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웬지 허전한.....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들었답니다.
모두들 좋아서 난리인데, 웬지 제 마음은 허전합니다.

저 역시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칠줄 모르고 뛰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서,
기쁜 마음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채널 11, 9, 7, 6 모두 축구 경기를 중계하는데는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좁은 나라에,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벗어난지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에서, 겨우 두 세번 하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위해
세워진 10개의 거대한 축구 경기장은 뭔가 어색해 보였습니다.

광화문과 시청앞에 모인 엄청난 군중들
아이러니칼하게도 오늘 뉴스에서 본 16강 진출을 환호하는
군중들의 모습에서 특히 버스 위에 올라타거나, 트럭 뒤 짐칸에 타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에서 20여년 전의 광주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대형화면으로 축구경기를 볼 수 있는 것이
피파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서야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주워들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5천만원인가 했어요)

심지어는 이번 월드컵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은 피파뿐이고
우리나라는 적자로 허덕일 것이라는 말도요.

어떻게 제 귀에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만 들어오는지.
워낙 제 심뽀가 뒤틀린건지.

솔직히 저는 모두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드컵에 미친 언론들 - 이번 지방선거의 투표율 이 낮다고 혀를 차는
언론들의 모습을 보고 이건 소가 웃을 일이라는 생각밖엔 안들었어요.
월드컵 중계에 미쳐서 정규 뉴스를 스포츠 뉴스로 도배하던 그들이었기에
말입니다.

그에 따라 16강, 8강에만 올라가면 갑자기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거지들은 엄청난 돈을 벌게 되고, 고3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가고 등등 혹시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언제쯤
축구 경기를 사생결단의 장(場)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음! 참 열심히 뛰는구먼, 그래! 멋진 슛이야!, 짜식들 경기 정말 재미있게
하는데."
이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머리에 붕대감고 혈투를 벌이는 것은 이젠 그만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램입니다.

마음 속으로만 갖고 있던 생각을 여기에 올리게 된 것은
오늘 저녁 아이들이 졸라서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산책을 나가서
본 플래카드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내건 현수막인데
포르투갈과 한국의 경기를 교회의 120인치 대형화면으로 함께 보면서
우리나라가 16강에 나가길 기도하자는 내용이었어요.

그것을 보고 "골고루 미쳐가는구나"라는 생각밖엔 안났어요.

제가 너무 제 감정에만 빠져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듭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오직 한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것 같아,
그리고 그 목소리에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한 목소리들이
덮혀버릴까 두려운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

축구는 축구로 즐겼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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