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Christmas is coming soon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권혁순
오랫만에 이 곳에 사는 이야기를 쓰게 되네요. 그 동안 좀 정신 없이 살다가 요즘 방학(제가 참관하는 고등학교가 부활절 방학이라 저도 덩달아 방학)이라 좀 여유 부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이 좀 부끄럽네요.

지난 주만 해도 이곳 날씨는 초 여름, 아니 한 여름 날씨였어요. 갑자기 찾아온 더위에 모든 집들이 에어콘 켜고, 거리에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했죠. 공원에는 일광욕한다고 잔디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온도는 거의 섭씨 25도 이상을 오르락 거렸죠.

주말에 비가 좀 내리더니만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대요. 그러다 어제는 드디어 낮에 눈이 내렸답니다. 내일 아침까지 영하의 온도를 보이겠다는군요. 정말 요상한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하도 신기하여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카메라에 담았답니다.




멀리 보이는 나무에 있는 하얀 것은 벚꽃이고, 집 앞에 흩날리는 하얀 것이 눈이랍니다. 벚꽃과 눈이라. 파란 잔디와의 대비도 인상적이지요.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고 있군요.

어제 오늘 저는 옥수수를 쪄 먹고 있답니다. 한 여름에나 맛 볼 수 있는 옥수수이지만, 눈을 바라보면서 먹는 맛이 참 묘하군요. 그저께 슈퍼에 갔더니 옥수수 10개에 단돈 1달러하더군요. 그 옆에는 후지 사과가 나와 있는데 평소 가격의 반 값이더군요. "new crop"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고요.

저는 지금 많이 혼란스럽답니다. 과연 지금이 어느 계절인가요? 세계가 좁아지면서 전세계가 지구촌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구분이 없이 자유로이 왕래하게 된다는 말을 이제 겨우 실감하고 있는데, 계절도 마구 바뀌고 있고, 과일도 계절에 관계 없이 먹게 되는군요. 이게 과연 살기 좋아진 것인가요?

'기다림'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풍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소망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한 때 유행했던 '아! 대한민국'의 가사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는 무엇이든 다 하려고 시도합니다. 바벨탑보다 더한 것을 시도합니다. 더이상 기다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인스턴트 식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는 자연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한 겨울에 여름 과일을 먹게 되었습니다. 엄동 설한에 딸기가 먹고 싶다는 병든 노모를 위해 눈 속을 헤매다 산신령님의 도움으로 딸기를 구해 왔다는 옛날 얘기가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게 되었고요. 사람도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지놈인지 게놈인지 프로젝트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군요.

'당장'이 아니라, '때가 차기'를 기다리는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과학'이면 다 된다는 과학 만능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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