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무궁화꽃처럼 지고 싶어라.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夕佳軒

무궁화꽃을 볼 때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무궁화꽃이 지는 것을 볼 때마다‘나도 저렇게 가야 할텐데……’라고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무궁화꽃이 질 때는 마치 피어나기 전의 봉오리처럼 꽃잎을 접고서 미련 없이 꽃대로부터 뚝 뚝 떨어지지요. 깨끗하고 자유로우며 미련 없어 보이는 죽음의 극치를 저는 무궁화꽃을 통해 느끼고는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의 부모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들렀다가 우연히 소천하신 어느 권사님의 유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우들끼리 복사해서 한장씩 나누어 보시는데 저도 받아 보았지요.

유 언 장 - 자녀들에게
1997년 3월 작성

너희들 오 남매에게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나는 부모의 책임은 다 하지 못했어도 이때껏 큰 걱정 안시키고 제 앞가림 다하며, 자녀 도리 다 잘하며,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너희들을 보며 늘 고맙게 생각한다. 재산 없는 나로선 아무 것도 물려줄 것은 없으나, 세상에서 제일 좋은 믿음을 물려받길 바란다.

너희 아버지 오십 구세에 폐암이란 진단을 받고 팔 개월간 병원과 집으로 약을 쓰며, 고생 끝에 기도원을 가면 낫는 수도 있고, 통증도 없다고 하기에 용산에 있는 <현신애기도원>을 갔더니, 보기에는 형편없어도 하라는 대로 남들과 같은 믿음 생활을 하다보니 우선 통증도 없고, 큰 고통을 덜하다가 운명(1980년 4월 8일)하심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심을 믿으며 주어진 역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가는 것만이라도 힘쓰다 보니 이 나이가 되도록 이런 건강도 주시고, 의술로도 못 고친 목 병도 고쳐 주셨고, 하나님은 일동 일절을 다 보고 계시다는 느낌을 늘 받으며, 범사에 감사드리며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지상 명령은 너휘들을 구원시키라는 일인데 일을 감당치 못하고 내 어찌 눈을 감으랴. 생각 좀 해 다오.

(1995년 8월 3일) 너희들의 뜻을 무시하고 (내 사후 시신을 모두 기증한 것도) 너희가 믿음 생활을 잘 하다보면 내 뜻도 이해가 될 테니, 어서 온 가족이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 잘 믿다가 먼 훗날에 대대손손이 천국에서 만나자.

하나님과의 약속은 일언 일획도 어기면 안 되니까 명심하고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죽을 것 같을 땐 벽에 걸린 액자에서나, 내 지갑 속에서 <장기 기증운동 본부>에 연락하고, 우리교회 목사님께 신속히 연락 드려 가능하면 장기를 빨리 쓸 수 있도록 빨리 연락하여, 시신 전부를 기증하여 나의 뜻에 차질 없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모든 절차는 목사님께 의논드려 교회 사정이 허락되는 대로 삼일 후든 오일이든 날을 정해 천국 입성환영 예배로 믿음이 없는 너희들 친가, 외가, 친지, 친구 다 모여 즐거운 찬송 많이 부르며, 진리의 말씀 듣다가 변화 받고 예수를 잘 믿고 먼 훗날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나의 평시 소망의 기도니 죽었다고 서운한 생각은 절대 말고, 천국 영생을 기대하며 희망을 가지고 가는 나에게 행여나 산소 호흡기를 씌우거나 코로 음식물을 넣지 말고, 링겔 주사기를 꽂는 일도 절대 말고, 하나님이 생명 거두시는 대로 옛날 노인들처럼 자연사 시켜주길 바라며,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려 산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썩어도 모르고 태워도 모르는 사후 시신이라도 누군가 도울 수 있다는데 다행한 일이며, 두 눈으로는 두 사람의 광명을 찾아줄 수 있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이랴.

생각만 해도 기쁘다. 실컷 살고 난 시신이라도 나을 도와 줄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운 일이니, 행여나 언짢게 생각 말고, 이 어미 생각이 나거든 문턱이 닳도록 다니던 교회를 나가라. 나를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 너희도 반겨 줄 테니, 산소 찾아 산에 가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

>>>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돌아 가신 권사님과 제가 지닌 신앙의 내용은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신앙에 최선을 다하셨으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사신 권사님의 삶 앞에서 제 모습은 한 없이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권사님 세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생각해 볼 때에도 장기 기증을 포함한 시신기증이 갖는 의미는 부정적이다 못해 배타적일텐데도 신앙 안에서 기쁨으로 시신을 기증하기로 하셨던 권사님의 결정은 제가 사후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한 결정과는 차원이 다른 결정이었으며,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 제가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나란히 설 수 없기에……

고인의 시신은 老化로 인하여 장기 기증은 할 수 없었지만, 의학도들의 시신해부를 위하여 성균관대 의대에 안치되었습니다. 권사님께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유가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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