 할 때도 많습니다.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울타리 없는 자리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저기 떠돌아 본 사람이라야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룻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불행은 언제나 겹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가정이 겪은 일이 그렇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운명은 유독 그 가문에 혹독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그 낯선 땅에서 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름 뜻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 말론(Mahlon)과 기룐(Chilion)을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과 맺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두 아들이 뭐가 급했는지 세상을 훌쩍 등지고 말았습니다.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룻기를 기록한 이가 그들의 운명에 합당한 이름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결단의 시간
남겨진 세 여인의 마음을 저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몇 년 사이에 가장 가까운 이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마 수없이 많은 실금이 나있지 않았을까요? 그 실금마다 아픔이 배어들고, 서러운 기억들이 스며들었을 겁니다. 그 실금들이 어느 사이에 버름하게 벌어져 가슴이 무너질 때도 많았을 겁니다. 바람만 스쳐도 눈물이 나고, 햇살이 쨍쨍해도 서러웠을 겁니다. 나오미는 그 신산스런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그 서러움의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습니다. 문제는 남겨진 두 며느리였습니다. 나오미는 가엾은 두 며느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로 돌아가 새 남편을 얻어 행복하게 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한사코 나오미와 동행하겠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워 ‘제발 돌아가라’고 재차 권합니다. 나오미의 강권에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차마 인생의 온갖 쓴 맛을 다 들이킨 나오미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룻1:16-17)

이 강고한 결단을 무지를 수 없었기에 나오미는 룻을 떠나보내지 못합니다. 룻의 결단은 장엄하고 숭고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는 바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다른 길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가끔 선택한 길이 막히거나 너무 험하다고 느낄 때면, 다른 길을 택해야 했던 게 아닌가 후회하기도 하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선택이 곧 인생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20세기 회화의 혁명가’, ‘야수파 운동의 주도자’, ‘색채의 마법사’, ‘강력한 원색을 사용해 행복감과 충만함을 표현한 화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군에 속해 있지만, 20세기 초에 그는 파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에 르벨이라는 수집상에게 정물화 한 점, 풍경화 한 점을 400프랑에 팔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만 원 정도가 됩니다. 그 놀라운 행운에 놀란 마티스는 멍해져서 100 프랑짜리 지폐 한 장을 바닥에 놓고 물러서고, 또 한 장을 놓고 물러서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 정물화였습니다. 계속 그런 그림을 그리면 상당한 값에 사겠다는 제안이 들어오자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수집상들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더 이상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는 전통적인 정물화 한 점을 막 완성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과감히 없애버렸습니다. 나중에 마티스는 <뉴요커 New Yoker>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재닛 플래너에게 그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내놓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내 예술적 죽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는 돈 욕심을 떨쳐버리고 자기 예술에 집중하게 된 그 때를 회상하며 “나는 그날을 내가 해방된 날로 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최애리 옮김, 2020, p.143-4 참고)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그 정물화를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영감과 기쁨을 주는 마티스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단한 노동의 현장
결단은 순간이지만, 견뎌야 할 생은 무겁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결단이 시적 순간이라면 일상적 삶은 산문과 같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도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Bethlehem)은 ‘베이쓰 레헴’(Beyth Lechem) 곧 ‘house of bread’으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빵집에 빵이 없습니다. 아니, 나오미와 룻에게 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팔자타령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추수하는 들판에 나가 이삭이라도 줍겠다고 말합니다. 고단한 노동의 현장인 그곳에서 일꾼들은 일쑤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비록 동족인 나오미의 며느리라 해도 과부가 된 이방 여인 룻의 등장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룻은 그 불확실함 속으로, 그 위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의 가르침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못 박습니다. 사람은 그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거류민일 뿐입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그 땅은 뭇 생명을 받아들이며 존속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소외된 이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비록 가난하다 해도 굴욕감을 느끼며 살지 않도록 돌봐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성결법전은 밭에서 추수할 때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둬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떨어진 이삭을 주워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살아갈 방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 땅에 몸 붙여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입니다.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걸 사회주의적 정책이라 하여 반대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본 소득 논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은 밭에 나가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목가적인 광경을 머리에 그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오르세이 미술관에 있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83.5*111cm)을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밀레는 이 그림을 1857년에 완성합니다. 40대의 왕성한 시기에 그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분위기는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을 대변합니다. 여인들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엎드려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수확한 것들을 무겁게 실어 나르는 마차가 보입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큰 마차입니다. 우측 상단 저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보입니다. 아마도 밭의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채 수확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옆에는 짚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까마득한 저 하늘 위로는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면의 3/4을 차지하는 공간의 주인은 이삭을 줍는 여인들입니다. 그런 배치는 여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두 여인을 구분해주는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의 색깔입니다. 파란색과 붉은색이 단조로운 풍경에 색채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그들이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여인의 왼손의 배치 또한 절묘합니다. 한 여인은 이삭을 든 왼손을 등 뒤로 들어 올리고 있고, 다른 여인은 무릎께에 두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손은 투박합니다. 오른쪽에 선 여인은 이제 막 허리를 굽히려 하고 있습니다. 수확물을 담기 위해 엉덩이께에 질끈 동여맨 앞치마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낯빛이 어두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의 모습은 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홍빛 하늘은 어쩌면 곤고한 노동 속에 깃든 희망이 아닐까요?

∙우리 시대에 주는 교훈
밀레의 그림에 나오는 그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룻을 봅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 노동의 현장에서 룻은 보아스의 관심을 사게 되고, 보아스의 각별한 돌봄을 받습니다. 나오미의 친족이었던 그는 결국 룻과 결혼함으로써 친족의 의무를 다합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이가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을 과감하게 드러냅니다. 룻과 예수님은 족보로도 이어져 있지만 두 분은 삶의 방식으로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의 자유와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친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룻기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을 하나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룻기가 저술된 것은 대략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포로생활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이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기입니다. 정체성이란 차이와 구별을 통해 형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의 특성들은 대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한 일 가운데는 지금의 우리 윤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정화를 명분삼아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혼을 강요했습니다. 소위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일쑤 폭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에스라의 명령은 당사자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무정한 조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룻기는 이방 여인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수성의 폭력을 지적하는 동시에, 낯선 이들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룻기는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는 지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그들이 살아갈 공간을 허용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대의명분이야 어떠하든 폭력입니다. 룻기는 타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아픔을 지며리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마음도 그렇게 확장되고, 따뜻하게 무르익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새컬럼



[목회서신] 의의 연장이 되어

김기석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버팀을 응원합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청년의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이 보고 싶어 문득 찾아간 바라나시에 40일간 머물며 찍은 사진과 자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글로 구성된 전시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만 이 둘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의 시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을 둘러보다가 작가에게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온갖 오물이 떠밀려오는 얕은 강물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조야한 낚시 바늘을 강에 던져둔 채 집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재를 실은 강물을 더럽다, 불쾌하다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그 광경을 통해 젊은 작가는 성스러움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모니터에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의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권사님의 음성은 맑고 또렷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망설이다 전화를 올렸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00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괴질 때문에 만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음성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피차 안부를 주고받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고마움으로, 안쓰러움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쇠락의 징조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헬렌 니어링이 엮은 <인생의 황혼에서>라는 책을 찾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남아 있는 힘이 줄어들수록 내게 그것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지금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너무 나빠져서 젊은 시절 자연이 보여주었던 그 빛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자연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내 수족은 이내 지치겠지만, 무한한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내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먹는 이 소박한 음식을 이렇듯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삐걱거리고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움막집에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헬렌 니어링 엮음, <인생의 황혼에서>, 전병재·박정희 옮김, 민음사, 2002, p.30-31/윌리엄 엘러리 채닝이 ‘루시 에이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40)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이 이 글 그대로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생을 한껏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핍에만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잘 누릴 줄 아는 것이 생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 익어 땅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여정 마치는 그날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임을 압니다. 무명의 시인은 땅의 길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길이 열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당 수용 인원의 1/3이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일부터 대면예배와 영상 예배를 병행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교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렙니다. 한 동안 사람들이 전혀 머물지 않았던 지하 친교실 공간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습니다. 아직 식사를 나눌 수는 없지만 행여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면 그곳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실을 담당하는 교우들도 예배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1,2부 예배 리허설을 했습니다. 초봄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이 늦가을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춘추春秋‘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시인은 ‘꽃망울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연상했던 것일까요? 그렇기에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조사 하나를 바꾸는 순간 문장의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가고, 열대야로 밤을 지새던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인은 마침내 한 줄을 시에 더 보탰습니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적고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를 적기까지 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춘추’라는 시 제목이 참 적실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그리움으로 채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사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 전반이기에 상투적으로 쓰는 이 말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의 신학 논문’을 비텐베르그 성교회 문에 게시한 날을 사람들은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개혁 정신은 낡은 것, 변질된 것, 권력으로 변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 정신이라는 알짬이 사라진 교회와 제도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만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각 교단들이 보이는 행태는 개혁 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희망은 품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부터의 은총이 주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조롱, 냉소와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기우뚱한 벽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밀어넣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더디다 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칠 뿐입니다. 잔뜩 찌푸린 날입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가끔은 어둠에 잠기지만 본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주위에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한껏 누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0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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