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구유에 나신 주
함석헌
거룩하신 생명님 하늘 영광 버리고
어디 갈 곳 없어서 이 땅 위에 오셨나
교만한 맘 이러다 영광 잃고 티끌 속
빠져드는 이 인생 거지시려 오셨네
전능하신 생명님 넓은 천지 버리고
어디 갈 곳 없어서 베들레험 나셨나
믿는 마음 잃고서 지혜 찾아 병들어
적어가는 이 인생 고치려고 오셨네
영원하신 생명님 크신 전당 버리고
어디 갈 곳 없어서 나그네 집 나셨나
제 살림을 해보자 아버지 집 버리고
헤매이는 이 인생 찾아오시려 오셨네
무한하신 생명님 높은 보좌 버리고
어디 갈 곳 없어서 말구유에 나셨나
참 맘 잃고 거짓해 속의 등불 꺼지어
어두워진 이 인생 밝히시려 오셨네
세계에도 이 조선 이 마을의 이 장막
이 장막도 쫓겨나 해 저무는 이 저녁
말구유 같은 내 맘에 생명의 님 오시니
드릴 말씀 없어서 눈물지며 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