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기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김승하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워라" 하시자 그들은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이제 떠다가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자 하인들은 그대로 하였다. 잔치 책임자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몰랐으나 그것을 떠 온 하인들은 알고 있었다. 잔치 책임자는 신랑을 불러 "흔히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군요" 하였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으로 이런 기적을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자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2: 7-11)


근대 이후에 축적된 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고등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성경이 주장하는 기적들입니다. 항아리에 넣은 물이 잠시 후 시간이 흐르자 포도주로 변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참으로 황당한 것으로 비과학적인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이나 혹은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미개한 밀림의 원주민들에게나 어울리는 신화적 상상력에 근거한 허황된 얘기를 무조건 믿으라는 요구는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학자적 양심입니다.

근대과학이 지닌 기본적 패러다임은 모든 만물이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정한 장소에서 벼락을 맞았다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 있어도 똑같이 벼락을 맞을 것이라는 의미죠. 그 사람이 제우스의 분노를 살만한 짓을 해서 벼락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서 있는 장소가 벼락을 맞을 만한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벼락이라는 자연의 현상(법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과학 법칙은 경험의 반복성이라는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든 똑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똑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인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예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누구든 그와 똑같은 조건하에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같은 조건하에서 예수가 할 때만 되고,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할 경우에는 안 된다면 그것은 이미 과학적 객관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현상이, 과학이 말하듯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물론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의학은 똑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누구에게나 똑같은 약을 쓰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체질이라는 것이 다르기에 똑같은 약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의학(과학)은 무조건 똑같은 약을 적용합니다. 서양 과학에서 병과 약의 관계는 보편성(경험의 반복성)을 갖는 과학적 법칙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자전거를 먹는 사나이를 텔레비젼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천연덕스레 자전거 바퀴의 살을 밥먹듯이 먹고 있었습니다. 그의 위속으로 들어간 바퀴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의 몸이 소화 흡수해 버렸겠죠.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지요. 과학이 말하는 보편적 개인인 인간은 밥을 먹지 쇠를 먹지는 않습니다. 손바닥으로 글을 읽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또 테니스공을 손에 쥐었다가 펴는 것만으로 테니스공의 속과 겉을 완전히 뒤바뀌어 놓는 소년도 있습니다. 일종의 물질 이동이죠. 혹시 눈속임이 아닌가 해서 그 소년을 면밀히 관찰했던 과학자(노벨상도 받은 믿을 만한 학자임)는 아마도 물리학을 다시 써야 할 것이라는 고백 외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서구의)과학이라는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지식을 모르던 미개한 옛날 사람들의 책에서나 나올 법한 사건들이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으키신 사건들은 과학이 분석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이미 반복적 경험이 가능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오늘날의 (서구)과학이 알지 못하는 에너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분이셨기에 그렇습니다. 그가 보이신 행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영원이 있음을, 욕망의 세계 건너편에 베풂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불가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더라.
손가락은 진리가 아닙니다. 단지 진리인 달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지적 의혹이 처한 자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믿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베풀었더니, 하느님의 나라는 제쳐두고 기적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더라

무기 물질에서 단백질로 그 다음엔 아메바 그 후엔 다세포 생물......원숭이.......인간이라는 진화의 과정을 믿는데 서구의 근대 과학이 필요로 한 것은 '오랜 시간' 이라는 조건뿐이었습니다. 고작 백년도 채 못 사는 인간에게는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 수 십억, 수 백억 년의 세월을 전제함으로써, 아무런 의혹도 없이 무기 물질로부터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로까지의 진화를 믿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물론 거기에 양념으로 무기물이 유기물로 바뀌기 위한 환경적 조건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부분이 발달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그래서 형질이 변했다는 억지도 부려보고, 돌연변이가 생겨서 유전되고 또 돌연변이가 생겨서 또 유전되고 이러다 보면 원숭이가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환상도 동원해보고 했지만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물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포도주로 변했다는 이론은 훨씬 더 과학적으로 그럴 듯한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시간이 얼마 안 걸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물질에서 인간으로라는 엄청난 비약과 비교해 볼 때, 물이 포도주 되는 비약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사실 포도라는 매개체만 더 첨부하면 실제로 지금도 가능한 과정이기도 하기에 비약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송구스러울 정도죠. 그러니 시간이 조금 밖에 안 걸린 것 가지고 시비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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