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제주 답사기 - 2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한국 현대사의 비극, 4.3의 현장을 가다

1994년인가 역사교사모임에서 제주답사를 했을 때 주로 제주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주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답사하였다.

현재 제주도의 행정구역 명칭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과 북(남제주군과 북제주군), 남∙북제주군은 서귀포시와 제주시를 놓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 형태다. 그러고 보니 현재 우리나라 행정구역 명칭은 거의가 다 남도와 북도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전라좌도 우도, 경상좌도 우도 이렇게 좌우로 나뉘어 있었는데.. 왜 이렇게 변했을까?

어쨌든 답사를 주관했던 이영권 선생님은 제주도의 문화를 좌우로 나누어 설명을 하였다. 우선 지명에서도 서쪽 끝의 두모(頭毛)와 동쪽 끝의 종달(終達)이라는 지명에서 서쪽을 위로 동쪽을 아래로 하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하튼 이번 답사는 제주도 동부 지역 즉 조천읍, 구좌읍, 성산읍, 남원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답사자료집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사례와 느낀 점을 서술해 나가려 한다.


4.3이란
‘4.3’이라는 숫자들의 조합은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무장대는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를 통해 결정된 남한만의 단독선거 또 그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에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 동안 벌어진 사건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발발 원인도 5.10 단선 반대라는 현안에서부터 경찰의 ‘3.1절 발포 사건’ 등 다양하다.

그런데 4.3을 역사적 사건이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이 기간 동안 약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9분의 1이다. 이 중 군과 경찰 토벌대에게 희생된 사망자의 비율은 90%에 달한다.


초토화 작전의 실태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백명 안쪽이었다. 그 5백명의 무장대에 대한 토벌작전에 3만명이 희생된 것이다. 토벌전이 본격화되던 1948년 11월게 한 미군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기록했다.

“제주도 연대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유격대 122명을 체포하고 576명을 사살했다. 10월 1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체포했다. 많은 물건을 노획했으나 무기는 거의 없었다.”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1948. 12. 1>

이 시기의 또 다른 보고서를 보면, ‘11월 13일 경비대 작전결과, 구좌면 행원리에서 유격대 115명 사살’ 혹은 ‘11월 24일 제주읍 노형리 부근 전투에서 유격대 79명 사살’ 등의 전과 기록이 나오는데 토벌대 희생자는 한 명도 없다. 많은 숫자의 무장대를 사살∙체포했으면서 노획한 무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전투가 벌어졌다면서 어떻게 토벌대 사망자는 한 명도 없고 무장대만 사살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는 교전을 벌이던 무장대가 죽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불가항력의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시물굴
이번에 직접 답사했던 굴이었다. 굴 입구는 아주 좁았고 20 내지 30미터를 기어서 가면 좀 넓은 공간이 나왔다. 거기에 그 때 당시에 썼던 냄비니 하는 물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랜턴을 가지고 기어서 갔다. 특히나 나처럼 키가 크고 몸집이 크고 유연하지 못한 사람은 너무 힘들었다. 양팔꿈치와 두 무릅이 까졌다. 여기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아니고 일주일 동안 바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목시물 굴은 초토화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선흘 마을 사람들이 숨어살다가 대거 희생되었던 곳이다. 이 지역은 1948년 11월 21일부터 소개가 시작되었다. 이 때 주민들은 해안마을인 함덕과 북촌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그냥 마을 주변에 남아 있었다. 해안마을에 연고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수확한 농산물을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잠시 피해 있으면 곧 사태가 진정되겠지 하는 낙관을 가졌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량학살이 시작된 것은 소개령 이후 나흘째인 1948년 11월 25일부터였다. 함덕 주둔 군인들이 올라와서 불타버린 마을 주변을 수색하다가 노인 한 사람을 발견하고서는 마을 사람들이 숨은 장소를 추궁했다. 살해 협박에 못이긴 그 노인이 먼저 안내한 곳은 도틀굴이었다. 군인들은 도틀굴에 수류탄을 까 넣고 진입하여 피난생활 하던 마을 주민들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현장에서 15명을 처형한 후 나머지는 함덕에 있는 군 주둔지로 끌고갔다. 이들은 밤새도록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으며, 이에 못이긴 마을사람들이 다음날 (26일) 새벽에 안내한 곳이 바로 목시물굴이다. 이 굴은 길이가 약 150미터정도 되고 입구가 둘이었기 때문에 은신과 도피에 유리한 곳이다. 하지만 토벌군인들이 양쪽 입구를 차단하고 끌어냈기 때문에 이곳에 숨었던 주민 모두가 체포되었다. 군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바로 사살하였다. 이 때 현장에서 학살당한 사람만 최소 70명은 넘을 것이라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4개조로 나뉘어 답사했기 때문에 우리 조에서는 만날 수 없었지만 제일 먼저 이 굴에 들어간 조는 그때 살아남았던 분(지금 한 80세 정도 되었을라나? 레드 헌트라는 다큐에도 나옴)과 함께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들어갔다고 한다.



북촌 옴팡밭
제주도 어디라 해서 4.3의 비극이 비켜간 곳이 있겠는가마는 이곳만큼 심했던 곳을 찾기 어렵다. 단 이틀만에 400여 명이 학살되었고 그 뒤 ‘무남촌(無男村)’이라는 이름까지 얻을 정도였다. 이곳은 현기영 선생의 소설 <순이삼촌>이 북촌학살을 배경으로 삼았던 것도 그만큼 북촌마을의 비극이 큰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북촌 학살 사건은 1949년 1월 17일(음력 1948년 12월 19일) 오전 구좌면 월정리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 11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이동하던 중 북촌마을 어귀에서 유격대의 기습을 받고 군인 2명이 전사하면서 시작되었다.

비상을 건 군인들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먼저 마을 전체를 불질렀다. 순식간에 300여 채의 가옥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운동장에 모인 주민 700-800명 중 군경 가족만 분리시킨 뒤,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불러 마을 보초를 잘못섰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며 군경 가족이 모인 쪽으로 달려가자 또다시 총성이 이어졌다. 여기서도 몇 사람이 죽었는데 그 때의 희생자 중에는 젖먹이 어린애를 안은 여인도 있었다. 그 여인의 최후는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피를 흘린 채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 위에서 그녀의 굶주린 어린애가 옷고름 속을 파고들며 젖을 빨아대던 장면은 지금 듣기에도 눈물겹기만 하다. 증언하는 생존자들은 그 때 그 젖먹이 어린애를 떼어놓지도, 혹은 죽은 어머니의 눈을 가려주지도 못한 걸 안타까워 한다. 모두 다 죽음의 공포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쩔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군경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은 약 20명 단위로 묶여 근처 옴팡밭(움푹 패인 밭)으로 끌려가 차례로 학살되었다. 젊은 남자만 죽은 게 아니었다. 어린이나 노인,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총성이 멎은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지금도 북촌은 해마다 음력 12월 18일이 되면 온 동네가 제사를 지낸다.

4.3은 엄청난 희생 그 자체도 비극이지만,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어디 가서 하소연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것도 큰 비극이었다. 이 학살이 있고 난 후 약 5년 뒤인 1954년 여름에 일어난 속칭 ‘북촌 아이고 사건’은 4.3이 금기의 영역에 있는 사건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북촌 아이고 사건’은 당시 초등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걸궁(농악놀이)을 하던 주민들이 마지막으로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였을 때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한 주민이 “이곳은 4.3때 우리 부모형제들이 죽은 곳인데 억울한 영혼들에게 잔이라도 올립시다.”라고 한 게 발단이었다. 그 동안 4.3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다가 이 날 예기치 않은 잔을 올리며 슬픔이 복받쳐 오르자 모두가 그 자리에 퍼져 앉아 “아이고 아이고”하는 피울음을 토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즉각 경찰에 보고되었고 주민 대표 10여명은 다시금 공포 속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주민들은 오랫동안 벙어리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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