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브레멘(Bremen) 가는 길 2006년 06월 21일
작성자 윤석철
오늘 다시 브레멘(Bremen)에 도착했습니다. 작년 12월, 금년 2월 말, 그리고 다시 왔습니다. 베를린에서 차로 4시간 가량 걸렸습니다. 오늘은 아들 여민이와 같이 왔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아들은 옆에서 곤하게 자고, 저는 목소리 높여 315장 찬송을 불렀습니다. 언젠가 한번 쯤, 헌금 봉헌 시간에 찬양 허락해 주십사 용기를 낼 지도 모릅니다. 아래의 글은 한국일보에 지난 달에 연재한 글 입니다. 브레멘 가는 길 (무기, 전쟁 그리고 인간 52회) 윤석철(한국일보 객원기자 ysc@sooa.com) <길> 작년 12월 8일. 이미 자정을 넘긴 새벽 1시 30분. 캄캄한 밤이었다. 독일 북부 하노버(Hanover)를 지나 브레멘(Bremen)으로 가기 위해 7번 아우토반을 달렸다. 남부 도시 뉴른베르그(Nuernberg)를 출발한 후 벌써 7시간 반을 운전하고 있었다. 필자가 다음날 방문하려는 회사는 군사용 전자 장비와 기술분야에서 유럽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유명한 군수업체였다. 퍼 붓듯 쏟아지는 폭설로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의 윈도 브러시는 쏟아지는 눈을 힘 겹게 옆으로 쓸어 내렸다. 필자에게는 다음 날 면담할 사람과 나눌 대화를 큰 소리로 혼자 말하면서 미리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필자의 작은 차 안은 연설의 뜨거운 무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상한 음악이 출렁이며 흐르는 연회장이 된다. 그때 섬광처럼 머리 속을 파고 들던 그 생각을 필자는 잊을 수가 없다. 왜 길에서 벗어나 새 길을 거기서 찾는가? 왜 지금 내 앞에 새로운 길을 내주십사 기도하는가? 이미 내 길이 저 옆에 마련돼 있는 데…… <무기> 과학자들은 늘 ‘세계 최초’를 꿈꾼다. 탐험가들은 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을 꿈꾼다. ‘세계 최초’는 ‘우리가 이미 손에 가지고 있던 것’, ‘우리의 발이 어제 닿았던 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이다. 그들이 인류의 지평을 넓혔다. 꿈만 꾸던 하늘로 인류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 끝이 어디일까? 그 한계가 어디쯤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점점 확장된 ‘여기’가 온 우주에 가득 차기도 하고, 끝 없이 작은 ‘거기’에도 온 세상이 깃들어 있다. 낯선 밤 길을 운전할 때 깜빡이며 한동안 앞서 달려 나가는 다른 차가 고맙다. 같은 아우토반을 달려도 그는 그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일이 있다. 함부르크로 가는 길과 브레멘으로 가는 길이 저 앞길 어디에선가 나뉘어 진다. 내가 그의 뒤를 따라 함부르크로 갈 이유는 없다. 필자가 연재하는 글 <무기, 전쟁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이다. 무기를 통해, 전쟁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국가의 본성을 더듬어 본다. 우리가 꿈꾸며 살아 온 평화를 역설적으로 무기와 전쟁을 통해 찾아보려는 작업을 한다. 전쟁을 억제하는 힘, 평화를 지키는 힘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처음부터 불가능한 명제였을지 모른다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반전운동(反戰運動)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더 현실적 대안이라는 생각에서 이 길을 간다.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킬 전쟁’이라던 1차 세계 대전은 국가마저도 인간처럼 끝 없는 탐욕의 포로라는 것만 증명했을 뿐이다. 교도(敎導)를 통해 인간의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전쟁의 본성을 잘 못 이해하고 있음이다.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든 20세기는 세기사적 패권이 등장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패권이 쇠락한다는 것은 역사적 법칙이다. 그것이 21세기 역사의 어느 쯤에 기록될 것인가?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 필자는 불행하게도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전쟁을 바라보고, 전쟁을 이해하고, 그리고 위기가 전쟁으로 치닫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전쟁을 통해 얻을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무언가를 잃지 않겠다고, 내 것을 지키겠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도 있다. 전쟁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에만, 전쟁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는다.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라고 입으로 말은 하지만 물리적 힘에 의지하고 싶은 유혹은 마약보다 강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전쟁은 습관이 되고 중독이 된다. 프러시아의 군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전쟁의 본질을 밝혔다. 그 말은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정치가 있는 곳, 그 곳에 전쟁이 있다. 즉 전쟁이 정치의 수단이라는 의미지만 더 나아가 정치가 전쟁을 관리하는 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군이 수행하는 전쟁을 지도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해할만하다. 지난 4월 24일부터 27일까지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에서 방위산업 전시회가 열렸다. DSA 2006 (Defense Service Asia 2006)이라 불리는 전시회다. 이미 10회째다. 필자는 1988년 첫 전시회, 그리고 1990년, 2000년, 2004년 마지막으로 금년까지 5번 이 전시회를 참관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전시회의 규모가 커지고, 참가하는 나라 숫자도 늘어났다. 출품하는 무기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그 질도 점차 높아졌다. 우리 정부에서는 방위사업청장을, 그리고 군에서는 육군 참모차장을 파견하여 세계 각국과 군수 협력, 무기 교역을 추진했다. 국내 14개 유명 방위산업체들이 방위산업 진흥회의 주선과 지원아래 이 전시회에 참가했다. 이번에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것이 있다. 앞으로 다시 다루겠지만 인도의 BrahMos라는 회사가 러시아와 기술 협력을 통해 개발한 신형 순항 미사일 (Cruise Missile)이었다. 마하 2.8(음속의 2.8배)의 속도로 비행하여 해상, 지상 표적을 타격하는 미사일이다. 이미 군사 전문 자료를 통해 이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생산업체의 입을 통해 그 개발과정과 성능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자기들의 무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그저 무기를 개발하고 만들 뿐이었다. 더 강력하고, 더 효과적이고 더 편리한 것을 끝 없이 추구한다. 새로운 무기가 시장을 창출하고 수요가 끊임 없이 새로운 무기의 개발을 촉진한다.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를 한꺼번에 흔들 수 있는 장치도 개발하려 할 것이다. 어렵게 마련한 돈을 싸 들고 국제 무기시장을 기웃거리는 나라들을 유혹하며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독일, 프랑스 심지어는 파키스탄 이란까지 갖가지 상품을 흔들어댄다. 어떤 나라가 쓰나미 재해 원조자금에서 수십 억불의 군사자금을 만들었다는 믿기지 않는 입 소문이 나 돌기도 했다. <역설의 평화> 필자는 여러 번 평화의 정의(定義)를 언급했다. 통일 연구원이 발간한 자료 가운데 평화에 관한 인식을 조사한 것이 있다. 1989년과 2003년의 조사 자료가 비교되어 있는 데 그 내용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예상과 달리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응답은 두 번의 조사 보고서에서 모두 30%를 넘지 못했다. 사회 정의가 실현되고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상태, 사람들간 계층간 갈등이 없는 상태, 개인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완전한 평등이 이뤄진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한다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후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평화가 삶의 질, 정치의 질을 얘기하는 수준으로 엄청난 변화를 보인 것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 필자는 단연 아니라(NO!)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인식 변화만큼 실제 현실은 변화하지 않았다. 주변국 모두가 입으로는 화해와 공동번영을 얘기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더 극적으로 커졌다. 전쟁을 잊고 살 수 있을 만큼 우리 주변정세가 변하지 안았다. 한반도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애써 눈감으려 한다. 우리 민족의 의사와 상관 없이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 있는 구조로 변화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구조를 살펴보자. 간단히 정리하자면 평화는 정통성에 바탕을 둔다. 그런데 그 정통성은 힘에 의해 지탱된다. 정통성이 없는 힘은 폭력이며 궁극적으로 혼란을 잉태하고 있다. 국가의 정통성은 국가가 힘을 독점하고 있음으로 가능하다. 세계정부가 구성돼 있지 않은 오늘의 세계사회에서 패권국가인 미국에 의해 유지돼 온 평화(Pax Americana)는 세게 도처에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궁극적으로 정통성의 부재(不在)라는 치명적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세계사회에서 미국이 정통성을 가지려면 미국이 물리적 힘을 독점해야 된다. 미국은 물리력을 독점하지도 못했고, 정통성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그것이 미국이라는 점, 또 하나는 그 힘을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는 점 때문에 정통성의 확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1세기의 인류가 파멸적 재앙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켜 내는 힘만큼은 갖추어야 한다. 눈 앞에 닥친 물리적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자위(自衛) 능력이 없다면 기꺼이 폭력에 굴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를 낮추는 일에라도 민첩해야 한다. 상대는 자기의 힘을 신(神)으로 삼는 ‘지나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 힘이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힘이 평화를 지키는 힘이다. 깨어지고 부서진 전장의 건물더미 속에 피어난 꽃 한 송이는 그래도 인류에게 남은 한 줄기 희망의 계시다. 우주를 운영하는 질서를 믿기 때문이다. 이대로 끝을 향해 달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절대이성(絶對理性)이 있을 것이다. 여러 곳에서 필자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눈 길 달려간 브레멘(Bremen)에서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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