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천안살이 보고서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손성현
가을걷이를 끝낸 들녘이 한가로워 보이는 이 즈음에도
농부들은 손길은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노랗게 익은 낟알을 여기 저기 널어놓고
가을 햇살에 말리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더니
요즘은 콩 농사, 팥 농사 끝 무렵이라 집집마다 도리깨질이 한창입니다.

점심 식사 후 저는
할머니(이정희 선생님의 어머님)의 부탁으로
무 파묻을 구덩이를 파게되었습니다.
아침에 뽑아놓은 무 일부는 디아코니아 언님들께 나눠주셨죠.
노동복으로 갈아입으신 언님들이 부지런히 무를 날랐습니다.

이제 남은 무들은 김치, 깍두기 담그는데 쓰고
또 일부는 바람들지 않게 땅에 묻었다가 설 지나고 꺼낸다고 하더군요.
오랜만에 땀 좀 흘리겠거니 하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삽을 잡았습니다.
할머니께서 봐놓으신 땅은, 그러나 완전히 돌밭 아니었겠습니까?
헤헤거리며 시작한 노동은
삽 끝이 돌덩이에 부딪히며 퉁겨내는 불꽃처럼
맹렬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파 들어간 자리에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둔 마른 볏짚을 둘러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해놔야 한 겨울에도 무가 안 언다고 하시더군요.

바로 오늘 아침에 뽑아 싱싱한 빛이 좋은 무들을
볏짚 위로 차곡차곡 쌓아 놓고,
옆으로 여유 있게 남겨진 볏짚을 가운데로 추스르니
모양새가 그럴 듯 했습니다.
그 위로 파헤쳐 놓았던 흙을 덮어두는데
볏짚 두 뭉치는 흙 위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무를 꺼내기 쉽답니다.

설 지난 뒤에도 바람 들지 않은 싱싱한 무를 먹기 위해,
아주 초보적인 노동을 마치고도 느낄 수 있는 이 초촐한 긍지!
땀 흘리며 할 수 있는 뭔가를 했다는 대견스러움!
매일 점심 저의 허기를 달래주시는 할머니,
지난 봄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밭일을 해오신 농부 할머니의
튼실한 노동의 한 부분에 동참하면서 맛본 기쁨과 감사를
그냥 흘려보내기 싫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꾸벅

천안에서 손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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