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귀의(歸依) 2003년 11월 24일
작성자 chs
공항에 가면서 차량 통과료를 내기위해 지갑을 열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갑이 텅 비어있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전날 현금카드로 돈을 찾아 시장을 보고 입고나갔던 옷의 주머니에 그냥 넣어둔 것이다. 그 카드는 교통카드로 겸해서 쓰고 있는 카드이다. 그이가 출장갈 때 가끔은 공항에 함께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는 싶은데 운전하는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는 싫고 그래서 차는 먼저 돌려보내고 나중에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한다. 만약에 이렇게 빈 지갑을 가지고 가는 날, 빈 지갑인 줄도 모른 채 차를 먼저 돌려보내고 얼마 후 그이도 떠나고, 그러면 나는 어찌 했을까? 돌아갈 여비, 그리고 빈 지갑. 한국에 돌아오니 빈 지갑도 겁이 안 나고, 빈 통장도 겁이 안 난다. 이렇게 내 나라란 참 좋은 곳이다! 참 편한 곳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어도, 빈 털털이로 있어도 겁이 안나니 말이다. “만나”는 쌓아둘 수 없음도 알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할 줄도 알지만, 외국에 있을 때는 내일을 위한 만나를 저장해 두어야 안심이 되었고, 한국행 여비(이사비용, 비행기 표)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안심이 되었었다. 비록 한 달 이상을 버틸 만큼의 양식이 있어도 한국행 비행기 표값 정도의 돈이 남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늘 그날을 기다리며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앞에 남은 날들에 소용될 물건이나 돈이나 시간이나 그런 것들을 가늠할 땐 언제나 <돌아갈 때까지>가 마지노 선이 되곤 했다. 이것도 인간의 귀소본능의 일종인가…. 오래 전에 그이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방에 여행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불성인 상태로 대취한 채 없어졌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서 한 설명이 참 신기하다. 술먹던 자리에서 떠나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어느만큼 가서 내렸단다. 그리곤 어떤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낯 선 곳의 여관이었다. 그는 다시 여행간 자리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버스를 탄 시간이 회사에서 집에 가는 시간과 똑 같이 걸렸다. 무의식중에 작용한 귀소본능이랄까? 아무리 대취해도, 의식이 없어도 집에는 찾아가는 일이 참 신기하다. 우리의 일상중에 이런 귀소본능이 작용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인생에서도 큰 획을 그으며 귀소본능이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 귀착지는 어디일까? 하관식 때마다 듣게되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교의 귀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귀소본능을 생각해보면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에게 돌아가는 것이 최종 귀착지가 될 것이다. 최종 귀착지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저절로 가는 것인가? “여보게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라는 말처럼 우린 무얼 가지고 돌아가나? 오랜 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 손때묻고 정든 많은 물건들을 다 남에게 주고, 버리고 왔다. 무얼 잔뜩 가지고 와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온다는 자체 만으로도 좋아서 가지고 있던 물건에는 하나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다 버려도 좋았다. 빈 몸으로 와도. 내 나라는 이렇게 좋은 곳이다! 내 나라는 참 편한 곳이다! 하물며 마지막 귀착지인 창조주의 나라는 얼마나 좋을까. 쓰던 물건 다 버리고 가도 아깝지 않은 곳이리라, 그 곳에 가면. 빈 지갑이어도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곳이리라, 그 곳은. 내 인생의 마지막 귀착지, 우리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이 계신 곳, 나는 그 곳을 향해 어디만큼 와 있는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신 그 분, 이승에도 계시고 저승에도 계신 그 분, 낯 선 여행지에도 계시고 익숙한 내 고장에도 계신 그 분, 일터에도 계시고 내 집에도 계신 그 분, 꽉 찬 지갑 속에도 계시고 텅 빈 지갑 속에도 계신 그 분, 나는 그 분이 계신 곳에 이미 들어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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