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하늘나라 박정오 목사님께 올리는 글 2007년 03월 25일
작성자 윤석철
하늘나라의 박정오 목사님께 올리는 글 윤석철 올림 목사님, 이제 목사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동안 육신의 질병과 끈질기게 씨름 하셨고, 점점 노쇠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추스르고 세우기 위해 남달리 애쓰셨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의연한 모습 늘 잃지 않으셨습니다. 평생 목사님이 의지하신 말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 그 말씀을 붙잡고, 목회자의 어려운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선생님이시고 지도자이셨지만 하나님께 한 없이 매달려야만 했던, 저희와 똑 같은 신앙인이기도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가슴에 품으신 아픔과 슬픔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위로해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언제나 저희 앞에 담임 목사님, 원로 목사님의 단정하신 모습만 보이려 애쓰셨습니다. 목사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놓으시고, 홀연히 하나님 부름 받아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누구와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받은 놀라운 소식에 저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 곁에서 잘해드린 것도 없지만 그래도 부활절 때 귀국하겠다고 약속을 드렸는데 그것도 못 기다리시고 그처럼 총총 떠나셨습니까?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섬기며 아끼시던 이 교회의 설립 100주년 기념일이 겨우 1년 남짓 남았는데 그렇게 떠나셨습니까? 목사님과 함께 연세 들어가시던 저 여러 원로 교우님들, 그 분들의 정을 그렇게 뿌리치고 떠나셨습니까? 아들같이 목사님을 받들고 모시던 김기석 담임 목사님에게 든든한 울타리 되어 주시고 조언자로 뒤 받쳐 주셔야 할 일이 아직도 많고 많은데 어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셨습니까? 친 형님 모시듯 아버지 모시듯 목사님을 따르던 저분들을 뒤에 남겨 놓으시고 그리 지금 가셨습니까? 제가 떠나기 2주 전쯤, 목사님은 연락처 하나를 저에게 건네셨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니 서로 사귀고 얘기도 나눠보라”고 건네주신 그 분의 연락처를 받아 들고 건성 그러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 목사님께서는 어김없이 저에게 확인해보셨습니다. 그후, 출국하기 전날, 바로 주일 예배 전, 다시 확인하시는 목사님께 연락했던 일을 말씀 드리자 목사님은 그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띠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목사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우셨던 것입니다. 목사와 교우로서만이 아니라 목사님과 따스한 정을 나누는 인격으로 저를 초대하셨고, 그래서 대구의 김 교수와 저를 연결하신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 목사님, 아버지 같으셨던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청년시절, 난데없이 불쑥 찾아 뵙고 결혼식을 부탁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목사님은 선선히 승낙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다니지도 않는 사람이 목사님 주례로 청파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한지 7개월 넘은 그 해 년 말, 잔뜩 술에 취한 채 느닷없이 아내를 끌고 목사님 사택에 맨손으로 인사를 갔습니다. 넉살 좋게 넙죽 절하고 기도해주십사 청하며 무릎 꿇은 저를 한참 말 없이 바라보셨지요. 그리고 술 냄새 풍기는 저를 받아들여 간절히 기도해주셨습니다. 그 후 7년, 까마득하게 하나님을 잊고 정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기로 작정하고 귀국한 후, 청파 교회에 목사님을 찾아 전화 드렸습니다. 집 나간 작은 아들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목사님의 기뻐하시는 음성,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그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12월 초, 헌금찬송으로 찬송가 315장 <돌아와>를 불렀을 때, 목사님께서는 말없이 제 등을 두드리며 쓸어주셨습니다. 제 마음을 아셨습니다. 늘 해외로 바삐 돌아 다니다가 교회에 불쑥 나타나면 저를 <돌아온 탕자>라고 부르셨으니 말입니다. 1976년 목사님을 처음 뵌 이래, 쌀쌀맞게도 저는 목사님을 꼭 3번만 댁으로 찾아 뵈었습니다. 결혼식 부탁할 때 한번, 그 해 년 말에 술 취해서 한번, 그리고 몇 년 전 목사님을 차로 댁에 모셔다 드릴 때 한번. 30년 넘는 세월 동안 목사님은 한결같이 저를 지켜보고 계셨지만 저는 제멋대로 살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처럼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 장로 직분에 대해 권하셨지만 몇 년 동안 목사님의 속을 태워드렸습니다. “나 이제 몇 년 더 못살아” 하시면서 협박(?) 반 사정 반 말씀하시던 날,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 할 만큼 이렇게 돌아다니는 저에게 목사님은 무엇을 보셨고 무엇을 기대하셨는지요? 부끄럽고 가슴 아프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박정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그 시대에 드물게 열린 마음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깜짝깜짝 놀랄만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매섭고 엄정하고 쌀쌀하여 찬바람 나기도 하셨지만 세상에 대하여는 큰 틀로 보셨던 분이셨습니다. 의문(儀文)과 제도와 규례에 얽매어 있는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기독교인의 편협성과 공격성 배타성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연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서슬 퍼런 군사독재시절, 청파의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님의 음성, 쇠 북을 두드리는 듯한 그 강렬한 음성으로 선포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으셨으니 무엇이 두려우셨겠습니까? 청파교회 교우들은 두 가지 유명한 명제를 신조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 <옳은 것이 좋은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물결치게 하소서>라는 청파교회의 <헌금기도>는 그 시대 교회의 사명을 선언하는 일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일을 이끄시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계셔서 청파교회가 그런 교회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드린 후 교회 문을 나설 때면 감동에 벅찬 부듯한 가슴을 안고, 우리 모두 투사처럼 살 것을 굳게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님>을 알았기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 믿었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편안과 눈 앞의 이익이 내미는 손을 잡으려 하다가도 단호히 손을 거두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거 아니야요!” 목사님 특유의 그 강력한 메시지로 양육 받아서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서>와 <아모스>를 강해하실 때 저희들에게는 목사님이 바로 야고보 사도처럼, 아모스 선지자처럼 보였습니다. 작지만 단단하고 알찬 교회 청파교회는 그렇게 목사님의 지도와 훈련으로 여물었습니다. 그런 교회의 교우로써 저희는 한 없이 행복했습니다. 목사님, 사랑하는 박 목사님,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들은 곳은 북 아프리카 리비아(Libya)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였습니다. 전화가 안돼 아내가 보내준 한글 이 메일을 몇 시간 뒤, 늦게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비행 편을 구한다고 하여도 장례절차 이내에 서울에 도착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 가시는 모습 뵙지 못했고, 슬픔에 잠겼으면서도 애쓰던 교우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장로의 직분에 합당한 의무를 담당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 담임 목사님의 슬픔을 들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국제전화선을 통해 전해오는 그 슬픔과 안타까움은 바로 저희들 모두의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에 돌아가면, 목사님 앉아 계시던 자리, 비어있는 그 자리를 어찌 감당할지요. 그런데 목사님, 오래오래 드리던 기도 중에 목사님의 편안하신 모습을 뵈었습니다. 흐뭇한 웃음 띠실 때의 그 어린이 같은 입 모습과 미소도 보았습니다. 늘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셨는데 이제 만나셨겠지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머니 사진 걸려있는 벽을 바라보면서 새벽이면 “엄마, 엄마” 우셨다고 말씀하셨지요. 목사님께서는 어머니의 사랑하는 막내아들이셨다지요. 사랑하는 박 목사님, “이제 됐어요” 그 한마디 말씀하시면 누구도 더 권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됐다” 하시면서 세상 놓으셨겠지요. 가실 곳이 있으니 평안히 떠나셨겠지요. 목사님께서는 가정의 가장이셨고, 사랑하는 장민숙 사모님의 남편이셨고,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뻐하셨던 시내씨의 아버지셨습니다. 믿는 곳이 있으니 훌쩍 남겨두고 떠나셨겠지요. 목사님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겠지요. “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런 그는 행복했을 것이라. 그를 가진 세상도 행복했을 것이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박정오 목사님. 목사님을 만났음이 저희 모두의 행복이었습니다. 이제 짐을 놓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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