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때를 아는 지혜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김승하

진정한 영웅은 들어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인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숱한 대중의 열광과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각고의 노력과 땀흘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놓는 것입니다. 그 환호와 열광의 뒷자리로 사라져갈 줄도 알아야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임하는 장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무턱대 놓고 싸움에 응해 겁 없이 덤비는 것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때론 물러서고 피할 줄도 알아야 진정 용기 있는 장수라 할 수 있습니다. 용기와 만용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장수는 싸워야 할 때와 피해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적을 향해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고 죽은 듯이 침잠할 수 있는 자제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별의 아픔이 가슴에 저리도록 처절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별했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이별이란 사건은 우리네 인생에 여러 번 왔다가는 흔한 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별이 사무치도록 상처를 남겼다면, 이는 그 떠난 사람이 너무도 절실한 인연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상처는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흔적으로서 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헤어짐이 그토록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걸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 사람과 헤어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헤어짐을 수용할 수 없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라는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성전과 도시를 떠나 그에게로 찾아왔습니다. 그의 인기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암흑의 시대에 절망에 젖은 사람들에게 그는 예언자로 인식되었고, 당대의 권력자 헤롯조차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요한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한 수 지도를 받으러 온 형국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키워준 호랑이 새끼에게 물리는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차츰 요한보다도 예수라는 인물에 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 중에도 그를 떠나 예수에게로 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권력의 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기의 순위가 바뀌었습니다. 화가 날 노릇 아닙니까? 요한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토대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 대중에 대한 배신감.

그 때 요한이 취한 태도는 가히 영웅적이었습니다.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가 온 것을 안 것입니다. 지는 해가 된 것을 인식한 것이지요. 해는 떠오르면 지게 마련입니다. 그는 그 때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기에 자신이 주장할 권리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내의 손꼽히는 대형 교회 목사들이 자신이 일구어놓은 교회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현상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식을 충분히 교육 시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대범한(?) 주장도 곁들여집니다.

자식이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복제입니다. 나이가 들면 육체가 쇠하고 기력이 딸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줄 알았던 생명력의 추락을 감지한 인간이 그 늙어짐을 보상해줄 대체적 생명력으로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에 대한 집착은 실은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체가 그 죽음의 벽을 뛰어넘기 위한 시도가 바로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젊은 자식을 보며 늙어 가는 자신의 초라함을 잊을 수 있습니다. 서서히 엄습해오는 죽음의 두려움을 달래 줄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는 것도 바로 자식에게서 가능합니다.

목사직의 자식 승계가 갖는 의미는 바로 내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제껏 일구어 얻은 저 수많은 교인과 그들의 주머니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돈과 그들의 직업이 복합적으로 엮어내는 권력의 메카니즘이 창출해내는 명예로운 권세를 내놓아야한다는 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언제까지고 누리고 싶지만 그의 육체는 그의 뜻대로 따라주질 않습니다. 여기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식을 통한 계승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은 입술로 만들어낸 광고선전일 뿐입니다. 오직 교인들을 향해 가르치기 위한 판매용 말씀일 뿐입니다. 내가 온 존재를 던져 실천해야 할 계명은 아니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결혼을 안 했는지도 모릅니다. 애시당초 자식을 통해 자기의 권세를 이어가려는 욕망은 꿈도 꿀 수 없게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찾아가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분, 곧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그분이 세례를 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이다. 신부를 맞이하는 것은 신랑이지만 신랑의 친구가 곁에 섰다가 그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이런 기쁨이 넘치고 있다. 그분은 점점 번영해야 하고 나는 점점 쇠퇴해야 한다." (요 3: 26-30)

이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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