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제주 답사기 - 3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둘째날 저녁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의 강연이 있었다. 김종민 기자는 1989년 4월부터 4.3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여 10여년 간 계속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4.3은 말한다>(전예원)를 펴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주제는 4.3때 이루어졌던 대규모 민중학살에 대한 진상과 4.3에 관한 기억에 대한 취재기였다. 전자는 주로 1948년 11월이라는 시점에서 제주도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였고, 후자는 대규모 학살 이후 제주도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자는 딱히 무엇이 그 배경이다는 이야기없이 중언부언하는 것 같아 지루했고 - 아마도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확실한 배경을 이야기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후자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4.3에 대한 기억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려 한다.


빨갱이(레드 콤플렉스)
아마도 ‘빨갱이’만큼 도민들이 기피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는 비단 제주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4.3때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한번에 무고한 사람들이 즉결 총살됐고, 이후 역대 정권이 ‘4.3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공산폭동’이라고 규정해 왔기에 제주도민들이 겪어야 했던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는 전국적이고 일반적인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희생된 자신의 부모가 일자무식한 촌부였음을 마치 자랑처럼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상을 가질만한 빨갱이’가 아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토벌대에게 곤욕을 치렀다는 사람일수록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는 군경력을 애써 강조했다고 한다. 빨갱이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일수 있느냐는 항변이었다.


가위눌림(공포∙자괴감)
부모가 총살당할 때 맨 앞줄에 서서 박수치고 만세부를 것을 강요당한 유족들, 굴속에 숨었던 가족들이 들켜 몰살당하는 모습을 요행히 밖에 나왔다가 숨죽여 흐느끼며 바라봤던 사람들, 토벌대에 들킬까봐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자기 자식을 질식사시킨 어머니, 이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할 성 싶지 않다.

한 소년은 검사가 된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가 토벌대에게 끌려가면서부터 갑작스런 시련이 시작됐다. 그 무렵 소년은 국민학교를 졸업해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다. 필기시험은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는데 면접시험날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네 아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빈정대며 물었다. 소년은 어린 마음에도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고,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불합격을 면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소년은 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부끄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평생 소년의 마음에 말못할 짐이 되었다. 이제 60대 중반이 된 ‘소년’은 그날(기자와 만나 인터뷰한 날) 그 짐을 풀어놓으며 기자와 대낮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소주를 마셨다 한다.



청년이 센 마을일수록 희생이 컸다.(허무주의)
해방 이후 새나라를 건설하자는 기운이 높게 일면서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전위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있었기에 주민들은 “우리 마을 청년들이 더 싱싱하다”고 자랑하며 경쟁했다. 그러나 이들은 4.3이 발발하자 대거 산을 올랐다가 총살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입산은 너무도 큰 희생을 몰고 왔다. 청년이 산에 오르면 그 부모형제 또한 ‘도피자 가족’이 되어 몰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산에 오른 청년이 많은 마을은 ‘폭도 마을’이 되어 일반주민들까지 집단학살당했다. 증언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청년이 센 마을은 희생이 컸다”고 말했다. 급기야 주민들은 청년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누가 총을 쐈든 청년들이 난리를 피는 바람에 애꿎은 자기 가족들까지 그토록 처참하게 희생된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육지 것들(멸시∙배타성)
‘육지 것들’이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모르나, 4.3을 증언하는 노인들은 대개 이 말을 썼고 특히 서북청년단을 지칭할 때는 반드시 그랬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서청은 처음엔 주로 엿장사를 했다. 그런데 점차 세력이 커지자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강매했다. 4.3이 발발한 후 서청의 강매를 거부했던 사람은 대부분 총살됐다. 증언자들은 그들로부터 ‘개새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고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집단 광기’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서청의 행위는 그들이 경찰이나 군에 편입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4.3초기에는 ‘말태우기’와 뺨때리기‘가 유행했다.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한 후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말 타는 시늉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김종민 기자는 주로 자료집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 한 마디로 ‘미친 세월’이었다. (<제주4.3연구>(역사비평사)와 <4.3은 말한다>(전예원) 참고할 것)

사실 4.3때 그토록 잔인하게 학살극을 벌일 수 있었던 환경 중에는 제주를 멸시하는 마음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공이란 이름으로 표출된 집단 광기’ 못지 않게 ‘멸시와 편견’은 잔혹한 학살극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래서 마치 이민족을 대하듯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실제로 제주 주둔군 책임자들 중 상당수는 일제 때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의 자격으로 중국 등지에서 초토화 작전을 이미 벌였던 사람들이었다.


의식의 변화 (살암시민 살아진다)
남편을 잃고 50년간 청상과부로 살아온 많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어온 기막힌 세월을 털어놓은 후엔 대개 ‘살암시닌 살아지더라(살다 보니까 살게 되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한 할머니는 가족들의 처참했던 희생을 마치 남의 일 이야기하듯 중간에 농담까지 섞어가며 말해 필자(김종민 기자)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지난 50여년을 견디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희생을 치른 중산간 마을이 친정인 한 할머니는 세월이 흐른 덕분에 변화된 현실을 이렇게 말했다.

“사실 뛰어난 청년들은 그 때 다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 토벌대의 주목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똑똑한 사람들 중에도 일부는 살아남았지만 이미 기가 꺽였어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젠 많이 달라졌습니다. 잘못된 게 있으면 반대도 하고 데모도 하고 하지요. 그런데 이는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미 다 늙어 뒷전에 서게 됐고, 요즘 사람들은 당시를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눅들지 않고 할말 다하고 사는 겁니다. 요즘 친정 마을에 가보면 다시 활기가 보입니다. 당시 똑똑했던 청년들은 다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자식들이 모두 똑똑해 마을을 주도하고 있더군요. 그 피와 씨가 어디 가나요.”


몇 년 전 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한 제주대표의 발언은 그 변화를 실감케 했다. 그녀는 ‘대통령과 인터뷰를 한다면 무엇을 묻겠느냐’는 질문에 “선거 때 공약한 제주 4.3 진상규명에 대해 묻겠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기자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대학생들의 시위 현장이 아니라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기자가 물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여 그녀에게 직접 물었더니 “평소에 생각하던 바”라며 거림낌없이 대답했다고 한다. 끈질기게 견뎌온 50년이란 세월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4.3의 해결을 위하여
4.3때 벌어진 대량학살극은 다른 모든 논의들을 압도할 만큼 처참했다. 그리고 이는 제주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진상규명은커녕 일관되게 공산 폭동론을 주장하면서 4.3을 입에도 담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도민들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해방의 환희가 좌절되며 벌어졌던 4.3 학살극은 도민들에게 심한 허무주의를 심어줬다.

4.3은 감추면 감출수록,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그 상처를 더해 가며 더욱 무겁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과 제주도민의 진정한 해원을 위해서도 4.3문제 해결은 필수 불가결한 과제이다.

그런데 4.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도민의 마음과 말문을 좀더 활짝 여는 일이고, 둘째 4.3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일이다. 셋째 정부 및 미국은 비밀 자료를 공개해야 하며, 넷째 이런 일연의 작업은 국회와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남북이 통일돼 냉전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질 때 진정으로 4.3의 참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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