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빼앗긴 언약궤 2004년 01월 18일
작성자 윤석철
빼앗긴 언약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스라엘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싸움에서 패하여 3만 명의 보병이 전사하고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도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었다(사무엘상 1~11).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느 전쟁에서도 늘 승리한다고 굳게 믿었던 이스라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까지 언약궤를 앞세우고 숱한 이방민족을 쳐 복속 시키며 위엄을 떨치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에 모셔오기까지 했는데도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을까?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적의 손에 빼앗기는 일이 어찌 생길 수 있었을까? 언약궤를 전장에 모셔오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하려 하였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시어 적군 블레셋을 무찌르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의 내용은 잊고 그 형상에만 매달렸다. 이스라엘이 최후로 믿고 의지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가 침묵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침묵하셨다. 언약궤를 적에게 빼앗기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본다. 줄에 묶이고 갈고리에 찍히어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을 본다.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본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본다.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유대인의 완악함을 본다. 서울의 밤 하늘을 아름답게 밝히는 빨간 불빛의 십자가들을 본다. 형해화(形骸化)한 이 시대의 “믿는 일”을 본다. 제의(祭儀)와 조직(組織)과 형식(形式)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이 세대의 교회를 본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마음이 굳은 세대를 본다. 우리나라의 밤, 특히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의 밤 풍경을 바라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골목 골목 한 건물 건너마다 이 교단 저 교단의 서로 다른 교회들이 빨간 불빛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온 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 교회들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있고, 거기에 어김 없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전깃불 촛대로 밤새 불을 밝힌다. 우리는 그 곳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은연중 여기며 삼가 옷깃을 여미고 경건의 눈으로 그 강단을 바라본다. 가슴으로 하나님을 믿고, 가슴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가슴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세대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어려움중의 하나이다. 신앙교리와 신학적 교의를 모두 통달하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가슴의 믿음을 우리의 머리를 통해 지적(知的)으로 확인하여야 안심이 되는 세대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리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확인하고 안심한 그 믿음도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화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고, 그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은 마지막 나뭇잎까지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큼 스산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십자군의 이름으로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사람이 피 흘리고 고통 받는 전쟁의 소식을 우리는 안방이나 거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영화 감상하듯 보고 듣는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못 배우고 힘 없고 탈출구도 없이 절망하는 사람들의 애기를 매일 듣고 본다. 그러나 이 시대가 겪는 아픔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받으며 잠자리에 든다. 아직 나에게는 저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과감히 일어나 주님 뜻에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다. 교회를 언약궤처럼 앞세우고, 이 시대의 우리 신앙을 앞세우고 블레셋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처럼 행군가를 크게 부르며 전장에 나아가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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