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위의 장미꽃 속에서 맑은 새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문득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각났습니다.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형과 누이로 불렀던 사람, 새들도 그의 손과 어깨에 즐겁게 내려앉았다지요? 지금도 앗시시에 가면 프란치스코의 동상 손 끝에 새들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네요. 사람이 얼마나 맑아져야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자아'를 여읜 사람, 정념의 노예살이에서 놓여난 사람이라야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이들(열 한 사도)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행1:14)
사도들은 이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기도 중에 기다립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희망이며 기쁨이었던 예수님이 떠난 빈 자리에는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 공방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경쟁의식도 없습니다. '한 마음', 그렇습니다. 저마다 자책과 부끄러움과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들은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저는 이 기도 모임이야말로 '초대교회의 발전소'라고 부르렵니다.
몇 해 전 영국의 웨슬리 채플과 웨슬리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웨슬리 목사의 기도 골방이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기도 의자와 탁자, 그것이야말로 감리교 운동의 발원지였던 것입니다. 누군가 그 골방을 가리켜 '감리교의 발전소'라고 했다네요. 맞는 말입니다.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실제 숫자는 아닙니다. 120명이 한꺼번에 올라갈 만한 다락방이 있었을까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열 두 제자단을 상징하는 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군요. 주님을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었던 이들과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새로워진 이들이겠지요)이 한 마음이 되었을 때 그들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 희망이 유입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가룟 유다가 버리가 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가 빠진 제자단, 11명의 사도들은 마치 일그러진 원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시하는 사도 후보자의 자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1:22)
왜 굳이 그래야 할까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공허하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삶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은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후보로 압축해놓고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행1:24-25)
온전히 주님의 선택을 신뢰하는 이 공동체가 참 멋지네요. 그런데 제 마음에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라는 대목입니다. 그는 온 인류의 중심이고, 생명이고 길이신 주님을 떠나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방황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길로 삼아 주님께로 돌이켰는데, 유다는 자신의 정념을 따라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그 길이 중심이신 주님을 향한 길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과 육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So are we spirit and flesh, clothed head to toe in the goodnes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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