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내가 두려워하는 것, 한 가지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누구나 자기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겁니다. 교직에 대한 제 자부심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는 아이들과 생활한다는 점이 그렇고, 많은 교과 가운데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또 그렇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데 기초가 필요하다는 말 들어봤습니까? 아마 들어본 적이 없을겁니다. 역사는 살아온 인간들의 이야기이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니까요. 물론 교과서랍시고 나온 책들에는 온통 역사적 사실들로 꽉 차 있지요. 참 재미없습니다. 만약 시험이란 제도가 없다면 누가 이런 책을 읽을는지? 그럼에도 많은 아이들은 이 책에 밑줄을 긋고 별표도 쳐 가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그리고 대학입학시험이 끝나자마자 정말 아무 미련도 없이 그 소중했던(?) 교과서를 버립니다. 시험이 끝나고 교실에 나뒹굴고 있는 역사 교과서들을 볼 때마다 그것이 마치 나인 것 처럼 가슴이 아립니다. 아이들은 그 교과서와 더불어 그동안 나에게 배웠던 그 모든 것들도 버려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했던가? 대학입학이 목표인 아이들에게 1년 내내 시험과는 상관없는 의미있는(?) 이야기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목표달성에 도움이 되면서 내가 하고싶은 역사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습니다. 최소한 한 시간에 한 가지만이라도. 내가 하고싶은 역사이야기란 무엇인가?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역사가 역사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따라서 그것을 의심해 보고, 뒤집어 보면서 자기 나름의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공녀(貢女-원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여자라는 뜻입니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원으로 끌려갔던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끌려갔던 여자들, 그 곳 생활을 못견뎌 고국으로 도망온 여자들 곧 환향녀(還鄕女)가 화냥년이 된 우리 역사의 비굴함을 생각합니다. 또 다시 일제 때 정신대로 끌려간 우리의 꽃다운 누이들을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 할머니가 되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할머니들은 부르짖습니다. '니들은 와 구경만 하노'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온통 우리의 역사를 구경만 하게끔 교육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역사책에는 온통 자랑스런 위인들의 업적들만 나열되어 있으니까요. 그 속에 우리네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회한, 한숨과 땀 이런 것들은 없었으니까요.
한해 두해 교직 경력이 쌓여가면서 두려워지는 것은 타성에 젖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졸업하면서 아무 미련없이 버리는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도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 글은 어떤 잡지사에서 우연히 원고 청탁을 받아 쓴 것입니다. 제 자신이 항상 염려하고 있는 것 - 나는 제대로 된 교사인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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