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잃어버린(모르고 있는, 잊고있는) 역사를 찾아서<3>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http://kodias.com/Chaple/save/ss0706.htm에서 옮깁니다.
오늘의 말씀 2001.7.6(금) 아침을 여는 시에 올라온 양 우로더씨의 이야기인데, 연화봉교회를 1908년에 설립했다는 이야기와, 끝 부분에는 연화봉교회와 용산교회를 합하여 청파교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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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부인, 교회개척자, 만주선교사, 교육자로서 한국교회 초창기에 큰 흔적을 남긴 여인은 양 우로더이다. 그녀는 1877년 8월 16일 서울에서 양반의 유복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19세에 결혼한 후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어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정이 깨어지는 큰 불행을 겪었다. 이때 그녀의 남동생 양재창은 배재 학당을 다니며 남대문 안에 있는 상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불행을 당한 누나를 보고 안타까워하며 신앙생활을 권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녀는 차츰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는 집회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 후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우로더라고 했다. 이 무렵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톤 부인이 기혼여성을 위한 성경학원을 열었는데 성경뿐만 아니라 한글과 한국역사 그리고 영어도 가르쳤다. 전 사의 추천으로 그녀는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08년 앨버슨이 교장이 되면서 신학교를 체제를 갖추고 부인성서학원으로 정식 출발했다.

기독교를 통해 새 삶을 얻은 그녀는 적극적으로 살았고 서울 근방으로 나가 전도를 하면서 남대문 밖 연화봉에 여자아이 서너 명으로 학교를 시작하니 미국인 여 선교사들도 적극 돕고 나섰다. 이렇게 연화봉 여학교가 1908년 설립되었다.( 해방 후 신광 여 중 고등학교가 되었다.) 이어 교회도 설립하여 상동교회의 지교회가 되었다. 1912년 3월 그녀는 부인성서학원을 제1회로 졸업한 후 바로 전도부인이 되어 학생들의 신앙지도를 책임지게 되었다. 특히 그녀는 매주일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 근교로 나가 전도했으며 시골의 작은 교회 주일학교를 도왔다. 1914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그녀의 지도하에 성서학원 학생들이 전도한 실적을 보면 새 신자 187명,비신자 전도 730명, 교인상담 9,611명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계속해서 밭은골교회, 염창교회, 창의문밖교회 설립은 그녀의 전도로 이뤄진 결실이었다. 그녀는 1920년 자신이 설립한 염창교회 전도부인으로 파송 받아 2년 그리고 종로 중앙교회로 옮겨 2년 간 시무했다. 1924년 미 감리회 여 선교회 총회는 만주에 여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선교사를 물색하던 중 노련한 전도인으로 성장한 양 우로더를 만주 선교사로 결정했다.

1925년 1월 그녀는 만주를 향해 출발했다. 만주의 여성선교 사업은 뒤져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만주에 도착하여 먼저 착수한 일은 지역교회를 순방하며 여 선교회 전신인 '보호여회' 조직이었다. 그녀는 불모지 상태였던 만주의 여 선교 사업을 개척하고 3년 만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1928년 서울에 돌아오자 자신이 설립한 연화봉 여학교가 경영난에 빠져 폐교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사재를 학교에 모두 희사하는 등 학교를 살리는 일에 전념했다. 그녀가 설립한 연화봉 교회도 꾸준히 발전되어 용산교회와 합해져 청파동 교회가 되었다. 그녀는 이 청파동 교회 전도사(장로)가 되어 교회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는 일제 말기 어려움 속에서도 연화봉 여학교 설립자 겸 교장으로 학교를 지키다가 1943년 3월 제2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그 해 6월 6일 조용히 주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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