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나무 2004년 12월 31일
작성자 민호네
독일에서 맞는 섣달그믐날이 저에게는 벌써 세 번째고 경아와 민호에게는 첫 번째입니다. 작년 이맘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의 연말을 보내고 있는 저희입니다. 며칠 전에는 아내와 함께 2004년 우리 가족의 10대 사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수년 전에 김 목사님의 설교에서 힌트를 얻은 뒤로 이 일은 경아와 저의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올 한해에는 뭘 빼야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특별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슴 뿌듯한 일,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일, 누군가에게 깊이 고마워해야 할 일들이 한해의 여정 속에 멀지 않은 간격을 두고 일어났습니다. 이제 좋은 조건들이 갖추어졌으니 내년에는 내가 이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은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과제 앞에서 저의 의지를 향해 철저한 준비 명령을 내린 상태입니다. 이런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새해를 맞는 저의 마음에 방향과 생명력을 부여 합니다. 한편, 전혀 예기치 않았던 대재난으로 참혹하게 유린된 피조세계의 모습, 거기서 너무나 어이없이 생명을 앗긴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은 세모의 안온함을 몰아내고 잿빛 절망과 공포를 던져주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생각마저도 마비시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 앞에서 약간은 시무룩하게 2005년의 첫 날을 대할 것 같습니다. 나의 공부가, 나의 삶이 어떻게 하면 저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 희망을 빼앗기고 절망 속에 주저앉게 된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을까,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유한 나라의 안전하고 맵시 있는 사고와 정서에 맛 들여 피조 세계의 거친 현실과 고통에 무섭게 노출된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지나 않을까, 아니, 도대체 나의 삶이란 것도 저기서 저렇게 무력하게 허물어진 삶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당장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삶의 지향과 내용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어떤 식으로든 맞닿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면하고 기억하고 벗들과 함께 나누고 실천의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깁니다. 그 “어떤 식으로”를 나의 능력과 나의 현실에 맞게 형성할 수 있는 기술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해지고 활발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과제겠지요. 그 과제 앞에서 깨어있음이 2005년도 저의 삶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추진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을 잠시 돌려 하얀 눈밭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을 봅니다. 요즘은 산책하다가 나무들을 보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 동요 “겨울나무”가 제 입가에 맴돕니다.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있는 나무들을 응시하고 “바람 따라 휘파람” 소리를 내는지, 아니면 그렇게 내게 들리는지 나도 멍하니 서있기도 합니다. ‘왜, 동요인데도 이렇게 슬플까!’ ‘나는 어렸을 때 무슨 생각으로 이 노래를 불렀을까?’ 우연히도 몇 주 전 제가 좋아하는 로타 체네티(Lothar Zenetti)의 기도 시 “한 그루 나무처럼”(Wie ein Baum)을 발견하고 우리말로 옮겨보았습니다. 청파교우들을 향한 민호네 식구의 새해 인사를 이 시로 대신합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한 그루 나무처럼 로타 체네티 주님, 당신 앞에서 나의 인생 한 그루 나무 같게 하소서. 주님, 당신 앞에서 나의 기도 한 그루 나무 같게 하소서. 땅을 파고드는 뿌리를 주시어 나로 저 깊은 곳 아득한 시간을 딛고 서게 하시며 선조들의 신앙에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든든한 아름 줄기로 자라날 힘을 주사 내 자리에서 곧게 서게 하시며 성난 바람 휘몰아칠 때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내게서 나온 가지들이 자유롭게 자라나게 하사, 오! 나의 아이들, 주님, 그들이 힘껏 뻗어가고 또 그들에게서 난 작은 가지들이 하늘로 발돋움하게 하소서. 나에게 미래를 주시고 내 잎사귀가 푸르게 하시며 겨울이 지날 때마다 희망을 새로이 꽃피우게 하시며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주님, 당신 앞에서 나의 인생 이렇듯 한 그루 나무 같게 하소서. 주님 당신 앞에서 나의 기도가 한 그루 나무 같게 하소서. 2004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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