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월요일 저녁입니다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권혁순 집사님,
지금은 월요일 저녁입니다. 실없이 웬 요일 타령이냐구요?
주일 다음은 월요일이고, 지금도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있기에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하기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삶이 심심치 않고, 삶이 심심치 않기에 생각도 하고 기도도 하는 거겠지요.

누군가가 그랬지요. 하나님은 한꺼번에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구요.
하나님의 말씀은 스타카토식으로 들려온대요. 주의해서 듣는 사람만이
그 멜로디를 알아들을 수 있다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지금 권 집사를 통해
어떤 연주를 하고 계실 터인 데, 들리지 않는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다보면
귀가 열리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망하는 까닭은 우리가 실망스런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우리가 외롭다고 느끼는 까닭은 외로움의 렌즈로 세상을 보기 때문일 거예요. 전망이 불투명해도 하나님의 시간을 끈덕지게 기다리는 사람은 어느날 새벽처럼 다가오는 한 소식을 듣게 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이의 자세이지요. 아름다운 기다림은 끝끝내 기다림이요, 기다림의 내용을 오늘의 자리에서 선취(先取)하는 것이라지요?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나는 어느 주일 오후, 느닷없이 삶이 권태로워져서 견딜 수가 없던 날이 있었어요. 친구를 불러내자니 친구에게 우울함을 전염시킬 것 같아 망설여졌고, 영화를 보자니 영화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어요. 안절부절 못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집에 돌아와 서재를 뒤졌지요. 읽은 만한 게 있을까 하고. 그러다가 이상의 <권태>를 집어들고는 연거푸 3번을 읽었어요. 권태의 세계에서 깨어난 것은 한 밤중이었는데, 나는 이미 회복되어 있었어요. 권태란 놈이 본시 실체없는 허깨비였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삶이 답답할 때면 뭔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기는 해.

권집사는 외롭겠지만 용민이는 참 좋겠네. 한 8개월 만에 엄마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말이야. 권집사도 곧 돌아올 기회가 있겠지 뭐. 대학교 이사들 눈이 열려 권집사를 발견하게 해달라고 기도할까? 자, 괜히 내 넋두리가 길어지고 말았네. 잘 있어요. 컴퓨터 세상이 좋은 면도 있구먼. 이렇게라도 대화가 가능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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