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라마단(Ramadan)에 카이로에서 2006년 09월 25일
작성자 윤석철
라마단이 시작됐습니다. 30일간 계속됩니다. 금식과 하루에 수도 없이 알라신에게 기도 드리는 금욕, 절제의 기간입니다. 저의 눈에는 너무 극단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제 이집트인 친구 사파트 마르무쉬는 오랜 이집트의 역사만큼이나 조용하고 지혜로운 사람인데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저의 신앙적 게으름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가 기도 드리기 위해 조용히 일어서서 메카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하면 저 또한 눈을 감고 기도 드립니다. 묻지는 않지만 서로 무엇을 위해 기도 드렸을지 미루어 알만한 사이입니다. 2주전, 우리는 독일 칼스루에(Karlsruhe)에서도 만났고, 이집트 카이로에서 다시 만나 며칠 간 함께 일을 합니다. 작년 5월, 다른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이후 벌써 카이로와 비엔나, 칼스루에 등 여러 곳에서 일곱 여덟 번 만났습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조용한 깊이’ 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 신.구약 성경을 모두 3번이나 읽은 ‘무슬림’ 입니다. 그를 알고 난 후 “아, 이슬람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저를 통해 “그리스도인 그리고 기독교”를 느꼈을 것이란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 창 밖으로부터 확성기를 통해 모스크 사원의 기도 부름의 소리가 들립니다. “알라에게 돌아오라, 알라에게 돌아오라, 그는 위대하시다” 대충 그런 내용이라는 설명을 어제 들었습니다. 라마단의 금식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지 식사를 끊고 금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배웠습니다. 금식을 통해, 먹는 것 사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의 아픔을 깨닫습니다. 알라신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전반적으로 뒤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이슬람은 더불어 사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로 듣고 책으로 배웠던 것들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것인지 깨닫습니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테러와 억압, 그리고 반 문명적 반 지성적 인식의 상징으로 받아 들이는 사회에서 저는 살았습니다. 서구 중심의 사고와 세계관에 얼마나 깊게 함몰되어 살았는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과 “샬람 알레이쿰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 이라는 인사를 나눌 때 우리는 다른 종교인이 아니라 ‘사람’으로 함께 교감합니다. 평화는 이 곳의 기원(祈願)입니다. 삶 전체가 평화를 기원함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로 인정함이고, 신의 섭리 안에 내어 맡김이고 나의 작은 것을 내어 놓음입니다.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적어도 열 사람이 먹을 것을 내어 놓는다 합니다. 그럴 수 없으면, 할 수 없지요.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내어 놓을 뿐입니다. 금식을 누가 지키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오직 신과 자기의 약속이고 그것을 지키는지 여부는 신과 자기만의 일이라 합니다. 또한 매우 폭 넓게 예외를 인정합니다. 병 중에 있는 사람, 낙타로 하루 여행거리(50 km)이상을 여행하는 사람, 어린아이들, 임산부 등등 제 때에 식사를 하는 것이 건강에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허용되는 일입니다. 오늘 만난 카이로의 변호사 마크람(Makram)은 일흔이 넘은 사람인데 몸이 안 좋다 합니다. 저에게 차를 권하길래 “라마단인데 나만 마시기가 어렵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는 방에서 마셨다면서 “코란에도 예외가 허용될 때는 그 예외를 즐기는 것이 좋다”라고 기록돼 있다면서 조용히 웃었습니다. 하루에 수십 번씩 평화를 기도하면서 폭력을 계획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신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면서 형제에게 무자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그 형제 개념이 누구까지를 포함하는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 멀리서 그 곳을 바라보는 일이 참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이제까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도 이방인이라는 생각 없이 그들과 함께 잘 지내왔습니다. 지난 번 Karlruhe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제 친구 마르무쉬를 생각해서 저는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피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식사 후에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음식 냄새를 지우기 위해 오래오래 양치질을 했습니다. 함께 식사할 때, 제가 식사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는 조용히 기다려줍니다. “사려 깊고 조용함”이 서로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라마단 기간 중 금식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의 금식입니다. 아침 식사는 저녁 여섯 시 이후에 합니다. 보통 하루 한끼, 아침 식사이지요. 영어의 아침식사 Breakfast는 금식(fast)를 끊는(break)다는 뜻이니 참 묘하지요. 하루 종일 금식하고 저녁에 집에서 한 끼 식사하는 것을 Breakfast라 부릅니다. 금식 중에는 물도, 차도 안마십니다. 조금 전, 제 아내 장혜숙 권사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이제 잠 자리에 든다면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저를 챙겨주는 것이지요. 식사 잘 챙겨 먹어라, 어둔 밤길 조심해라, 사람 많이 모이는 데 가지 마라. 위험한 데 가지 마라. 주로 “해라, 하지 말라” 입니다. 창 밖이 많이 어두워 졌습니다. 저들이 집에서 조촐하고 경건한 식사를 할 시간입니다. 저도 내려가 무언가 저녁식사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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