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아침묵상7 2004년 05월 22일
작성자 시연
묵상 자료 - 예레미야 30:1-11 산 넘어 산이라지만,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것이 인생일 겁니다. 자기의 때를 잘 분별하며 사는 이는 지혜자라 하겠습니다. 쉽지 않지요. 역사의 격변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 때'가 올 터인데, "그 때가 되면 포로로 잡혀간 나의 백성을 다시 이스라엘과 유다로 데려오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달콤하지 않습니다. 씁쓸합니다. 해방의 날은 고통의 시기를 통과해야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없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서워 울부짖습니다. 남자들도 마치 해산하는 여인들처럼 배를 움켜잡은 채, 낯빛은 창백하게 변했습니다.(렘30:5-6)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어쩌면 고통의 현실보다 더 큰 아픔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통이? 고통 없는 창조가 있나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때로 슬퍼보이는 것은 그속에 새겨진 고통의 무늬 때문이 아닐까요? 고통은 살아있음의 징표입니다. 몰로카이 섬의 성 다미앤은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주여, 저들에게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지요.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려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통을 고통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회복의 신호입니다. 우리 정신의 한 켠이 무너지고 있는 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고통은 우리 생을 근본으로 돌이킬 것을 요구하는 소환장입니다. 고통스러우면 울게 되지요? 애통하는 영혼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가끔은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고통을 몰아낸다고 건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플만큼 아파야 낫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그날이 오면, 내가 그의 목에서 멍에를 꺾고, 그의 사슬을 끊어서, 이방 사람들이 그를 더 이상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하겠다."(렘30:8)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도합니다. '주님, 거짓된 자아의 질곡으로부터 저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세속적인 정념의 덫에 걸린 제 영혼을 해방시켜 주십시오.' 어쩌면 우리 생이 힘겨운 건 주인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자의 양생주 편에 보면 '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느 분이 그것을 '하나님께 매인 해방'이라고 풀었더군요. 순리를 따르는 생은 쉽습니다. 억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자기 능력껏 하고는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일 겁니다. 하나님은 마치 소속을 확인이라도 시키듯이 '나의 종 야곱'(렘30:10)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해방시키기 위해 '내가 너에게로 가서 너를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몰골이 말이 아니지만 반갑게 맞아야지요.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좀 만지고, 얼뜬 마음도 좀 가라앉히고.... 삶이 힘겨워도 투덜거리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삼으세요.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고통이 와도 '좋지요, 좋지요' 하고 받으면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히12:11) 주일을 위한 예비일인 오늘, 맑은 햇살만큼이나 환한 표정으로 세상을 밝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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