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제주 답사기 - 5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제주 정치의중심 - 관덕정

관덕정 (보물 322호)은 세종 30년(1448년) 제주 목사였던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한 정자이다. 관덕(觀德)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 라는 <예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처음 현판은 안평대군이 썼는데 소실되고, 지금 걸려있는 것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라 한다.

관덕정 마당에서는 잔치가 베풀어졌고, 진상용 말을 점검했으며,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민란의 장두가 악질 향리들을 처벌하던 장소였다. ‘이재수란’ 막바지인 1901년 5월 28일 제주 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면서 민군이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교민들을 이곳 앞마당에 모아놓고 살해한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프랑스 군인에 의해 촬영된 현장 사진이 남아있다.

또한 일제 강점초기를 전후해서는 5일에 한번 시장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운동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시위를 주도한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제주
태종16년(1416) 제주의 지방행정 구역은 제주목(濟州牧)과 정의현.대정현 삼읍체제로 개편되었다. 당시 제주도는 말의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고, 이러한 중앙 정부의 인식은 제주에 대한 강력한 지방통치로 나타났다. 이러한 삼읍체제는 한말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914년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삼읍의 행정구역은 일반적으로 제주목은 동쪽의 종달에서 서쪽 두모에 이르는 즉, 한라산 북쪽 일대였고, 정의현은 시흥에서 법환에 이르는 제주의 동남부 일대이며, 대정현은 강정에서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이다.

삼읍에는 고을 원(員)님이라 부르는 수령으로 제주목사(정3품), 정의현감(종5품), 대정현감(종6품)이 파견되었으며, 제주목에는 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종5품)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제주목사는 형옥, 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도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두 차례 보고를 해야 했다.

목사의 행정기관인 제주목은 현재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목관아지터(사적380호)에 위치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세종 17년(1435) 최해산 목사가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영청(營廳)인 홍화각(弘化閣)을 건립하면서 종루, 침실, 영고 등206칸의 관아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쌓았다. 따라서 제주읍성은 제주목사와 제주판관 등 지방관의 거처인 동시에 정책의 산실이었고 명령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망경루와 연북정
망경루(望京樓)는 제주목 관아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2003년 1월 22일 재건축 완공 예정인 제주목 관아는 망경루가 빠져있다. 아마 제주의 향토사학자들이 관청의 중심인 동헌보다 망경루(서울을 바라본다)가 훨씬 더 큰 것이기에 자존심 때문에 뺀 것은 아닐까?

연북정은 조천읍에 있는 정자로서 북쪽 즉 서울을 사모하는 정자란 뜻이다. 망경루와 연북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서울 즉 중앙을 향한 관리들의 그리움 즉 출세를 위한 열망이다. 외딴 섬 제주도에 관리로 파견된다는 것은 결국은 좌천이었고, 하루빨리 여기저기 손을 놓아 중앙으로 올라가고자 했던, 그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중앙으로 가기 위해 뇌물을 써야했기에 수탈에만 열을 올렸던 그들이 떠오른다.


제주의 진상품
조선 시대 제주는 국가에 대한 중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진상기지 역할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진상물은 말과 귤, 해산물, 약재 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 지역은 대부분 진상을 위한 말을 키우는 국가 목장이었다. 제주공마는 해마다 바치는 年例貢馬, 3년마다 바치는 식년공마, 그리고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말이었다. 즉 왕명에 의해 戰馬 혹은 무역을 위한 말의 징발이 수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관리들이 민간에서 기르는 말을 빼앗아 사사로이 중앙정부에 바치기도 하여 그 폐단은 적지않았다.

다음으로 귤의 진상이다. <경국대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 정의, 대정 등 삼읍에서는 매년 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하여 인근 주민들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매12월에는 수량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실 초기에 기록된 숫자에 맞춰 낙과에 의한 피해 숫자까지도 채워야 하는 과직(果直:과수원을 지키는 역을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여서 제주도민들은 과직으로 차출되는 것을 매우 기피하였다.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도 중요한 진상물이었다.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浦作人 혹은 鮑作)과 잠녀(潛女)를 특별히 두어서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진상용 뿐만아니라, 관아에서 쓰이는 물품들도 모두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탐라에서 제주로
<탐라(耽羅)>라는 명칭은 6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 때 비로소 쓰기 시작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제주도 주변의 다른 지역집단과 구분되는 해상도서집단으로서 나름대로 결속력 있는 일정한 정치체가 들어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주도는 그 역사적.지리적 특성상 군현체계에 의한 중앙의 직접 지배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주(星主).왕자(王子)와 같은 전통적 지배체계를 중앙정부가 인정하되, 이들 지배체계를 정부가 장악함으로써 제주를 통할하는, 말하자면 간접지배 방식으로 통치하였던 것이다. 제주 지역에 고려 정부의 통제력이 매우 구체적으로 미치게 된 것은 고려 중기 대략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제주>가 <탐라>를 대신하는 것은 탐라가 군에서 목으로 승격되는 고종10년(1223)이전의 일이다. 제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중앙정부 입장에서, <독립국>으로서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탐라>라는 명칭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탐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전통을 담은 이름이라면, 제주(濟州)는 중앙이나 육지의 관점에서 본 이름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목호의 난
1273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았다. 총관부의 이름을 ‘탐라’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강화도 조약’ 제 1조가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것이었다. 왜 일본은 조선을 자주국이라고 치켜세웠을까? 이는 조선을 자기의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청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이 ‘제주’가 아닌 ‘탐라’총관부로 이름지은 것은 고려 정부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원은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 병참기지로 제주도를 활용하는 한편, 목마장을 직접 마련해 원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 하나로 키우는 등 물자수탈의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탐라는 두 차례 일본 정벌의 실패를 겪고 난 뒤 고려에 환속되었다가 다시 원에 귀속되는 등 왔다갔다 한다. 그러나 이는 탐라에 설치한 관부의 관할권 소재가 고려에 있느냐, 원에 있느냐 하는 현상적 변화였을 뿐이었다. 실질적으로는 탐라가 양국에 이중귀속되는 상황에서 물자수탈에 중점이 두어진 원의 탐라경영은 줄곧 계속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선진 목마 기술이 제주로 유입되면서 제주는 급속히 발전한다. 현대자동차가 울산에 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서면서 울산과 포항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 것이다.

목호(牧胡)는 말을 기르는 몽골의 목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탐라가 원의 직할령이 된 이래 탐라에 왔던 군인,목호,유배죄수나 정치인 등 몽골인 등과 이들과 결혼한 탐라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탐라민이 목호의 세력기반이었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23년(1374)에 명나라가 탐라의 말 2000여필을 조공으로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는 목호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해에 편성된 탐라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이었고, 출정군은 수도권과 국경지대가 빠진 전국에서 차출한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국경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 8,830명과도 견줄 전력이며, 당시 탐라 인구와도 맞먹었을 병력이었다. 출정군 이외에도 평정실패,왜구출몰 혹은 이들과 목호의 합세 등과 같은 사태를 대비한 군대가 양광도(경기, 충청 일대)와 전라도에 따로 주둔하였다.

최영이 탐라에 와 한달 여간 전투를 벌여 끝마쳤던 목호 평정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묘사될 정도로 고려와 목호 세력의 총력전이었다. 탐라민의 상당수가 목호 세력에게 합세했던 만큼, 탐라민의 희생도 컸다.

이영권 선생은 목호의 난 진압을 ‘1948년 4.3 이전의 최대 제주민 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제주 무속에서 보이는 최영에 대한 이야기는 좋지않게 되어있다고 한다. <확인하지 못했음>

제주무속에서는 그 이전 삼별초 항쟁의 중심인물인 김통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게 되어 있었다.

애월면 고내리에 있는 고내본향당의 본풀이(당의 근본에 대하여 설명한 말)를 보자.

“전략
김통정 장수가 (탐라국에) 와서 보니 / 우마와 생산이 잘 낳니 / 그것을 욕심하고 / 탐라국을 먹을라고 / 무류탐심(無類貪心)하니 / 천자국(天子國)에서는 김통정 장수를 / 잡을려고 세 장수를 / 보내였습네다 / - 중략 - / 김통정이는 / 세 장수를 피하려고 / 각 백성에게 / 재 닷되와 비 한자루를 / 받아서 / 재는 토성에 깔고 / 비자루는 말꼬리에 달아서 / 말을 타고 성위를 돌렸습네다 / 성위에는 재로 안개가 / 자욱하니 / 세 장수는 짐작을 못하였습네다 / 그러나 최후에는 세 장수가 / 토성까지 닥쳐왔습네다 / 토성이 높아지고 / 무쇠문은 잠가서 / 들어가지 못하니 / 어떠한 여자의 말을 듣고 / 무쇠문에 / 석달 열흘 백일간을 / 풀무를 하니 / 무쇠문이 녹아졌습네다 / 세 장수가 성안에 들어갈 때 / 김통정이는 도망가게 / 되었습네다 / 김통정이 처는 / 뱃속에 아기를 가졌는데 / 김통정이가 도망가면서 / 내가 없으면 너도 죽으니까 / 내손으로 없애겠다 하여 / 처를 발로 밝고 / 손으로 당겨 찢어 / 던져두고 / - 후략 -


김통정의 탐라국을 먹으려는 욕심과 자기의 처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그리면서 김통정을 못된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무속에서 구전되어온 이야기와 우리가 삼별초의 항쟁으로 배운 내용과 차이가 난다.


제주가 없었으면 조선은 없었다?
한편 최영이 탐라에 와 있는 동안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10살의 어린 우왕이 추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뒤에 위화도 회군과 관계가 된다.

고려 조정에서는 고압적인 명의 요구에 반발해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그는 정벌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 지휘와 감독을 위해 서경(평양)으로 나아가자 우왕도 자신의 신변에 불안을 느껴 굳이 따라나섰다. 이들이 서경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사실 최영은 전쟁터로 나아가 정벌군을 직접 지휘,감독하려 하려했다. 이를 하지 못한 것은 우왕의 만류때문이었다. 우왕은 공민왕23년(1374) 최영이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탐라에 가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10세 어린 나이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우왕은 부왕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기에게도 되풀이될까 두려워 최영을 곁에 두어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요동정벌의 전쟁터로 가려는 그의 발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인 위화도 회군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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