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조금씩 시간의 늪 속으로 2001년 01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아침부터 서둘러 북한산에 다녀왔습니다.
눈덮인 산을 걷는 맛이 그만이었습니다.
다들 아이젠을 신고 걷는데, 나는 미끄러움을 그냥 몸으로 받고 싶어서
아이젠을 신지 않았습니다. 간간이 멈춰서서 바라보는 설산의 풍광이
서늘했습니다.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소나무도 멋있더군요.
추사 김정희 님의 "세한도"의 쓸쓸함을 생각했습니다.

능선길에 오르기 직전에 잠시 숨을 돌리는데,
청설모 한 마리가 눈을 대록거리며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더군요.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눈 위를 걷는 녀석의 가벼운 몸짓을
부럽게 바라보는데, 아무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하얀 눈밭이
내 마음을 잡아당기더군요.

'이전 같으면 저 위에 드러누워 몸자국을 남기고 싶어했겠지.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그 후에 젖은 옷을 처리할 일이 막연하기 때문이겠지. 어느덧 나는 살갗에 닿는 눈의 차가움을 귀찮아하게 되어버린 건가? 늙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오롯이 현재에 살지 못하고, 지나간 시간이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매이는 일이겠구나. 이거 조금 처량한 걸.'

생각이 거기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장갑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만져보았습니다. 차가운 느낌이 좋았어요. 눈덩이를 조금 뭉쳐 밑에서 등산화 끈을 고쳐매고 있던 아내에게 던졌습니다. 화들짝 놀라더군요. 몇 번 더 비슷한 장난을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산길을 걷는 내내 나는 남들이 다져놓은 길만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미끄러운 등산로에서 한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내려오면서부터 뒷목이 뻣뻣해지기 시작하더니, 속까지 울렁거려 혼이 났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문득문득 발견하는 나의 달라진 모습이 왜 그리도 낯설었던지요. 하지만 눈덮인 산길을 걸으면서 나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그 길을 걷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몇개의 봉우리들이 맥을 이룬 형제봉 능선을 걸으면서 나는 '함께 한다/있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목요일에도 산에 가려고 합니다(무얼 참고하라는 것인지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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