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아침묵상10 2004년 05월 25일
작성자 시연
묵상본문 - 렘31:31-40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던 엘리야는 큰 바위를 부술 정도의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지나가고, 불이 날 때까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소란함이 다 지나간 후에야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지요(왕상19:12). 세상에는 바람과 지진과 불같은 설교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고요함 가운데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멋진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이해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참 외로우십니다. 큰 소리 나는 집회에 다녀온 후의 씁쓸함 때문에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역사가 갱신되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언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옛 언약, 즉 율법 수여(하나님)와 율법 준수의 맹세(백성)를 매개로 해서 맺어진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32b) 오쟁이를 진 남편 신세가 된 하나님은 그래도 인내하시면서, 철없는 백성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거나,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돌비가 아닌 가슴에 새겨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33) 백성의 자격을 지속시켜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내가 그들이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하십니다. 가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넓은 문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지요? 넓은 문은 외적인 규정에 따르는 삶입니다. 좁은 문은 내적인 변화의 길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타율의 삶을 가리킨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자율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율의 삶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내적 변화의 길은 은총의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질서의 신비가 존속되는 한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느 히브리인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제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제 곁에 계셔 주옵소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당신을 부인할 때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옵소서." 인간이란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바라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눈 앞의 것에만 골똘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에 눈 뜨게 될 겁니다. "....그 다음에 시체와 잿더미로 가득 찬 골짜기 전역과, 기드론 시냇가에서 동쪽의 밭들의 모퉁이에 이르는 모든 평지가 나 주의 거룩한 땅이 되고, 절대로 다시는 뽑히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40)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주의 거룩한 땅'이 됩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시체와 잿더미로 가득 찬 골짜기(힌놈 골짜기), 그 부정한 땅까지도 주의 거룩한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을 키우는 것처럼 예수님이 머무는 곳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이들과 귀신들린 이들이 일어나고, 죄인과 원수가 친구로 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힌놈 골짜기가 거룩한 땅으로 바뀐다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누군가를 배제하고, 갈라내고, 울타리를 치는 분이 아니라, 녹여내고, 변화시켜 마침내 부둥켜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오늘도 희망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고요함 가운데서 그분과 깊이 사귀십시오. 좋은 하루!!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