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살아 있다는 것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권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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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친교실에 최소한 매달 하나 이상의 글을 쓰고자 했었는데, 이 달에는 아무 것도 없이 벌써 마지막 날입니다. 어떤 의무감에 사로 잡혀 글을 쓴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고자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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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은 참 빨리 지나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드디어 잡아 놓고 보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일단, 본래 여기에 왔던 목적인 연구 논문을 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기에, 그 일부터 서두르기 시작했죠. 그리고는 내가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귀국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것 저것 쇼핑을 하길래, 저도 찾아 보았으나, 도저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제 우리 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고 봅니다. 웬만한 물건은 우리 나라 에서 사는 것이 더 싸고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연구하는 사람이라 책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책을 찾아 보았으나, 웬만한 책들은 거의 100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3만원 정도 하더군요. 세상에 교과서 한 권에 10만원이나 하니 어디 선뜩 사겠습니까? 도서관에서 빌려서 내용을 잘 훑어보고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나 두 번 세 번 검토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여직껏 목록만 적어 두고 사지는 못했습니다.

이 곳에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하지만, 다시는 못올 곳이란 생각이 드니 그래도 가볼 만한 곳은 어디가 있을까 찾아 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꼽더군요. 이 근처에서 반드시 가야할 곳이라고요. 가깝다나요? 가는데만 무려 6시간 걸리더군요. 하지만, 혼자만의 여행은 할 만한 것이 못되더군요. 어떤 장소에 가서 눈도장을 찍는 것보다는 어떤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가 더 의미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다행히 나이아가라에 가면서 토론토에 계신 강혜실, 전찬용 선생님과, 버팔로에 계신 김인걸, 문영혜 집사님 가족을 뵐 수 있었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았습니다. 외국에 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는데, 이분들에게서는 외국에 가면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미쉬들이 사는 동네에 가서 구경도 했습니다.

집에 가지고 있던 세간살이들도 이제 슬슬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팔아야 할 것과 남에게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한국으로 가지고 갈 것. 이렇게 분류하면서 말이죠.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딱 가방 두 개로 제한 되기에 잘 챙겨야 합니다. 너무 누거워도 안되고요. 하나 하나 챙기다 보면 가져 갈 것이 너무 많고, 또 어떻게 보면 다 버리고 몸 만 가도 될 것 같고, 혼란스럽습니다.

이 곳에서의 삶을 마감하면서, 어렴풋이 인생에서의 마감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을 정리할 수 있을까?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정리해야만 할까? 온통 물음표 투성이입니다. 분명 마감해야 할 그 날이 있지만, 그게 언제인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 하면서도 이것 저것 정리하고 준비하는 것들이 많은데, 인생의 한 획을 긋기 위해서는 무엇을 정리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는 아직 생각도 못해 보았습니다. 마치 그런 날이 없을 것 같이 생각하면서요.

이제 콜럼버스에서의 남은 하루 하루가 전의 그 날들과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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