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아침묵상6 2004년 05월 21일
작성자 시연
담장 위의 장미꽃 속에서 맑은 새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문득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각났습니다.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형과 누이로 불렀던 사람, 새들도 그의 손과 어깨에 즐겁게 내려앉았다지요? 지금도 앗시시에 가면 프란치스코의 동상 손 끝에 새들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네요. 사람이 얼마나 맑아져야 그런 일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자아'를 여읜 사람, 정념의 노예살이에서 놓여난 사람이라야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이들(열 한 사도)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행1:14) 사도들은 이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기도 중에 기다립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희망이며 기쁨이었던 예수님이 떠난 빈 자리에는 휑한 바람이 불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시시비비를 가리고,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 공방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물론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경쟁의식도 없습니다. '한 마음', 그렇습니다. 저마다 자책과 부끄러움과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들은 마음을 모아 기도합니다. 저는 이 기도 모임이야말로 '초대교회의 발전소'라고 부르렵니다. 몇 해 전 영국의 웨슬리 채플과 웨슬리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것은 웨슬리 목사의 기도 골방이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기도 의자와 탁자, 그것이야말로 감리교 운동의 발원지였던 것입니다. 누군가 그 골방을 가리켜 '감리교의 발전소'라고 했다네요. 맞는 말입니다. 다락방에 모여든 120명(실제 숫자는 아닙니다. 120명이 한꺼번에 올라갈 만한 다락방이 있었을까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열 두 제자단을 상징하는 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군요. 주님을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들었던 이들과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새로워진 이들이겠지요)이 한 마음이 되었을 때 그들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 희망이 유입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가룟 유다가 버리가 간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가 빠진 제자단, 11명의 사도들은 마치 일그러진 원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시하는 사도 후보자의 자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1:22) 왜 굳이 그래야 할까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공허하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비극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삶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은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후보로 압축해놓고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이 섬기는 일과 사도직의 직분을 맡게 하실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행1:24-25) 온전히 주님의 선택을 신뢰하는 이 공동체가 참 멋지네요. 그런데 제 마음에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라는 대목입니다. 그는 온 인류의 중심이고, 생명이고 길이신 주님을 떠나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방황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길로 삼아 주님께로 돌이켰는데, 유다는 자신의 정념을 따라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그 길이 중심이신 주님을 향한 길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과 육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So are we spirit and flesh, clothed head to toe in the goodnes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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