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저 오늘 바람났었어요.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지선미
참된 인식은 그에 관한 경험이 종결되는 순간에 이루어 진다고 했던가요? 살랑 살랑 봄 바람에 처녀 마음이 설레인다는 말 뜻을 오늘에서야 이해했다면 제가 늦되어도 너무 늦된거겠지요?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나 봅니다. 오늘 만큼은 꼼짝 말고 침대 속에만 누워있어야지 다짐했지요. 도시락을 싸서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잠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맑아 지면서 새벽의 갈등이 되살아 났습니다.

얼마 전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가을에 꼭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올거라고 공언(?)을 하고 다녔습니다. 실은 지난 주 금요일에 갈거라고 날짜까지 못박아 두었지요. 조금 우습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냥 가을을 떠나 보낼 것 같았습니다. ‘염불보다는 젯밥이라’고 전시회보다는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길 가의 단풍이 제게는 우선이었거든요.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면서 오늘이 dead line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따라주질 않더군요. 일단 눕기로 했는데, 예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서 제 가슴에 가을 바람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무당이 신들린 듯이(?) 벌떡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고, 치마까지 차려 입고서는 집을 나섰지요. 지하철만 이용했지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버스까지 타고서 덕수궁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보아도 가을 바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지금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인상파와 근대미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빈센트 반 고호’를 참 좋아 하거든요. 단풍보다는 그의 작품에 마음이 쏠렸기 때문일까요? 가슴이 콩당 콩당 뛰는 것을 지나쳐서 심지어는 그의 작품과 만나는 불륜(?)의 현장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기도까지 나오더군요. 제발 아는 사람 한명이라도 만나지 않게 해주시라구요.

짧은 식견으로 감히 작품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그러나 1층 전시장을 둘러 보면서 제가 받았던 강렬한 인상은 작품에 드러나 있는 색채의 극적인 명암 대비와 보색 대비였습니다. 색채의 명암이나 보색은 작품 안에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르노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에서 흰색을 가장 흰색 답게, 장미빛 뺨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보색과 명암의 대비였다고 나름대로 결론지었지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적대시하고 극복하고자 애쓰는 대상이나 요인들이 바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존재임을 오늘 제가 감상한 작품들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부드러움도 감싸 안을 대상이 없으면 더 이상 자신의 의미를 전달 할 수 없듯이 종교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그 밖으로도‘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꿈꾸는 일은 그만 두었으면 싶습니다.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은 2층 『고야:얼굴, 영혼의 거울』전이었는데 원만한 내일을 위해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아 이만 줄이겠습니다. 웬만해서는 1회로 만족하는 저이지만 다시 가서 보려고 마음먹을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가보시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덕수궁 돌담길은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그 소란함이며 매연이란……

오랜만에 달콤한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바람 한번 나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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