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잃어버린(모르고 있는, 잊고있는) 역사를 찾아서 <1>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http://www.kcm.co.kr/person/person_k043.html
이곳에서 퍼왔습니다.
링크시키려다가, 이렇게 전문을 다 옮겨놓으면 읽기가 더 편할 것 같아서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저 끝에 아랫부분에 나오는 청파교회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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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로더 전도부인 교육자,만주선교사, 연화봉여학교 설립
[1877-1943]
[서울에서 출생]



1. 불행한 결혼과 기독교 입교
양우로더는 1877년 8월 16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 양봉환은 전통 양반이었으나 그녀의 남동생 양재창이 배재학당의 초기 학생인 것으로 보아 수구적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우로더이 어린시절은 유복한 집안의 딸로 평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세에 출가하면서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기독신보에 실린 그녀의 가정생활을 보면 심히 불행하여 가정생활을 떨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당시 여인이 가정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아주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 무렵 동생 양재창은 배재학당을 다니며 남대문 안에 있는 상동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양재창은 불행을 당한 누나를 보고 안타까와 하며 신앙생활을 권면했다. 당시 집안의 반대도 있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교회 출석하게 되었다. 동생의 권유로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그녀는 낮설기도 했으나 차츰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는 집회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열심을 내었다. 그 후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우로더라고 했다. 전덕기 목사가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 1907년이었으니 양우로더가 상동교회 세례교인이 된 것은 1907년 이후라고 여겨진다.

한편 이 무렵 상동교회 안에서는 스크랜톤 부인이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성경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과 한국역사도 가르쳤고 영어도 가르쳤다. 양우로더는 전덕기 목사의 추천으로 이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08년 앨버슨이 교장이 되면서 신학교를 체제를 갖추고 부인성서학원으로 정식 출발했다.


2. 연화봉여학교 설립.
기독교를 통해 새 삶을 얻게된 양우로더는 보다 적극적으로 살았다. 서울 근방으로 나가 전도를 했으며, 남대문 밖 연화봉에 학교를 세웠다. 여자아이 서너명으로 학교를 시작하니 미국인 여선교사들도 적극 돕고 나섰다. 이렇게 해서 연화봉여학교가 1908년 설립되었고 이어 교회도 설립하여 상동교회 지교회가 되었다.

1912년 3월 그녀는 부인성서학원을 제1회로 졸업했다. 성서학원을 졸업한 양우로더는 바로 전도부인이 되어 학생들의 신앙지도를 책임지게 되었다. 특히 그녀는 매주일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 근교로 나가 전도했으며 또 시골의 작은 교회 주일학교도 도왔다. 이렇게 해서 1914년 10월에서 1915년 4월까지 6개월동안 양우로더 지도하에 성서학원 학생들이 전도한 실적을 보면 새신자 187명 비신자전도 730명 교인상담 9611명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가 그녀의 가장 바쁜 시기였다. 한편 밭은골교회, 염창교회,창의문밖교회 설립은 그녀의 전도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1920년 그는 성서학원을 떠나 자신이 설립한 염창교회 전도부인으로 파송받아 2년간 시무했고 다시 1922년 종로 중앙교회로 옮겨 2년간 시무했다. 1924년 미감리회 여선교회 총회는 만주에 여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선교사를 물색하던중 노련한 전도인으로 성장한 양우로더를 적임자로 생각하고 그녀를 만주 선교사로 결정했다.


3. 만주선교사로 파송받음, 학교를 지키다 소천
1925년 1월 양우로더는 만주선교사로 만주를 향해 출발했다. 만주선교는 남성들에 의해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나 여성선교 사업은 뒤져있었다. 그래서 양우로더가 만주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지역교회를 순방하며 여선교회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보호여회'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보호여회는 여성교인들의 자치기구로 교회안팎에서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펼치는 기반이 되었다. 양우로더는 불모지 상태였던 만주의 여선교 사업을 개척하고 3년만에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후로 여선교회는 박순신 등의 선교사를 보내 해방되기까지 만주선교를 계속했다.

3년만에 서울에 돌아온 양우러더는 자신이 설립한 연화봉여학교가 경영남에 빠져 폐교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도부인직을 내놓고 학교를 살리는 일에 전념했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사업을 하기도 했고 또 성서학원을 동창을 비롯하여 40여명으로 부인친목회를 조직하여 그 회비로 교육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또 양우로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학교에 희사했다. 1930년 발행된 "조선교육대관"을 보면 연화봉여학교는 교지 190평 교사 26평을 갖추고 있었고 그때까지 졸업생 74명을 배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그녀가 설립한 연화봉교회도 꾸준히 발전되다가 같은 지역 안에 남감리회가 세웠던 용산교회와 합해져 청파동교회가 되었다. 양우로더는 이 청파동교회 본처 전도사(장로)가 되어 교회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녀는 일제말기 어려움 속에서도 연화봉여학교 설립자 겸 교장을 학교를 지키다가 1943년 3월 제2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그해 6월6일 조용히 별세했다.

양우로더는 초년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전도부인으로 교육가로 여성 선교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신앙인이었다. 그가 설립한 연화봉여학교는 동생이 계속 맡아 운영하다가 해방후 신광여자중고등학교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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