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강도의 굴혈 2002년 01월 01일
작성자 김승하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장사꾼들과 돈 바꿔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성전에서 몰아내시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며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셨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당장 치우고 앞으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2 :14-16)


왕이 어떤 현자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했습니다. 현자는 왜 자기가 이러한 선물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왕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왕은 그 현자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현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왕께서 제가 계속 덕 있는 사람으로서 남아있기를 바라신다면 이 재물을 도로 거두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어렵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미워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권력의 실책을 들추어 내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자일까요? 아니면 권력자를 향해 세상에 둘도 없는 독재자라고 욕하는 자일까요? 그도 아니면 권력자를 향해 무능하다고 질책하며 건방을 떠는 자일까요? 아마도 모두가 눈에 가시처럼 꼴 보기 싫겠지만 권력자가 가장 미워하는 자는 아닙니다.

권력자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증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는 자는 바로 권력자의 검은 돈줄을 파헤쳐 끊어버리려는 자입니다. 다른 놈들은 그저 넓은 아량으로 '민주 사회니까' 하고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권력자의 축재 수단인 돈줄을 건드리는 순간, 그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의 하나뿐인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입니다.

종교 권력을 가진 자가 가장 미워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일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미친 놈 혹은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자로 치부하고 왕따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자의 돈줄을 건드리며 비판하는 자는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는 세상의 권력에나 종교 권력에나 똑같이 적용되는 질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에서도 우리는 이런 질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은 대제사장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즉 일종의 검은 커넥션이지요. 성전 안의 장사치들은 대제사장의 암묵적 승인 하에 독점적 판매권을 가지고 성전 순례자들에게 제사에 사용할 제물들을 비싼 값에 팔았을 것입니다. 휴가철이면 바닷가에 가서 비싸다 싶으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 바가지 쓰고 마는 피서객처럼, 멀리서 성전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는 명분 때문에, 너무 심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뒤틀리는 자신을 오히려 책망해가며 비싼 값을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얻어진 수익의 일부는 제사장에게 상납되었겠지요. 성전의 장사치들은 제사장의 검은 돈줄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돈줄들을 내어쫓으며 장사판을 뒤엎었으니 제사장들의 심기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로 하여금 예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끔 만든 결정적 요인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축재 시스템을 뒤집어엎으신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법정에서 갖가지 말로 예수를 고발했으나 실상 제사장들이 하고 싶었던 지적은 '왜 내 밥줄을 건드려?'였던 것입니다.

한 집단의 건전성은 그 집단 내에서 돈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돈의 흐름이 은밀하게 밀실화하여 소수의 손아귀에 장악되면, 인간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지도자의 욕심이 발동함으로 말미암아 돈줄의 왜곡이 발생합니다. 개인의 사욕(흔히 공익으로 위장되지요)을 위해 공금이 이리저리 전용되어지고, 권력자는 더욱더 많이 필요해진 돈을 모으기 위해 무리한 재촉을 하거나 어거지 명분과 이론을 만들어 사람들을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보통 사람들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돈의 흐름은 그 집단의 부패와 타락으로 귀결되어집니다. 숨겨진 돈의 흐름은 권력자와 그 측근의 축재로 귀결되어지며,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권력자 집단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악의 구덩이로 몰아넣습니다.

돈의 마력은 자꾸만 더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돈을 어느 정도 손에 넣으면 그것으로 맛볼 수 있는 소비의 즐거움이란 비슷비슷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수준까지는 좀더 소비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욕망 때문에 돈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재산이 일정 수준을 지난 다음부터는 소비에 대한 기대가 입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갖고 싶다는 축재의 욕구에 이끌려갑니다. 이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배고픔과 절망조차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떠합니까. 돈의 마력이 신앙의 허울을 쓰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 시대에 나타났던 제사장들의 타락도 역시 돈에 대한 탐욕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분깃이 없는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된 십일조를 마음대로 착복 내지는 전용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태는 예수 당시에도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축재의 매력(?) 사로잡혀 세상적으로 번듯한 모양새를 좋아하며, 재물로 이룰 수 있는 화려한 건물 짓기와 하나님의 사업을 빙자한 기업경영에 집착할 때에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은 바늘처럼 우리의 폐부를 찔러올 것입니다.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3: 8)

* 헌물은 하나님께 바쳐진 물질이며 바쳐지기 전에는 헌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헌물을 도적질 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도적질 할 수 있는 사람은 백성이 바친 헌물을 관리하는 자들 즉 제사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도적질 때문에 정죄당하는 대상은 바로 제사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백성이 바친 십일조와 헌물을 본래의 의미대로 쓰지 않고 사사로이 빼돌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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