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아침묵상11 2004년 05월 26일
작성자 시연
묵상본문 - 렘33:1-13 "예레미야가 여전히 근위대 뜰안에 갇혀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다."(1)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 바른 말은 매우 불쾌한 것입니다. 힘있는 사람들은 참 예언자의 말을 싫어합니다. 그냥 싫어만하지 않고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하긴 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다는 망할 것이고, 시드기야도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 하였으니 그가 미움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쓴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사람이 큰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말이 들려오면 부르르 떨면서 싸우자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은 충고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이들이 있습니다. 쓴 소리를 달게 듣는 이들은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들입니다. 시드기야는 그렇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가둠으로써 그 불쾌한 말로부터 도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가둘 수 없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숲에서 그런 외침이 들여왔다지 않습니까? 황석영의 '가객'은 혀가 잘려도 노래를 불러 온 세상을 깨웁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옥중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참 말씀은 가둘 수 없습니다.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게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3) 비밀이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비밀이랄 것도 없겠습니다. 성서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급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비밀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 도성을 치료하여 낫게 하겠고, 그 주민을 고쳐 주고, 그들의 평화와 참된 안전을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겠다."(6) 하나님의 뜻은 처벌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회의 부여입니다. 어긋난 길에서 돌이키게 하고, 깨끗이 씻어 주고, 용서해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나음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벗어남이 없다면 돌아옴의 기쁨도 모를 것입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듯이 우리에게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넉넉한 배경입니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울 때는 넘어지는 방법부터 배운다지요?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기에 설 수 있었습니다. 삶이 곤고하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큰 영적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10b-11a)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은 일상의 배제가 아니군요. 일상의 축제화이군요. 종교는 흔히 금욕주의를 연상시킵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육적인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감의 기쁨을 누리도록 배려하십니다. 일상의 소음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집중을 방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염세적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16세기의 화가인 브뤼겔의 그림 중에 "인간 혐오자"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화면에는 검은 수도복을 입고 후드를 깊게 쓴 수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의 등뒤에는 둥근 유리를 둘러 쓴 작은 인물(허영심을 상징)이 나오는데, 그는 수도자의 옷자락에서 지갑을 훔쳐냅니다. 세상을 혐오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끝내 지갑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수도자는 세상을 등지면서도 허영심과 물질의 유혹은 떨쳐버리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저만치에 양떼를 지키는 목동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자기의 일상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 목동을 통해서 '자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경건한 행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은 자기의 일상의 의무에 충실하면서 그 일을 축제화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 아닐른지요? 오늘도 삶의 순간순간을 영원에 잇댄 채 살아보십시오. 좋은 하루!! "그분이 우리를 그리워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분을 그리워합니다. 이러한 그리움 없이는 그 누구도 지복<至福>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Because he yearns for us, we in turn ache for him, and no one comes to bliss withou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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