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우순덕 사모님을 아십니까? 2006년 11월 28일
작성자 사무실
지난 10월에 김준우 박사님이 우리 교회 소속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 오후 특강 때 김준우 박사님과 대면식을 가졌지요. 사모님과는 아직 인사가 없는 터라 인터넷에서 우순덕 사모님에 대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당신의 햇살을 나눠 주세요" - 햇살센터 원장 우순덕 6남매의 맏딸. 순할 순(順)에 덕 덕(德)자인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내 사랑하기로 했다는 착한 소녀는 수십 년이 흐른 뒤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다. 살면서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져 그 빚을 할머니들께 갚고 있다는,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선교센터 겸 쉼터인 ‘햇살센터’의 우순덕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만 있을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사랑의 빚이라고 봅니다. 그 빚을 이제는 돌려드려야죠.” “저기가 K-6라고도 불리는 미군부대 캠프 험프리예요. 여기부터가 쭈욱 기지촌인 셈이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만난 그이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미리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를 따라간 곳은 부산스럽지도 그렇다고 한산하지도 않은 기지촌 거리. 태극기와 성조기가 줄지어 걸린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도로들을 사이에 두고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조악한 간판의 상점들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었다. ‘Rent Room'이라고 쓰인 상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로 리모델링한 날건물들이 어색하게 자리 잡은 곳, 바로 그이가 보여주고자 한 곳이었다. “저 클럽 보이죠? 우리 할머니가 저기서 일해요. 왼쪽의 건물 보세요. 저게 지난달까지 우리 할머니가 일하시던 곳이에요.” 어색할 만큼 크게 새겨진 온갖 ‘CLUB’ 간판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이는 끊임없이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입구만 있을 뿐 창문은 없어서 전혀 환기가 안 된다는 클럽들 이야기며, 노년에도 여전히 클럽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일상, 그리고 미군이 새로 들어온다는 얘기에 새로 건축되는 건물들 때문에 주변이 뒤숭숭 하다는 소문을 열심히 들려준 그. 쉰다섯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열정으로 햇살센터를 운영하며,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 온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있는 햇살, 우순덕을 만나보자. WHY : 햇살센터라는 이름이 너무 예쁘다 우순덕 : 이런 쉼터를 하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처음엔 햇살로 수놓는 집으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햇살센터로 줄였다 (웃음). 우리 할머니들 삶이 그 동안 너무 그늘지고 어려웠으니까 이제는 그 마음의 그늘을 햇살로 수놓아서 아름다운 삶으로 엮어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예쁜가? WHY : 예쁘다(웃음).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우순덕 : 원래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다. 감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때부터 이 땅의 불쌍한 여인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다. 그 후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불우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꾸려보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소외된 여성을 위한 봉사에도 여러 분야가 있어서 ‘서울여성의전화’에서 상담교육도 받고 한 2년 동안 상담을 하기도 하고 성폭력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관심범위가 좁혀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소외 여성, 특히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된 것 같다. WHY : 햇살센터를 처음 세운 것이 2002년 봄이다. 우순덕 : 2000년 가을,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을 위해 미국에 갔다오면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는데 마침 안정리에 60여 분의 기지촌 할머니 분들이 계신다고 들어서 알게 되었다. 2001년 여름부터 사전조사에 들어가서 2002년 봄에 개원했다. WHY : 가족들이 반대는 안하던가? 우순덕 : 반대는 안 했다. 근데 미국 갔다 오고 나서 2000년 가을부터 평택 가서 일한다고 하니 처음엔 멀다고 뭐라 그러더라. 그러다 2001년 봄이 지나고 여름 지나고 2002년 봄이 되니까 그렇게 원하면 가서 하라고 그러더라 (웃음).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WHY : 처음엔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우순덕 : 물론이다. 처음엔 할머니들이 많이 거부반응을 보이셨다. 근처 교회와 푸드뱅크 도움을 받아 할머니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 드리면 그것도 싫어하시는 분들 많았다. 그래도 계속 마음을 열고 꾸준히 다가갔더니 할머니들도 결국 마음을 여셨다. 처음엔 햇살센터를 반지하 전세방에 꾸렸는데 그땐 서른 몇 명이 단칸방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 내가 스포츠 마사지 배운 걸로 스포츠 마사지를 해드리기도 하고 파마 봉사자들이 오셔서 우리 할머니들 파마를 해 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파마를 하시다 말고 막 우시더라. “아니, 할머니 왜 우세요” 했더니 교회를 다니시다 상처를 받은 일이 있어 이젠 안 다니시는데 찬송가가 부르고 싶으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랬다. 그럼 부르시자고. 그때 파마 모자 뒤집어쓰고 찬송가 부르는데 할머니들이 그러시더라. 맨날 불렀으면 좋겠다고.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그럼 그러자고 해서 매주 월요일마다 찬송가를 부르게 됐고 그렇게 할머니들과 마음의 문을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할머니들이 알고 보면 그렇게 마음이 여리실 수가 없다. WHY : 햇살센터가 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순덕 : 매주 월요일마다 할머니들하고 모여서 찬송가 부르던 게 일종의 찬양예배가 되었는데 그게 작년부턴 매주 화요일로 바뀌었다. 그 예배가 끝난 후엔 공동식사를 하고, 각종 명절엔 함께 모여서 식사도 하고 또 야유회도 간다. 그 외에도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들이 있다. 지역의료기관 등과 연계한 의료연계서비스, 방문상담, 법률상담, 푸드뱅크를 통한 식사 지원, 미술치료와 춤치료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독거노인 주치의 맺기 운동본부’의 도움과 안정리의 박장석 치과의 도움으로 30여 분의 할머니가 틀니를 새로 해 넣기도 하셨다. 보험도 안 되는 거라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거였는데…(웃음). 그 외에도 성폭력 상담, 입양된 자녀찾기, 혼혈아동에게 학습비와 용돈을 지급하고 후원하는 프로그램 등 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올해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주거공간마련운동이다. WHY : 주거공간마련운동? 우순덕 : 2003년 여름을 기점으로 미군이 온다는 것이 공식화됨에 따라 기지 주변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집값들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직접적인 피해자라면 어찌보면 우리 할머니들은 간접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연탄을 떼는 집에서 월세 5만 원, 7만 원짜리 집에서 살 수 있었는데 집들이 죄다 재건축 붐이 이는 바람에 보일러 떼는 집으로 이사가야 하고 그 때문에 방값을 십오만 원, 십칠만 씩 내게 되니까 한달에 25만원 되는 생활보호비 받아서 그거 내고 나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주거공간마련운동을 하고 있다. WHY :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면서 아쉬운 점도 많이 느낄 텐데…. 우순덕 :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답답한 건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해 다들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평택지원특별법이란 게 있지만 미군기지로 인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할머니들 아닌가?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선 한 줄도 언급된 바 없고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하는 성매매특별법을 봐도 외국 여성에 대해서도 지원하면서도 자국의 전쟁으로 인해 생긴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 WHY : 외람되지만,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기보다 자의적인 성매매 여성이라고 보는 시선이 더 강한 편이다. 우순덕 : 여러 가지 시각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보는 시각으론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때문에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 때문에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게 너네를 구하러 간 우리네 군인들을 즐겁게 해 줘라 요청을 하니까, 우리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서 기지주변에 보건소를 만들어놓고 성병검사를 해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깨끗한 여성들만 클럽에서 일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환경들로 인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기지촌 여성으로의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이 많다. WHY : 예를 든다면? 우순덕 : 우리 할머니 중 한 분은 결혼해서 아기를 못 낳는다고 시집에서 쫓겨났다. 소박맞은 여자가 어디 가서 살 데가 있나? 누가 미군부대 근처 식당을 소개해서 그곳에서 일하다가 미군을 만나다 보니 어찌해서 살게 됐고 또 아기까지 낳게 됐다. 결국 할머니가 아기를 못 낳았던 게 아니라 남편이 능력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너무 분해서 그때 그 할머니가 자기가 낳은 아기를 데리고 시어머니랑 남편 앞에 가서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니랄까봐 그 앞에서 젖도 먹였다 그러더라. 내가 어디가면 그런다. 누가 그 할머니한테 돌을 던지겠냐고. 칠거지악하고 가난이란 족쇄가 그 할머니를 기지촌 할머니로 만든 거 아니냐고. 또다른 할머니는 전쟁 때 부모 다 잃고 오갈 데가 없어서 친구가 “좋은 언니 집이 있다. 가자, 거기 가면 공짜로 밥 준대”라는 말만 믿고 덜컥 따라 갔다가 친구가 “나 며칠 어디 갔다올게. 기다려” 그래놓고 혼자 도망갔다고 한다. 친구는 없지. 자기 혼자 있는데 얼굴이 하얀 사람 까만 사람 왔다 갔다 하니까 무섭지 그러니까 “저 갈래요”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너 며칠 동안 먹은 밥 값 내 놔! 잠잔 값 내놔!”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게 포위망을 짜놨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너 하룻밤만 자라. 그럼 내가 봐 줄게…”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나니, 옛날 사람 정조관념에 이제 버린 몸 싶어서 못 빠져 나오게 되고 그렇게 기지촌 여성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런 케이스가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할머니들은 움츠러들고 피해의식에 갇혀있는 분들이 많다. 평생을 남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오시다보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시게 된 것이다. 그런 지난날의 아픔을 풀어버리고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인생그림 새로 그리기’ 치료 프로그램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다. 내적인 상처를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WHY : 힘들지 않나? 우순덕 : 힘들다. 그러면서도 힘들지 않다. 사실 햇살센터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더 많다. 하지만 인력도 자금도 많이 부족하다. 현재 1주일에 3일 나오는 파트타임 간사 한 명 정도만 함께하는 실정인데 보다 원활한 활동을 위해선 풀타임 간사가 3~4명이 더 달라붙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힘들다. 그러나 또한 힘들지 않다. 이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그런 보람된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는 날까지 우리 할머니들과 언제나 함께 하고 싶다. 이것이 아마 내게 주어진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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