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뮬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록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포옴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럼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