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기다림 2006년 06월 01일
작성자 윤석철
(한국일보 인터넷 판)에 연재 중인 글 입니다. 기다림 무기, 전쟁 그리고 인간 44회 윤석철(한국일보 객원기자. ysc@hk.co.kr) <나비부인> 어느 맑게 갠 날, 먼 바다 수평선 너머로 연기가 피어 오르면 하얀 배 한 척이 항구로 들어와 예포를 울리겠지. 봐, 그이가 온 거야! 난 마중 나가는 대신 언덕에서 기다리겠어.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 중 가장 사랑 받는 아리아다. 이 곡 하나 만으로도 그는 영원히 기억될 작곡가다. 커다란 군함을 타고 미국에서 남편이 돌아왔다.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 오려니 기다리지만 소식이 없다. 밤새 창호 문에 비친 나비부인의 그림자가 가슴 저리다. 하얗게 밤을 새우며 기다리는 장면의 허밍 코러스(CORO A BOCCA CHIUSA)를 필자는 참 좋아한다. 절제된 안타까움은 낮은 선율로 흐르고 예고된 비극이 나가사끼의 밤에 안개처럼 무겁게 내려 앉는다. (삽입. 음악) 돈을 받고 시작한 사랑이었지. 그래도 그녀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했다.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이야 한 시절 사랑놀음 했을 뿐인걸. 나이 어린 일본 기생과 함께..... 이 한편의 오페라를 통해 아시아의 역사를 읽으려 한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 아시아의 밤> 빛이 꺼진 캄캄한 밤이었다. 일본은 이웃보다 한 발 먼저 서양을 따라 나섰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양이 되겠다고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달려 나갔다. 서양 세력이 허리에 찬 전대(纏帶) 속 찰랑거리는 돈 소리와 그들의 말 발굽소리를 따라갔다. 그들에게 속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100년 후, 일본은 미국이 아시아에 펼치는 군사력 전개에 재빨리 동승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재 무장을 진행한다. 이미 아시아에서 미국을 제외한 최대 해군력을 보유했고, 짧은 시간 내에 핵 무장도 가능한 수준이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지역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이미 그들은 서구 문명권에 더 근접했다. 그런 일본에게서 생존의 영역을 넘는 팽창본능을 볼 수 있다. 하기야 팽창이 생존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들이 미국의 동반자, 동아시아의 강대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일본은 과연 무엇을 노리는가? <세력쟁투> 해가 다르게 경제,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을 보면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예감한다. 새로 강대한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겪었던 파멸 직전의 혼란을 인류는 기억한다. 중화(中華), 세계는 이 단어의 무서운 의미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전세계 인구의 4분지 1이나 되는 중국인이 중화인(中華人)으로 변할 때, 그 엄청난 힘은 세계를 압도하리라. 중국이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분열과 혼란을 겪으며 주저 앉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 예측이 맞든 틀리든 중국으로부터 올 충격은 세계를 뒤 덮는 파도가 된다. 중국의 등장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미국의 심각한 고민이 어떻게 표현될까? 1차 2차 세계 대전 그리고 45년에 걸쳐 소련과 대결한 냉전에서의 승리도 다음 대결에서 미국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여기에 미국을 포함한 다양한 조합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런 눈으로 지도를 들여다 보고 세계 역사를 읽으면 우리의 시름도 점점 깊어진다. 세계사적 세력쟁투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투쟁보다는 세력간의 협력과 공존을 얘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확대되고 있는 상호 경제의존성과 국제적 위기관리 능력의 강화를 이유로 든다. 경제성장을 위해, 체제의 안정을 위해 서로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다른 한쪽을 외면한 우리의 소박한 희망일 뿐이다. 공존은 상대방의 현실적 존재에 대한 수용이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다. 나와 다른 가치체계와 질서를 가진 상대가 그에 합당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보장하는 적극적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 경제적 이익, 국익 등 이해(Interest)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의 문제다. 다시 말해 도덕, 종교, 철학, 세계관의 문제다. 문명의 충돌을 얘기하던 헌팅턴 교수의 말이 소름 끼치는 예언처럼 들린다. 필자가 중화(中華)라는 말에 주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중화는 정치적 구호를 넘어 중국인의 삶을 하나로 묵어내고 중국의 인류사적 의미를 일깨우는 새로운 종교, 철학, 세계관 그리고 그 모두를 포함하는 무엇이다. <혼(魂)> 필자는 유대민족이 겪은 고난을 동정은 하지만 오늘의 그들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어떠한 대안이 있었겠는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절박한 명제다. 사랑과 평화, 미래, 하늘나라를 선포하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이라 해도 다시 예수를 처형할 것이다. 똘똘 뭉쳐 각박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불쌍하다. 그런데 무엇이 유대민족을 그들답게 했는가? 그들이 가슴에 품고 살아온 그것이 무엇인가? 2000 년 넘는 세월 동안 전세계에 유랑민으로 떠돌던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우리 눈으로 보면 척박하기 그지 없는 그 땅. 기어이 다시 돌아가 생존을 위해 주변국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유대민족, 그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집트 정부의 고위 관리에게서 들은 얘기다. 이집트가 스웨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 그 조치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스라엘도 영국. 프랑스 편에 가담하여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때, 이집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군을 도왔다. 이스라엘 공군기가 이집트 목표물을 확인하고 공격하도록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몇 천년 동안 이집트 국민으로 이집트에 살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에게는 자랑스런 유대인이지만 이집트에게는 배반의 이집트인이었다. 낫세르 대통령은 모든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추방했다. 또 한번의 출애굽인가? 어디에 있든 국적이 어떠하든 그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기다렸다. 그들이 지킨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었다. 그 정체성의 뿌리는 유대교와 선민(選民) 의식이다. <배달인> 아시아를 덮었던 그 어둡고 긴 밤, 우리는 속살 그 깊은 곳을 모두 드러내고 살았다. 부끄러움을 느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험한 미래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것을 뻔이 내다 보면서도 오로지 오늘만을 얘기하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의 혼(魂)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어쩌다가 모든 것을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 따지는 사람들이 됐는가? 정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우리 눈에서 아직 닦아 주는 이 없는 눈물이 흐른다. 고난이 연단(鍊鍛)이 되지 않고 수치스런 상처로만 남는다면 그 보다 더한 불행은 없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유대인이 간직한 민족 정체성이 부러운 이유다. 최소한 나라는 유지했고, 지경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살아갈 땅이 있는 우리는 유대민족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처지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전쟁은 우리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가 직면한 안보 위협은 신명 나게 분출하던 활력의 맥을 끊어 놓는다. 민족이 세우려는 고양된 정기를 손상시킨다. 장기화된 민족 분열은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당연히 가져야 할 수치심마저 무디게 한다. 정체성보다 이해관계를 쫓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변국들이 쳐 놓은 그물이리라. 그래서 이 연재 <무기, 전쟁 그리고 인간>을 계속 쓸 수 밖에 없다. 기다림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때로 넘어지기는 하지만 걸어가야 할 길은 분명히 알고 사는 민족을 꿈꾼다. 밤은 지나고 어김 없이 동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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