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나이>에 대한 책임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사람들은 어느 시점까지는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많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 시점이 넘으면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려고 한다. 그렇게 갈라지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겠지만.
나이에 따라 그 나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아이는 아이로서, 어른은 어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사람들은 다 누리고싶어한다. 나 역시.
그런데 나이에는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책임도 있다. 나이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나이가 가지는 특권과 책임의 종류를 어떻게 일일히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그 다양한 종류 중에서 우선 이런 것을 생각해본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 적은 사람을 잘 이해해주고 잘 도와줘야되는 책임에 대해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나이 아랫사람을 많이 도와줘야한다. 특히 직업상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아랫사람을 각별한 애정으로 도와줘야함은 윗사람의 나이값이다.
직업상 책임있는 자리, 인도자 인솔자의 자리에 대한 종류도 한없이 많을 것이다. 나는 교인의 입장으로서 목회자와,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교사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목회자와 교사는 참 어려운 자리, 시쳇말로 왕스트레스 받는 자리이다. 교사인 나의 손아랫 동서를 보면서, 나이 20대에 교직을 감당하는 내 자식뻘되는 조카들을 보면서, 나보다 나이 적은 목사님, 동생뻘되는 목사님과 그 사모님이 목회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늘 나를 돌아보곤 하였다. 나는 그 나이에 저런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다. 잘 해내지 못해서 쩔쩔맸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주변에 있는 목사님들, 선생님들은 그들의 사명을 참으로 잘도 감당하고 있다. 존경스럽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로서 감당할만한 상황들만 겪고 잘 감당해내면 된다. 그러면 다음 나이엔 또 다음 나이대로 감당할 일이 생기고.... 이렇게 나이먹어가고 있다. 소년소녀가장들이 아직 때가 되지도 않은 책임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을 우리는 다 안다. 고통이란 것이 굳이 생활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님과 선생님을 한번 생각해본다. 내가 그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됐던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야하고, 내가 그 나이에 지지 않아도 됐을 짐을 그들은 무겁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잘 감당한다. 그것이 어찌 '자신의 직업이니까'라는 말로 해답이 되겠는가. 목사님이나 선생님은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강하고 무겁고 힘든 문제들을 껴안고 있다. 나이보다 더 큰 짐! 그렇다면, 그 보다 더 나이먹은 사람들이 그 짐을 나누어 짐은 당연한 일이다.
큰 짐을 지지 않은 나이 많은 자가 나이보다 큰 짐을 진 나이 어린 자를 돕는 것이 바로 나이값이다. 약한 어린이가 힘에 부치는 무게의 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안스러워하고 빼앗아 대신 들어다주고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우리네 심성이다.

강한 것 같은 목사님도 저울로 달면 눈금을 넘어서 훨씬 더 나갈 수 없는 정확한 나이의 무게가 있고, 아이들은 자기 선생님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선생님도 자로 재면 더 늘어날 수 없이 정확난 나이의 길이가 있다. 그런데 그들이 더 큰 무게를, 더 큰 길이를 감당해야한다면 나이의 무게가 무거운 사람, 나이의 길이가 긴 사람이 그들을 도와야한다. 그래야 그들이 이끄는 공동체가 제 갈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내 측근의 나보다 나이 어린 여러 사람들-성실히 그들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우리 목사님, 아랫동서, 조카들... 그리고 가끔은, 내가 그 나이 땐 감히 하지도 못했던 일을 해내는 자식(비록 자식일지라도)도 존경할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이값을 하며 살고싶어하는 나의 자기성찰이며 평균수명보다 많은 나이의 사람으로서의 진지하게 하는 나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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