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2006년 12월 11일
작성자 장 혜 숙
세상살이에 어설픈 미숙아인 그 또는 그들이 나는 좋다. 내가 좋아하는 그 또는 그들이 세상살이에 능숙해진 모습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는 순간 나는 그냥 온 몸에 힘이 쭈욱 빠진다. 눈동자를 후비고 들이닥치는 찬바람에 노출된 듯 눈동자도 아리아리 해지고 콧잔등도 시큰시큰해진다. 홍세화씨가 망명시절 빠리에서 목메어 부르던 < ~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 에 함께 목이 메던, 아련한 무언가에 그냥 눈물이 돋는 그런 그 또는 그가 그립다. 결코 그 병에 걸리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번쯤은 피터팬 신드롬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오늘, 능숙하게 오늘을 살고있는 그 또는 그들에게 김광규의 시가 얼마나 아련한 이야기가 되었는지 알려주고 싶다. <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 광 규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을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 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길을 걸었다 돌돌 만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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