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추악하고 아름다운 나라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권혁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소란할 때에는 단 한 자라도 소식을 남겨야 다른 사람들이 안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연구실에서 엄청난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CNN에 접속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은 한국의 TV 방송에 연결하여 생생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앉아서 한국의 방송을 통하여 미국의 현재 사건을 보았죠. 세상 참 좁아졌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 말이죠. 저녁에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TV를 켜니 온통 한 가지 얘기 밖에 없더군요. 하기야 한국에서도 밤새 중계하는 판에 미국의 방송은 오죽하겠습니까? 이번 사건이 아직은 어떻게 진행이 될지 모르겠지만, 어제 몇 가지 느끼는 것이 있어 적습니다.

1. 혼란.
무너진 그 건물들을 꼭 일년 전에 방문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갔던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한 그 위용에 기가 죽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계 최강인 미국 경제의 위용을 상징하는 곳이었기에 표적으로 삼았을 것이겠죠. 이 엄청난 것이 하루 아침에 폭삭 주져앉았고, 그와 함께 엄청난 수의 무고한 인명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런데, 같은 미국이라고 하지만 서울-부산 간 거리의 몇 배나 떨어진 이 곳에서도 혼란이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TV에서 눈을 떼고 밖을 돌아보면 달라진 것이 하나 없고 위험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엄청난 짓들을 하고 있더군요. (하기야 더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는 전군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다죠?
한 주유소에는 기름을 넣고자 차들이 줄을 섰고, 그 옆의 주유소는 이미 재고량이 떨어졌는지 아님 비축하려고 하는지 문을 닫았더군요. 어떤 곳에서는 기름 값이 평소의 몇 배로 올랐다는 뉴스도 있고요. 식료품점에서는 물과 비상 식량을 쓸어 간지 오래고요. 전쟁의 위험에 떨던 서울도 아닌 그 넓은 미국의 조용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혼란이 믿겨지지 않더군요.
여유있고 마음씨 좋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美國)로 잘못 알려진 나라의 본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래, 두려움은 그 누구에게나 있다. 쌀 많이 생산하는 부자 나라(米國)일 뿐이다. 혹시, 아시안 계통에서 테러를 주도했다고 하면, 흥분한 일부 사람들이 아시안계 외국인들에게 역테러를 가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더군요. 평소에도 힘 쎄다며 다른 나라 폭격하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의 소굴에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 자원 봉사
TV를 계속 보는 동안 신기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뉴욕 시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자원 봉사자가 필요없으니 그냥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생존자를 발굴하고, 부상자들을 돌보고, 등등 여러 가지 일들에서 필요한 일손들이 많을텐데 말이죠. 평소에도 이 곳에서 느낀 점은 자원 봉사가 참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에서 나이든 사람, 특히 정년 퇴직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자원 봉사에 열심인 모습을 보았는데, 이런 엄청난 일이 발생한 때에도 자신의 일처럼 나서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헌혈을 안내하는 방송이 자주 나왔습니다. 몇 곳의 병원에서 헌혈을 받고 있는데, 그냥 찾아가면 헌혈을 할 수 없다고 하거군요. 헌혈할 사람이 밀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전화로 확인받은 후 오라고 하더군요.
먹고 사는 물질적인 것에만 풍족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런 자원 봉사의 일손들이 풍족한 나라가 정말 아름다운 나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3. 기도
대통령이 나와서 연설문을 발표하는데, 누가 초안을 작성했는지 참 그럴듯하게 잘 적었더군요. 그러다 시편 23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저는 멈칫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두렵지 않다는 그 구절말입니다. 그리고는 기도로 이번 사태 해결에 동참해 달라는 말도 하더군요.
또한, TV 방송 중 화면 아랫 부분에는 자막이 쉴 새 지나갔는데, 현재 모든 공항이 폐쇄되었고, 관공서와 어느 어느 백화점이 문을 닫았고, 어느 학교가 휴교라는 등 필요한 정보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으로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교회에 문의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썩을 대로 썩어진 말세의 모습을 보이는 米國 사회이지만, 대통령이 만인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담대히 나갈 것을 강조하고, 드러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함께하고 있기에 美國이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