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기호에 대한 탐닉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김승하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 아버지께서 완성하라고 맡기신 일, 곧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어도 너희는 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기꺼이 맞아들일 것이다. (요5: 36,43)

-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인간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그러면 이성적 존재란 무엇인가? 동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말이다.
- 나는 무엇인가? 나는 판사다. 그러면 판사는 무엇인가? 죄인을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죄인을 판단하는 사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나 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나는 무엇인가? 나는 하버드 출신이다. 그러면 하버드 출신이란 무엇인가? 엘리뜨라는 말이다. 그러면 엘리뜨는 또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히 능력 있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 모양입니다. 물론 다르다는 것의 의미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극복하기 힘든 열등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열등감의 근원은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부와 권력과 지식과 아름다움이 무너져버리는 일종의 무의미함, 즉 허무, 무가치함에 대한 두려움이지요. 나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절망적 인식으로 인한 공포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뭔가 의미 있고 특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소쉬르라는 서구의 학자가 시니피앙(기표; 기호, 지시어)과 시니피에(기의; 의미, 지시대상)의 관계는 필연성이 없다(자의적이다)는 발언으로 유명해진 모양입니다. '돼지' 이라는 언어는 곧 '돼지로 불리는 대상' 과 당연히 일치한다고(필연성) 간주해왔던 이제까지의 서구식 사고 패턴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서양인들에게는 그게 새로운 각성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그게 그리 대단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기호는 지시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호의 의미란 우리가 직관적으로 파악한 대상을 나타내는 일종의 약속일 뿐입니다. 돼지와 개라는 두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그들을 지시하는 기호(단어;시니피앙)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직관이 그 두 대상을 다른 것으로 구별해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언어는 실체를 지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차용되었을 뿐이지요. 그 수단은 아무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개라 하든 말이라하든 돼지라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다만 그 말이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는 점만 서로 약속하고 확인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니 실체는 없고 무수히 이어지는 기호(시니피앙)의 나열만이 있다는 신세 타령은 남의 다리나 긁고 있는 것이지요. 달을 보지 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주시하느냐는 동양 선사의 말은 기호(시니피앙)에 집착하는 인간에 대한 일침이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이란 실체는 없습니까? 단지 참다운 인간을 지시하는 기호만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닌 나에 대한 증거라는 것들은 주로 인간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표에 불과합니다. 비싼 명품(메이커제)을 입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행태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류대 출신이라는 학벌을 통해, 혹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집안이라는 내력을 통해, 권력의 요직에 있다는 지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포장하려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사' 자 붙은 직업들이 바로 그러한 기호들에 속하지요.

그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나는 00 대학 출신이다. 나는 교수다.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나는 회장이다. 자기가 차지한 지위와 재산을 나타내는 기호들을 자랑스레 내세웁니다. 그가 지금 어떤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0 0 다' 라는 기호만이 과시될 뿐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뭔가가 되겠다는, 기호 쟁탈 내지는 기호 성취 욕구를 자신의 희망이요 꿈이라고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숱한 지위와 명칭과 신분들은 참다운 실체가 아닙니다. 그저 단지 기호일 뿐입니다. 기호가 참다운 인간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호는 기호일 뿐입니다. 그것이 지시하는 바의 실체가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증거로 제시하신 것은 세상이 붙여주는 기호(상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세운 증거는 바로 자신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며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이 주신 일이었습니다.

대통령이냐 재벌총수냐 청소부냐 백수냐 하는 기호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서로 다른 기호일 뿐입니다. 가치가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 다른 것일 따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습니다. 만일 고슴도치 사회에도 세계 미인 대회가 있다면 뭍 고듬도치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만한 미스 유니버스도 뽑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또는 자연)의 눈에는 미스 유니버스 고슴도치나 못생긴 고슴도치나 그저 고슴도치일 따름입니다. 고슴도치간의 미추의 판단이 인간(또는 자연)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고슴도치들 사이에 형성된 자의적 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개개인이 목숨 걸고 차지한 기호가 어떤 것이냐가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 실천 행위 하나 하나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데(도우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불편한 이웃들을 향한 구원의 손길 말입니다.

참다운 인간의 실체는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실체 없는 기호만이 남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죄와 불평등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실천하는 삶, 거기서 우리는 참다운 인간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인간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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