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어떤 교사의 눈에 비친 NEIS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요즘 한창 떠들석한 NEIS에 대한 글인데, 함께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동성고등학교 전교조 조합원 동료 선생님이 제게 보낸 글입니다. 그분 글은 아니고 그분 학교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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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미쳤어요! 선생님이 책임져요!


예전 어느 때 내가 담임을 했던 어떤 학생이 어느 날부터 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미쳤어요! 선생님이 책임지세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학교 상담부장 선생님이(지금 상담부장선생님은 아닙니다) 각 반 담임들에게 '결손가정 (부모가 모두 친부모로 현재 살아계신 학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 이름을 조사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게 왜 필요한가?... 하면서도 상담부장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우리 반중에 그런 학생 이름을 적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상담부장 선생님이 그 학생을 조용히 불러서, 그 학생과 그 문제에 대해 상담을 했답니다. '학교 생활에 어려운 점은 없니?...' 등등, 그 학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자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에 너무나 놀랐고, 그 선생님이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비밀로 해왔던 친구들이나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도 그 사실을 다 알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나 부끄럽고, 화가 나고.... 학교도 가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미쳤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원에도 입원했다가, 기도원도 갔다가, 저와 함께 삼선교에 있는 정신과 병원에도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달쯤 뒤 다시 학교를 나올 수 있었고, 무사히 졸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습니다.
남들은 '뭐 별 것도 아닌데...' 할지 모르지만, 내겐 중요한, 결코 공개하고싶지 않은 일들이 많습니다.

나도 생각해보면 그런게 참 많습니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었나 하는 내용도 그 때 생활기록부를 보면 다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것을 보아도 얼굴이 화끈하거나, 부끄러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아내에게도 아직 그것을 보여준 적이 없고, 저 역시 제 아내의 생활기록부를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어쩌면 아내의 어렸을 때 학교생활에 대한 내용을 내가 보게 되면, 크게 실망할 수도 있고, 그 것 때문에 아내가 싫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결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의 아내가 좋을 뿐, 아내의 어렸을 때, 과거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고싶지 않습니다. 알아야할 이유도 없고, 본인이 원치 않는 과거의 모습을 내가 들추어 볼 권리도 없습니다.

개인의 밝히고싶지 않은 신상문제에 대해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 - 그런 것도 '인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직업 중에는 그렇게 비밀을 철저하게 지켜야하는, 그런 비밀유지의 신뢰가 그 직업의 기초를 이루는 직업들이 있습니다.

병원의 의사는 자기가 진료한 환자의 신상에 대해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합니다.
성당의 신부님은 자기가 고백성사를 준 사람의 고백에 대해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합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학생의 신상문제에 대해 어디 가서도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환자와 의사의, 신자와 성직자 사이의, 학생과 교사 사이의 그런 신뢰가 깨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의사나 신부님, 선생님에 대한 그런 믿음이 없다면 자기 몸의 비밀, 자기의 부끄러운 고백, 자기 가정환경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어떻게 드러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겁니다.

요즘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학생의 신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국가기관의 컴퓨터에 낱낱이 입력하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 그렇게 개인의 은밀한 정보까지 다 넘겨달라 하느냐고 물어도, "국가정보화"의 일환이라고만 말할 뿐,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학생자료의 전산화라면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각 학교마다 다 시행되고 있었고,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지요.

선생님들이 입력한 개인의 신상정보는 나중에 경찰이나 국가정보원등 다른 국가기관이 "필요할 때" 가져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학생 본인이나 학부모들에게는 이런 일에 대해서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고,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선생님들에게만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선생님들은 아주 곤란해하고 있습니다.
눈 딱 감고 국가기관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선생님들로서는 편한 일이겠지만, 그런 건 나를 믿고 나에게 자신의 모든 정보를 알려준 학생들을 배신하는 일인 것 같아서 정말 고민됩니다.

처음 국가기관에서 전국의 학교에다 요구했던 내용은, 여러분들의 신상에 관한 모든 정보 - 부모님은 친부모가 맞는지 새엄마인지, 생활보호대상자, 소년소녀가장, 과목별 성적, 전체 성적, 누나나 동생이 있는지 있다면 몇 살인지, 언제 무슨 병을 앓았는지, 키, 몸무게, 체력, 지각 결석을 몇 번 했는지, 사고친 일은 없는지, 사고를 쳤다면 어떤 잘못을 해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옛날 어느 동네에 살다가 어디로 이사를 갔고,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슨 특기가 있는지....

학생 한사람당 수 십 가지 정보를 숨김없이, 사실대로 입력하라고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이건 도저히 교사의 양심상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했고, 수없이 모여서 시위하고, 단식투쟁도 하고... 그랬습니다.

몇 달동안 그렇게 반대를 했더니 지금은 그중 특히 심한 내용은 빈 칸으로 놔두고, 우선 몇 가지씩만 입력하라고 다시 지시가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걱정되는 항목들이 많습니다. 빈 칸으로 놔 둔 것들에 대해서도 언제 또 다시 입력하라고 강요할지 모르는 일이고요.

결국 이 문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심사에까지 올라가게 됐고,
인권위원회에서도 선생님들의 양심적인 주장이 맞다고, 그런 걸 국가기관의 서버에 모두 입력하라고강요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판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취소하기엔 그동안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서 안되겠다"며, 또 "정부의 권위가 떨어져서(멍청한 짓을 했음을 인정하는 건 너무 쪽팔려서) 안되겠다"며 인권위원회의 판결도 무시하고, 그냥 강행하겠다고 합니다.

어제는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인권위원회를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 판결을 취소하도록) 설득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반대에 앞장서는 교사들을 모두 짤라버리면, 그 다음에 새로 뽑을 교사후보자들 숫자도 한번 알아보라는 지시도 했답니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선생님들중에는 "우리도 막가자" "더 이상 대화는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나라의 많은 선생님들과 교육부 공무원들, 그리고 그들을 편드는 사람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통령을 상대로 싸워야 할 판이기 때문에 선생님들로서도 결코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학생을 끌어들이는 건 원치않기 때문에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아마 여러분들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이건 선생님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의 신상정보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문제이고, 여러분 부모님들에겐 자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신상정보를 학교 외부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일에 대해서,
우리 교사들은 찬성할 권리도, 반대할 권리도 사실은 가지고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전에 "우리 좀더 똑똑해집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이번 일도 우리가 정말 똑똑해져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나는 누가 이 문제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학생 개인의 신상정보는 학생 본인에게 물어보시오. 나는 직무상 알게된 학생의 신상정보에 대해, 본인의 허락을 얻지 않고 외부에 유출할 어떤 권리도 없소. 단 한줄의 정보라도 절대 안되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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