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퍼온 칼럼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지선미

인간 유전정보(게놈) 지도의 완성과 함께 `유전자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근대 정신의 한 축을 형성했던 진화론이 21세기 벽두에 유전자시대로 활짝 꽃 피는 듯하다. 우리는 앞서 핵시대, 우주시대, 인터넷시대를 맞았다. 핵시대에 인간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게 됐으며, 달착륙으로 상징되는 우주시대에는 시야가 우주로 넓어졌다. 인터넷시대가 오자 시·공간과 공동체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런 `새시대들'은 부정적인 영향도 깊이 남겼다. 핵시대는 바로 냉전의
시대였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 등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재앙을 일상생활 속에
끌어들였다. 우주시대는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처럼 우주전쟁 계획
쪽으로 나아간다. 아직 초기인 인터넷시대도 기존 체제의 일부를 해체·대체하면서 문제를 야기한다.

희망의 새시대가 비슷한 정도의 실망과 문제를 낳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준비 없이 기대치만 높인 게 그중 하나다. 지난 몇년간 많은 매체·기관들이 유전자시대의 도래를 강조해왔다. 그러다보니 생긴 폐해가 유전자 결정론의 확산이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사고·행동에는 유전자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의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여러 조사를 보면 태어나면서 모든 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 쪽으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다. 질병뿐만 아니라 성격·인성·지능·수명 등을 진단해준다는 각종 디엔에이 검사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퍼지고 있다.

유전자 결정론은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 결정론은 항상 강자의 논리다. 약자는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변한다. 20세기 전반기에 유전자 결정론에 기반한 사회진화론이 일부 나라를 휩쓸었다. 대표적인 게 다른 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다.

게놈과 생물학적 의미 사이에는 큰 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다. 유전자의 역사는 인간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고, 유전자의 영향도 어디까지나 확률적이다. 인종 간의 유전자
차이보다 같은 인종내 개인 간의 차이가 훨씬 크다. 이는 문화 간의 차이보다
문화내 개인 간의 차이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유전자를 갖고 어떤
문화에서 태어났느냐는 것보다 각자의 성취가 더 중요하다. 물론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등 살아가기에 `불리한 유전자'가 있다. 이는 차별의 도구가 아니라 관용과 이해를 높이는 데 활용돼야 마땅하다.

유전자시대는 인본주의와 함께 진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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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 원칙을 확실히 하지 않는 유전자시대는 민권·민생 분야에서 2보후퇴가 될 수 있다.

네 사람이 숲으로 들어갔다. 숲을 나오기 전에 한 사람은 죽고 두번째는
변절자가 됐으며 세번째는 미쳐버렸다. 이 숲은 심오한 지식을 상징한다. 안전하게 나온 한 사람은 여러해 동안 몸과 영혼을 수련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도 `인간성 없는 과학'을 7대 죄의 하나로 꼽았다.
김지석 국제부장 jkim@hani.co.kr

[한겨레신문 2월 26일자 칼럼 - '유전자시대 맞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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