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실

제목 북한산에 다녀왔어요 2000년 01월 01일
작성자 김기석

간밤에 작정했어요.
내일은 산에 가리라.
너무 도봉산만 가는 것 같아 북한산이 삐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이번에는 북한산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아침 나절에 비가 오지 뭡니까?
비가 와도 집을 나서야 산꾼이라 하겠지만 왠지 망설여지더군요.
고적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방에 엎드려 책을 읽었어요.
까무룩 잠이 들뻔 했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산에 가요."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내 딴에는 기껏 반응한다는 게,
"그래, 그럼 남산엘 가든지, 효창공원엘 가든지 나가보지."
그러자 비가 그쳤다면서 늦었지만 예정대로 북한산으로 가자더군요.
약간 머리가 무거웠지만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나 구기동으로 갔어요.
오랜만에 비봉능선을 탔지요. 모처럼 걷는 능선길이 참 좋았어요.
도심지에서는 잘 모르겠더니 산에는 벌써 가을색이 번지고 있었어요.
솔잎도 마치 브리치를 넣은 머리처럼 노란색으로 바뀌고 있었고,
떡갈나무도 다가올 겨우살이 준비에 바빠 보였어요.

비봉 능선에 오르기 전에 바라본 향로봉은 여전히 의젓했어요.
늘 오르던 바위길을 눈으로 더듬는데 괜히 가슴이 짠해지데요.
남들이 가지 않는 바위길을 개척하는 재미도 참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슬아슬했어요.

등산로에는 아직 제집을 짓지 못한 민달팽이가 지천이더군요.
길을 건너 풀숲을 찾는 것일텐데, 사람들 발에 밟힐까 싶어 보이는대로 집어
길을 건네 주었어요. 그 차갑고 미끈미끈한 느낌이 묘하긴 했지만...
비봉 바위길을 오르는데 아내는 약간 망설이더군요.
그래도 난 굳이 그 길을 권했지요. 조금씩 두려움을 극복해야지요.

사모바위 앞 기억나시지요? 이맘 때쯤 사모바위 앞을 지나본 이들은
알 거예요. 하늘하늘 피어난 코스모스가 어찌나 좋던지요. 들국화와
어깨를 곁고, 각색으로 피어난 그 꽃을 바라보면 저절로 노래가 나오게
마련이지요.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 같이 초조하여라. 단풍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 바람 미워서 꽃속에 숨었나....."

문수봉을 우회하여 청수동 암문을 지나 대남문으로 해서 내려왔습니다.
대남문 옆 오솔길은 얼마 전부터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는데,
이전에 쉬어가던 곳은 이미 길조차 없이, 무성한 풀밭이었어요.
자연의 복원력은 참 대단하지요?

북한산 계곡은 몇 군데만 빼고는 다 출입을 금하고 있어요.
탁족하는 재미를 즐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버들치 무리를 보면 흐뭇해져요. 옆에서 걷던 이가 글쎄,
"그물로 탁 건지면 한 접시는 좋이 되겠다" 그러더라구요.
아, 참 이 말은 쓰지 말라고 했는데, 벌써 해버렸네요.

아직 해가 길어서 짧은 산행은 한 나절이면 족할 거예요.
오탁에 물든 도심지에 살면서 마음이 스산해지면 가까운 산에 가세요.
그럴 틈이 어디있냐,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 그러시지 마시구요.
산에 올라 가만히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한번 들어보세요.
얕은 물이지만 한가롭게 헤엄치는 버들치에 눈길을 줘보세요.
앙증맞은 손으로 솔방울을 벗기고 있는 청설모의 또랑또랑한 눈과
눈싸움 한 번 해보세요.

오늘, 나는 참 행복합니다.
누구든 제게 "산에 갑시다" 하고 제안해주세요.
이 가을에 산에 가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시간의 의미를 알겠어요.
(이건 좀 너무 심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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