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세상은 참...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게으르고 느리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삽니다.
억울할 것도 없이 그게 다 사실이에요.
내가 아이일 때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어른들은 왜 몸을 움직여 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게으르다고 야단을 할까?
나는 일손을 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멍청히 있는 시간이 좋아요.
하릴없이 논다고 혼날 때 마다 나는 참 답답했어요.
어른들이 걷어부치고 여럿이 달라붙어 일년 내내 지어도 못 짓는 집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 몇번 꿈벅꿈벅하면 멋지게 지을 수 있는데,
버스를 타고 차멀리로 토하면서 다섯 시간을 가야 갈 수 있는 서울을 나는 잠시 눈만 감고 있어도 삽시간에 갈 수 있는데,
빨리 빨리 크라고 밥많이 먹이고 키워도 억지로 건널 수 없는 나이를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아줌마도 되고 할머니도 되고 그러는데,
나는 늘 게으른 천덕꾸러기였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요. 내가 어른이 되면 그 때, 우리 아이들은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어도 게으르다고 혼내지 않겠다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겆이를 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주 큰 일인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했지요.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어요.
일 안하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요.
눈과 귀, 손과 발, 잠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고 움직여요.
한꺼번에 몇가지 일을 동시에 부지런히 하고 있어요.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컴퓨터를 하며 tv를 보고, 설겆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돌리며 전화를 하고, 이런 식으로 잠시도 가만 있는 걸 볼 수가 없어요.
나는 다 이해해 줄 수 있는데 말이에요.
저희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게 일 안하고 게으른 것이 아니고,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중일 것이라고 다 이해하려고 작정을 했는데......

우리 애들은 끊임없이 바스락 대고, 잠시도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일이 없으니 걱정이에요. 지금 나는 우리 어머니가 하던 걱정하고는 반대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옛날,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안 움직이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걱정하셨는데,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억울해서 나중에 내 아이들이 생각하고 일 안해도 야단 안치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지금도 나는 몸 안 움직인다고, 게으르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애들은 내가 게으름을 용서해 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세상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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