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수필- 말에 대한 끝없는 생각 2005년 12월 05일
작성자 장혜숙
-오래 전에 런던에 있을 때 쓴 것입니다. 내 가슴엔 커다란 언어의 강물이 출렁이고 있다. 거기서 나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언어의 편린들을 건져낸다. 때로는 백설공주가 사는 궁전을 지을 조각들을, 때로는 저잣거리에나 굴러다니며 발에 채일 조각들을 끊임없이 건져낸다. Erding의 하늘은 눈이 멀도록 푸르다, 새파랗다. 눈부신 쪽빛이다. 겨울의 문턱을 갓 넘어선 이맘때쯤엔 나무 가지에 하얗게 낀 상고대가 은백색으로 빛난다. 눈 오는 날의 잿빛 하늘과 달리 쪽빛 하늘 밑에 반짝이는 상고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독일의 남쪽 작은 도시 Erding에서 제법 여러 해 동안 눈부신 자연의 빛깔에 사로잡혀 ‘아름답다’라는 말을 늘 입에 붙이고 살았다. 어느 날, 하늘이 너무 맑고 푸르러서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약간 아래에서 위쪽으로 오직 하늘만을 배경으로 직립의 인물 사진을 찍었는데, 인화된 사진을 보고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영락없이 새파란 하늘 색 바탕 위에 인물을 붙인 합성사진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 어색한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아름답다’가 나타내는 또 하나의 좋은 표현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이나 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을 "아주 자연스럽다"로 표현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면서 사람들은 “야! 멋지다. 한 폭의 그림 같아. 어쩌면 이렇게 그림같이 아름다울까!”하는 감탄을 한다. 참 이상도 하지. 우리네 말이라는 것이.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이 자연일 때는 그림 같다고 감탄하고, 그것이 그림일 때는 반대로 자연스럽다고 말하다니. ‘자연스럽다’ ‘그림 같다’ 이런 반대 상황의 말들이 한 사물을 상대로 ‘아름답다’는 공통의 뜻으로 표현되니 참 신기하다. 말이 지닌 이러한 오묘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슈퍼마켓 ‘Safe Way’에 다녀 오는 길에서 내게로 돌진해오는 바람을 만났다. 사정없이 옷깃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슬쩍 눈물이 돋았다. 독일에 있을 땐 독일어가 어려워서 자주 영어를 쓰곤 했는데, 그 무슨 조화인지, 런던에 온 후로는 툭하면 독일어가 튀어나온다. 참 야속하다. 독일에 갔을 때 처음 얼마동안은 슈퍼마켓에서 집집마다 돌리는 광고지를 대단한 Text처럼 열심히 들여다보며 물건 이름을 익혔었다. 내가 알던 몇 가지 야채와 과일들의 영어 이름을 지우고 독일어 이름으로 바꾸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새롭게 접한 이국의 찬바람과 맞서며 언어의 혼돈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바람 속에서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1950년대 후반,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빠께쓰와 벤또 대신에 양동이와 도시락이라는 말을 배웠다. 어머니는 늘 쓰시던 말을 얼른 고치지 못하셨다. 어린 나는 마치 어머니가 매국노라도 되는 듯이 저항했다. 어머니의 일본말 사용에 준엄했다. “엄마, 양동이! 도시락!” 그런 세월을 흘려보내고 이런저런 숱한 추억들을 가끔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런던 거리에서 난데없이 전에는 한번도 생각지 않았던 어머니가 쓰시던 일본말 몇 마디가 내 머리 속을 헤집고 들어온 것이다. 아마도 내가 외국어에 시달리는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불행히도 일본말을 상용하던 시대를 거쳐왔다. 그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본 말을 배우고 쓰게 되었다. 해방이 된 후에도 어머니의 언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어린 나는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말로 어머니의 언어를 바꾸려 했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잘 알게 된 후에도 어머니는 자주 쓰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일본 말로 하셨다. 그 후로 몇 십년이 더 지난 지금 어머니는 일본말 단어를 쓰지 않으신다. 필요에 의해 어떤 일본 글을 읽어달라고 어머니께 부탁을 하면, 어머니는 다 잊어버렸다고 답하신다. 난데없이 그런 어머니가 불쌍해졌다. '다 잊어버렸다'라는 말꼬리가 휘익 쓸쓸한 바람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잊은 것은 일본 말 뿐이 아닌 것 같은 쓸쓸함이 몰려온다. 그 시대가 비록 치욕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추억 속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친한 친구인 일본 여학생, 귀히 여기던 일제 소지품들, 상용하던 일본 말들…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것이라 추억의 창고에 간직하면 안 되는 금기의 것들이란 말인가? “엄마, 이제 뭐라고 야단 안 할 테니까 일본 말이든 뭐든 엄마 편한 대로 말하세요.” 40여 년 전의 유아어로 엄마를 부르며 런던 교외의 한 거리에서 나는 ‘말’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에 대한 끝없는 상념들… … 여러 나라가 맞붙어 있는 유럽에 살면서 수시로 바뀌는 언어에 휘둘려 지친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어의 불편을 경험한다. 서울에 도착한 후 며칠간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백화점에서, 거리에서 도대체 마음 놓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 참 불편하다. 외국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어디를 가든지 우리말로 무슨 말이든지 다 할 수가 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테니까 마음 턱 놓고 아무 말이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주변 사람들이 다 내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착각이 들어 공공장소에선 입이 벌어지지가 않는다. 언어가 안 통해서 숱한 불편을 겪었는데, 언어가 통하는 곳에서도 또 불편을 겪게 된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올 뿐, 얼른 말이 나오질 않는다. 외국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출신지의 억양으로 외국어를 말한다. 프랑스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이해 못하는 불어인 줄 알고 건성 듣다보면 영어이고, 이태리 사람과 말할 때는 이태리 말인 줄 알고 듣다보면 영어이고, 그런 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도 가끔 웃음을 자아낼 때가 있다. 경상도 사람은 영어를 말할 때도 경상도 억양으로 말하는데 들어보면 참 재미있다. 충청도 사람인 나는 원래 우리말을 할 때도 느리게 하는데, 잘 하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려니 얼마나 느리겠는가. 사실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건데도 충청도 사람이라 그렇게 느리게 말한다는 식으로 평가된다면 덕을 보는 셈인가? 이런 현상은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외국 여행을 하다가 간혹 우리 말을 몇 마디 할 줄 아는 외국인을 만나면 참 반갑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외국인이 경상도 말을 하거나, 전라도 말을 배워서 그대로 따라 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말'이란 정말 재미있구나, '말'이란 놈하고 좀 친해보자,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뱉는 욕이나 반말을 그대로 배워서 크게 떠드는 미군들이 제법 있었다. 우리가 뱉은 말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한 것이다. 지난 해에는 부산에서 열리는 한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했었다. 서울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갔다. 내 나라의 공항에서 나는 또 다른 언어에 부딪쳤다. 부산 말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이 귀에 설었다. 아, 나는 고달픈 에뜨랑제. 세상은 온통 수많은 말들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그 말들로 인해 환희도 맛보고 눈물도 뿌리며 산다. 말은 우리의 삶을 표현한다. 삶을 그릴 수 있는 도구이다. '말'이 나를 사로잡는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다. 모두들 나는 지금 호흡하는 중이다,라는 의식 없이 본능으로 숨쉰다. 그것처럼 말에 대한 특별한 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술술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겨우 말 몇 마디 하기 위해 계절병을 앓는 기간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끙끙 앓는다. 때로는 사슬이 되어 나를 꽁꽁 묵는 언어의 감옥, 통째로 묶인 나는 옴나위도 못하고 사슬을 풀려고 발버둥친다. 때로는 왈츠의 리듬으로 즐기는 언어의 유희, 새벽이 희붐히 다가올 때까지 나는 그 말들에 사로잡혀 밤새 숱한 단어들과 번갈아가며 손잡고 춤춘다. 나는 예감한다. 내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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