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12월의 장미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12월의 거리는 화려합니다. 어둠이 내리면 더 화려합니다. 모든 것들이 반짝이는 물체를 위하여 숨죽이고 몸 사리고 바짝 주눅이 듭니다. 오직 반짝이는 것만이 번쩍번쩍 살아있음을 뽐냅니다. 12월의 밤은 그렇게 더욱 화려합니다.
그런 모습에 감흥이 일어 상기된 사람들, 상대적으로 더욱 쓸쓸한 사람들, 감흥도 고독도 못 느끼는 무서운 사람들,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하는 사람들, 꾸던 꿈을 슬쩍 접어두는 사람들 … 거리는 사람의 물결이 일렁입니다. 마당엔 빨래 줄에 널어 놓은 이불호청처럼 바람이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몰려다닙니다. 그 바람 한 자락, 휘익 나를 훑고 지나갑니다.

12월의 정원에 장미가 피었습니다.
녹색이 선명한 12월의 잔디가 무섭습니다. 비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12월에 핀 장미, 녹색 잔디, 토끼보다 더 큰 다람쥐, 아름다웠던 모든 것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
봄부터 장미나무를 타고 오르던 넝쿨이 있었습니다. 나팔꽃 같은.
그 넝쿨이 때로는 내 몸을 칭칭 휘감은 듯 답답했고, 때로는 쑥쑥 뻗어오름이 시원시원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고운 장미꽃을 그리워했고, 때로는 나팔꽃이 장미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늦은 계절까지 청청하기만 하던 그 넝쿨은 한 이틀 새로 폭삭 사그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놀라운 일이!
넝쿨이 걷히자 꽃망울이 맺혀있던 장미나무에서 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한꺼번에 … 여섯 송이의 탐스러운 장미가 피었습니다. 장미는 넝쿨에 짓눌려 여름 내내 파묻혀 지냈습니다.
이제 다른 화려했던 장미들이 겨울을 맞이한 지금, 찬 서리에 노출된 장미들이 다 축 처져버린 지금, 넝쿨에 파묻혀있던 장미가 꽃을 피웠습니다. 자신을 칭칭 휘감고 있던 그 넝쿨들이 찬 서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기도 했던 겁니다.
갇혀있던 장미가 꽃피우고자 하는 몸부림이 없었다면 오늘 꽃은 없습니다. 새롭게 꽃망울 맺고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장미는 갇혀있는 동안 자신도 꽃 한 송이 피우고자 망울을 맺고 햇빛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장미는 탐스럽게 12월을 맞이합니다. 희망입니다.
인생도 그런 것!

비바람이 마녀의 손톱을 바짝 세운 채 할퀴고 다니는 12월의 런던, 내 작은 뜰에서 장미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푸르게 날선 칼 바람이어도 거기 장미향기가 한 줌 묻어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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